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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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으로 돌아가는 건 다시 인간이 된다는,

결국 다시 무지해진다는 뜻이잖아요.

그동안 실수를 저질렀는데, 다음 생에서도 또 실수를 저지르게 될 거예요.

<심판>, 162p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두 번째 희곡인 <심판>에 등장하는 인물은 단 4명이다. 이제 막 사망하여 심판대에 오른 피고인 '아나톨 피숑', 피고인의 변호를 맡은 '카롤린', 까칠한 검사 '베르트랑' 그리고 최종 심판을 내리게 될 재판장 '가브리엘'.

 

줄거리도 비교적 심플하다. 천국에 온 피고인은 이번 생애에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재능을 낭비하지는 않았는지, 자신과 맞는 짝과 사랑을 했는지 등을 토대로) 심판받고, 유죄일 경우 인간으로 환생하는 벌을 받게 된다. 죄가 없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천국에 남는다.

 

<심판>은 아나톨이 천국에 막 도착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1막과 아나톨의 지난 생애를 돌아보고 심판하는 2막 그리고 다음 생을 위해서 준비를 하는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환생''하나의 형벌'이라고 전제했다는 것이다.

 


가브리엘: (차분하게 또박또박 말한다) 그러니까 삶을 요리로 치자면 유전 25퍼센트, 카르마 25퍼센트,자유의지 50퍼센트가 재료로 들어가는 거예요.

아나톨: 통 무슨 말인지.

카롤린: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 그 세 가지의 영향 하에 놓인다는 뜻이죠. 유전이라 하면 부모, 그리고 당신의 성장 환경을 말해요.

가브리엘: 당신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거나 그들이 갔던 길을 따라간다면, 그건 유전 요소가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이죠. 반대로 무의식이 당신의 선택을 좌우한다면, 그건 카르마가 지배적인 탓이에요.

카롤린: 하지만 당신이 자유 의지를 최대한 활용하면 유전과 카르마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도 있어요.

<심판>, 103-104p


 

피고인 아나톨의 삶을 심판하는 과정은 꽤 흥미롭다. 검사인 베르트랑은 아나톨이 연극적인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판사로 살아온 삶을 지적하며 '연기라는 직업적 소명을 외면함으로써, 재능을 등한시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가 진짜 사랑하는 여성이 아닌 다른 여성과 결혼을 한 것 또한 '운명적 사랑에 실패함으로써 배신을 저질렀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과연 '직업적 소명과 운명적 사랑을 온전히 내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가브리엘: 따라서 피고인 아나톨 피숑을 삶의 형에 처합니다.

<심판>, 156p

 


마지막 장에서는 재판 과정을 거쳐서 '삶의 형'에 처해진 아나톨이 다음 생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 지 결정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나톨이 환생하면서 얻게 될 성별, 부모의 직업이나 성격, 자신의 직업, 장점과 핸디캡(우울증, 불면, 비만)을 선택하는 장면은 꽤 흥미롭다. 변호인과 검사의 성별을 '여성''남성'으로 나눠놓은 것은 작가가 의도한 장치이기도 하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영적인 삶을 살지 못해 다시 환생해야 하는 인간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삶에 있어서 자유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적인 요소들과 운명은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나톨이 천국에서 고른 다음 생에의 요소들은 그의 자유 의지를 통해 충분히 바뀔 가능성이 있다. 결국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라는 점을 영민한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유머러스하고 위트 있는 희곡으로 풀어냈다.

 

ps. 천재적인 음악가 모차르트 또한 '삶의 형'을 피하지 못하고, 샤틀레역에서 아코디연을 켜는 사람으로 환생했다고 한다.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이런 유머를 정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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