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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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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 같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 번으로 사라지듯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불행의 크기를 가늠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복을 맞춰 입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텅 빈 체육관 한 켠에서, 그러니까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곳에서 각자가 가진 불행을 나누는 것 뿐이었다. 네가 가진 불행과 내가 가진 불행의 크기가 같지 않았고, 비교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다독였고, 손을 잡았고, 어깨에 기대어 울었다. 영원히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최은영 작가의 신작 <내게 무해한 사람>은 단짝 친구와 누가 더 불행한가 경쟁하듯 이야기 하며, 서로를 다독여주고 때로는 상처를 받았던 내 유년 시절과 닮아있다. 그래서 낯설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아프다. 일곱 편의 단편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서 출간된 이 책에는 어린 시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상처의 조각들이 담겨있다. 작가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미숙하고 상처받은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며, 성년이 되기 전인 '미완(未完)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시간이 흐른 뒤에 잠깐 멈춰서서 돌아본 그 시간은 어떠했을까. 익숙하지만 모든 것이 미숙했던 시간. 상처 받았지만,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시간들이 잊혀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일곱 편의 이야기에는 저마다의 상처가 담겨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은 모두 다르지만 어쩌면 모두 같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여성을 사랑하는 레즈비언도,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성도, 숙모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모두 누군가의 손길을 애틋하게 바라며, 이 아픈 날들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바랐던, 나와 당신이 지난 모습인 것이다.
작가는 일곱 가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지나온 시간들 우리가 겪었던 그 모든 것들이 실로 우리에게는 무해한 것이었으며, 자신도 그런 삶을 살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담겨있는 제목이기도 하다.
책의 끝자락, 저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에게 무심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 두렵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는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해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도 그 이유에서다. 누구나 아픔의 시간을 보냈기에,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마주한 그 시간들이 더 아프지 않기를,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