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 - 북아일랜드 캠프힐에서 보낸 아날로그 라이프 365일
송은정 지음 / 북폴리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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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숨 쉬는 이 곳이 비록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너무 연하지도, 그렇다고 진하지도 않은 녹색의 표지도 좋았다. 작가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단순히 제목과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는 원초적인 이유만으로 집어 든 책이다. 총 서른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해봤을 고민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마음에 와 닿았다. 


"하루는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거짓말을 한 뒤 반나절 동안 파주로 면접을 다녀왔다. 저녁 식사를 겸한 2차 심층 면접까지 치렀건만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회사로 출근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오늘이 매일 반복됐다." (16p) 


이직을 고민하던 저자는 '퇴사 후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했다. 그녀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지인들은 무언가를 도전할 나이가 아닌 안정기에 접어들 나이라고 조언했지만 그녀의 선택은 달랐다. 캠프힐(Camphill). 영국 곳곳에서 장애인과 함께 일하며 자원봉사를 하는 곳이다. 공동체 생활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 유럽의 시골 생활에 대한 동경, 지친 심신을 정화해 줄 것만 같은 유기농 식단,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저자는 캠프힐로 떠났다. 







"먹는 것을 스스로 일구는 삶은 멋졌다. 사계절 내내 지속되는 고단한 노동을 단순히 '멋짐'으로 미화하는 것이 적절할 리 없지만 달리 대체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진흙으로 더럽혀진 웰리부츠를 신은 채 사방으로 땀 냄새를 풍기며 귀가하는 가드너들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들의 활기에 속으로 매번 감탄했다." (68p)


저자에게 한국에서의 '채식주의자'로서의 삶이 다소 버거웠다면, 캠프힐에서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유기농 라이프가 가능했다. 식빵을 직접 굽고, 샐러드에 들어갈 양상추와 샐러리를 재배하며, 소와 양들을 초원에 풀어놓고 키웠다. 수확한 감자와 오이, 파, 토마토, 각종 허브가 담긴 채소 상자는 손수레에 실려 집집마다 주기적으로 배달됐다. 그곳에서 저자는 자연의 리듬을 배웠고, 정직한 노동 앞에 겸허해졌다. 






짐작해보면 작가가 한국에서 보냈던 시간들, 그러니까 직장인으로서 보냈던 시간들은 지금의 내가 보내는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어진 업무를 성실하게 해냈을 때 그에 따르는 보상- 대개는 월급-과 회사와 집을 오고 가는 삶.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무언가 재미있는 일에 도전해보자고 생각하지만, 생각에 그치는 삶. 그녀가 한국을 떠나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종종 죄책감에 빠졌던 까닭은, 바쁘게 살아야만 인정받은 세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약 30년 간 허겁지겁 달리는 삶을 살았던 그녀가 하루 아침에 변할 리는 없지만, 캠프힐에서의 생활은 그녀를 조금씩 변화시켰다. 


"현실이 된 꿈이 완벽한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실을 바탕으로 반복되는 일상은 때로 너무나 지루했다. 당장 손에 잡히는 성취가 없으니 열심히 임하겠다는 동기부여가 약해졌고, 스스로가 나태한 사람처럼 느껴져 죄책감에 빠지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상태로 반년쯤 지냈을까. 더디게 움직이는 몬그랜지의 일과에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줄 알았던 달팽이가 실은 최선을 다해 조금씩 이동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분명 나아가고 있었다. 정해진 일과 동안 필요한 만큼의 일을 하는 것이 마치 게으름을 피우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던 건 초과 노동의 경험에서 기인한 슬픔 부작용이었음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느슨한 일상이란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지 시간적 여유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151p)







"디데이가 정해진 뒤로 나의 모든 관심사는 한국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향해 있었다. 더 이상 이곳에 없을 내 모습 따위는 상상하지 않았다. 끝보다 시작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애써 미소 짓던 주디스가 마지막이라는 말을 꺼냈을 때, 그제야 내 앞에 닥친 이별을 실감했다. 수요일 아침의 노랫소리, 카푸치노, 기도하는 시간, 탐스러운 사과나무, 크리스틴의 헬로우, 창문 너머로 비친 달, 안나의 바짓단 소리, 한낮의 티타임, 조의 벤조 연주, 지긋지긋한 빵,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 니콜의 엉터리 댄스, 크리스마스 편지, 따뜻한 해영의 부엌, 그리고 우리가 나눴던 모든 눈 맞춤들. 방금 전까지 선명하게 빛나던 순간들이 과거를 향해 뒷걸음질쳤다." (295p) 


저자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북아일랜드로 떠난지 1년 3개월 만이다. 저자가 여정에서 배운 것은 아일랜드도, 그리고 그녀가 현재 머물고 있는 한국도,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하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지루한 삶 속에서도, 때로는 숨 막힐 듯이 조여오는 삶 속에서도, 매일 조금씩 더 나다운 모습을 산다면, '열심히'보다는 '성실하게' 산다면, 그녀는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 믿는다. 


어제의 나와 조금씩 작별하는 삶. 매일 매일을 성실하게 삶으로서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삶을 그녀는 지향한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이곳은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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