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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소프 - 에로스와 타나토스 ㅣ 현대 예술의 거장
퍼트리샤 모리스로 지음, 윤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7월
평점 :
누군가와 섹스를 할 때면 내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려요.
1분 정도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까먹죠.
카메라 뒤에 있을 때 벌어지는 일과 같아요.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걸 까먹어요.
<메이플 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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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문에 채찍을 꼽은 남성, 성기처럼 찍어둔 꽃 사진, 기상천외한 섹스 사진. 금기시되는 주제들을 과감하게 카메라에 담은 이가 있다. 미국의 사진작가인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의 이야기다. 그는 특히 흑인 남성의 누드나 동성애 등 남성의 에로티시즘을 탐구했고, 그의 관심사를 사진에 고스란히 녹였다. 이런 메이플소프의 사진은 대개 외설 시비 논쟁의 중심에 섰는데, 그의 작품을 보는 관객들은 대부분 '음탕하다'는 의견과 '솔직하고 순수하다'는 의견으로 갈렸다. 그리고 그 논란은 그가 사망한 지 30여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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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소프의 작품들은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봤을테지만,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생각으로 사진 작업을 했는지 등 그의 생애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삶에 대해서 다룬 서적이 극히 드물고(메이플소프의 전기 발간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삶을 다룬 영화 '메이플쏘프'(2016)도 최근에서야 국내에 선을 보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메이플소프를 알고 있으며 그의 작품을 주목하지만 의외로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을유문화사에서 선보이는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의 일환으로 지난 7월 발간된 <메이플소프>가 반가운 이유다.
그는 발가벗은 여성들의 사진을 응시하는 걸 즐기는 한편, 자신의 마음이 남성들에게도 끌린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자위에 대해서도 많은 죄책감을 느꼈지만, 자신이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믿음의 차원을 넘어서는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메이플소프>, 72p
<메이플소프>는 현대 예술의 거장이자, 문제적 포토그래퍼인 메이플소프의 평전이다. 메이플소프의 어린시절부터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메이플소프 본인과 그의 주변 인물들로부터 확보한 방대한 증언을 집약적으로 엮어놓았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동성애를 시작하게 된 계기나 포르노 사진을 찍게 된 사건처럼 메이플소프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은밀하고 사적인 이야기들까지 모두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메이플소프>는 단순히 그의 사적인 삶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의 예술세계와 작품도 동시에 조명하며 그의 삶을 균형있게 다루고 있다. 욕망이 집약적으로 발현된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그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의 작품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메이플소프는 영감을 얻으려고 성적인 관계를 이용했다. 그는 포르노그래피를 예술의 영역에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포르노의 관례를 이해할 뿐 아니라, 자신의 섹슈얼리티도 계속 탐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메이플소프는 그런 애정행각을 최소한의 수준으로 유지하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메이플소프>, 245p
관습에 도전하고 금기를 깨는 그의 작품 활동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외설 논란 속에서도 그의 작품이 수십년 간 사랑을 받는 까닭은 어쩌면 그가 그의 작품과 전혀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파격적이고 관습에 도전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