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의 시대 - 일, 사람, 언어의 기록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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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많은 훈들이 남아 이 시대와 여전히 동시하고 있다.

전근대적인 야만의 언어들이,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낡은 언어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한다는 것은 몹시 모욕적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이제 폐기하고 스스로의 훈을 만들 필요가 있다."

훈의시대, 246p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자. 칠판 옆에는 '교훈' 또는 '급훈'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하면 된다' 등의 소위 '바람직한 말'이 적혀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학교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이러한 '계몽의 언어'들을 종종 만나곤 했다. 한 두 세대만 위로 올라가더라도 각 가정에 가훈(家訓)이 존재했고, 학교에는 교훈, 군대에는 훈련, 회사에는 사훈 등이 있게 마련이었다. 가시화하지 않았을 뿐 요즘에도 우리는 보란듯이 존재하는 여러 ''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김민섭 작가의 신작 <훈의 시대>는 바로 이러한 훈에 대한 이야기다. '()'은 글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가르침'이라는 뜻인데, 작가에게 있어서 이러한 가르침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지만, 어두운 곳에 숨어 개인이 주체로 서는 것을 방해하는 일종의 '괴물'이다.

 

나는 나의 자녀가 (특히 딸이) 3년 동안 '참된 일꾼', '착한 딸', '어진 어머니'라는 훈을 보며 등교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새겨진 큰 바위를 보는 일도, 그것이 명시된 교가를 부르는 일도 없으면 한다. 물론 나는 그가 착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나와는 달리 어진 부모가 되기를 바라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참된 노동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순종하거나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하지 않기를 더욱 바라고, 결혼과 출산을 온전히 자신이 선택하기를 더욱 바라고,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있기를 더욱 바란다. 그러니까 사회적 개인이 아닌 온전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41p)”

 

저자에게 있어서 ''은 개인을 시대에 영속시키는 동시에 끊임없이 지워왔으며 특히 사유의 범위를 그 함의의 테두리에 가두고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다시 말해서, '규정된 언어'인 것이다. 우리는 정해진 훈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가둬왔으며, 수동적인 형태의 인간으로 자라왔다. 여자 고등학교에서는 '순결', '정숙' 등을 권장하고, 남고에서는 '용기', '개척' 등의 훈을 권장한다. 회사에서 마주하게 된 훈은 어떠한가. '남들보다 두 배 더 열심히 일하고' 등의 듣기만 해도 지치는 훈이 대부분이다. 또 이러한 훈들은 경영진이 바뀔 때마다 같이 바뀌어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다.

 

저자는 이런 훈을 전복시키지 못한다는 우리를 규정하는 언어에 노골적으로 잠재해 있는 욕망에 잡아먹힐 것이라고 경고한다. 김민섭 작가의 전작이었던 <대리사회>에서처럼 욕망에 잡아먹힌 '대리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묵직한 경고는 우리에게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것을 강조한다.

 

새로운 시대의 개막은 낡은 언어들을 청산하는 데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다음 세대를 위해 우리에게 익순한 언어들에 어떠한 욕망들이 뒤섞여 있는지를 직시하고 버릴 것들을 과감히 버려나가야 한다. (246p)”

 

저자는 책의 끝자락에 자신의 훈을 제시한다.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 저자가 제시한 이 훈은 우리가 살면서 만나왔던, 폭력적이고 지극히 강압적이며, 우리의 삶을 마음대로 규정짓던 훈들과는 다르다. 저자의 훈은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상처주지 않으며, 무겁지 않다. 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수많은 훈을 마주하게 될 우리들은 생각해야 한다. 우리를 잠식하던 훈들을 과감하게 바꿔가며, 욕망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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