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1주년 한정 리커버 특별판) - 나, 타인, 세계를 이어주는 40가지 눈부신 이야기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나의 치유공간에서 수련하시는 회원님이나 나의 지인 중에 자신도 나처럼 
심리 공부를 언젠가는 시작하고 싶다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심리 탐구의 필요성은 너무 잘 아는데 하며 그다음에 말끝을 흐린다.
곧이어 붙는 말들은 이렇다.
'제 심리도 불안한데 과연 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 누구 심리상담이나 잘 
할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나는 빙긋 웃는다.



"

심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들 보면
본인 심리가 멜랑꼴리한 사람들이 많아요.

"


비단 심리 분야이겠느냐마는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갖기 위해서
그 관심이 과연 어디에서부터 오겠는가 되짚어보면 많은 케이스가 '결핍'에서 온다.
'나는 이게 부족한데...' 라는 걸 본인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는 하물며 어떻겠는가.
나 또한 예전에 감정이 오르락 내리락하며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과정에 있고 평생 수련이 필요하다.
몸마음 힐러라는 타이틀이라고 본인 몸마음이 완전해서 타인의 몸마음을 치유해준다는 건 아니다.
나는 안내자일 뿐이고 그저 먼저 시작한 사람인 것이다.
뛰어난 안내자와 스승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수련은 본인이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먼저 시작했다고 먼저 다다른다는 법도 없고 뒤늦게 시작했다고 뒤늦게 깨우치는 법도 없다.
수련을 1년 했다, 10년 했다, 30년 했다는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다.
햇수를 채우기 위한 수련인가?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한 수련인가?
수련의 과정과 결과는 본인이 가장 먼저 알 것이다.



나에겐 나의 수련과정에서 가족이 풀리지 않는 숙제같이 여겨진다.
내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억지로 가족을 포함시키지는 않은 이유 중에
하나는 어쩌면 그게 나만의 방식이자 이기심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모두의 삶에 '행복'만 있을 수는 없듯이
어떤 가족에게나 '평화'만 있기엔 쉽지 않다.
심리학에서 나오는 전문용어들의 나열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과정이 어찌됐든 지금의 나는 이렇게 존재하고,
나의 내성적이었던 내면아이는 나의 기억속에서 영원할 것이다.
다양한 치유기법들이 존재하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삶의 지도가 있다는 것을 내가 깨달은 게 맞다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그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손을 굳이
잡아끌어서 혹은 내가 그 내면아이의 세계로 침범해서 그 아이의 감정을
흔들어깨울 필요가 있을까 싶다.

평화를 위한 전쟁은 들어봤어도,
평화를 위한 평화는 과연 존재할지 의문이다.
비온 뒤 땅이 굳어지는 것 또한 시기가 중요하다.
비가 얼만큼 올지 알수도 없고 비가 온 뒤의 땅의 상태가 어떨지 변수는 많다.
사람의 자아는 여러개로 존재하는 게 건강한 상태인 것처럼
나의 어두운 자아를 없애보겠다고 의인화를 시켜 빙의최면치유까지 할 필요는 없다.
치유가 안 먹히면 의인화된 어두운 자아는 더욱 활성화 될 뿐이다.
심지어 어떤 자아는 비록 어두울지언정, 그리고 악할지언정
일반적으로는 자기자신을 해하기보다는 보호하려고 한다.


"

그래서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생채기를 지니고 살기로 했다.

"


언젠가는 때가 올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영원히 그 때가 오지 않을거라고도 생각한다.


채사장님의 책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를 읽으며 한결 편해진 것은
어차피 우리는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결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나를 위한 위로이자 팩트 그대로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목 부분에서 늘 느끼던 이물감이 그제야 사라져 
숨을 하아- 토해내듯 한결 가뿐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나는 고요해질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생채기, 그건 분명 생채기로 존재할 것이다.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우리에게 그 관계만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연결된 관계가 있을까 싶다.
그건 슬프도록 잔인하고 그러면서 아름다운 관계인 것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을 원치 않는다고해서 과연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가?
덜어주기 시작한다면 어디서부터 덜어줄수 있겠냐는 말이다.
마치 가족들이 알고 있는 내가 사실은 내가 아님을 이해시키기 위해
내가 어디서부터 설명하기 시작해야함을 고민하게 되는 것처럼.




개개인의 세계가 각각의 세계대로 온전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희생이 없으면 요구도 없고,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자식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이며
부모는 사랑의 이름으로 희생하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기 자신부터 세계를 갖고 두발로 그 세계를 단단히 딛고 서게 됨으로써,
가족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세계를 인지하게 되고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될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생채기, 그건 분명 생채기로 존재할 것이다.
지워도 지워도 지울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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