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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무령왕릉 -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
김태식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4월
평점 :
처음으로 공주를 여행한 때가 2014년 늦은 여름이었다. 항상 책에서, 기사에서 봐오던 공산성과 무령왕릉을 본다는 생각에 전날부터 가슴이 뛰었다. 1박 2일 동안 공주에 머물면서 이곳의 문화유산을 샅샅이 훑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공산성이라든지 송산리 고분군, 국립공주박물관 등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둘러본 후 느낀 바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주 문화유산 전력의 팔할이 무령왕릉이다!
2천여 년 역사 가운데 백제 유산만 있는 것도 아니요, 하물며 공주가 품고 있는 백제 유산이 무령왕릉만 있는 것도 아닐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이 이곳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왕릉이라는 상징성, 이곳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유물들, 이것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팔할이라는 비중이, 과장은 있을지언정, 아주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사례 한 가지를 미리 말하자면, 광복 이후 일본인에게 인수 받은 공주박물관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보유하고 있는 유물이라고는 와편과 자기 등 200여 점에 불과했고, 사무실 한 칸 없었으며, 전시조차 할 수 없는 영세한 시설이라 당시 존폐설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타오르게 했던 것은 당연 무령왕릉의 강림이었다. 너무나도 훌륭한 이 유적은 108종 2,906점이나 되는 유물을 한꺼번에 토해냈고, 그 덕분에 지금의 국립공주박물관에 이르게된 것이다.
1971년 7월 송산리 고분군에서 배수로 작업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거대한 회오리를 몰고 왔다. 상상해보자. 무령왕릉 이전 우리나라에선 우리의 손으로 발굴한 왕릉은 단 한 기도 없었다. 모두 일본인의 손을 거쳤으며,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금석문 한 점 나온 바 없었다. 그런데 일본인의 손을 거쳤던 송산리 고분군에서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처녀분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것도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이라는 묘지석과 함께 말이다. 그 발견의 흥분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만약 지금 당장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618)이나 신라 법흥왕(法興王, ?~540)의 무덤이 묘지석과 함께 발견된다면 흥분을 주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흥분은 우리나라 발굴사에서 최악의 졸속발굴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 책은 바로 그 발굴 전후 이야기에 전반부를 할애하고 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조선 각지의 무덤 발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연구의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 연구의 목적이라는 것도 정치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그밖에 대부분은 그야말로 도굴에 가까웠다. 공주의 대표적 무덤군인 송산의 고분군의 발굴과정에서는 '가루베 지온'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가루베는 계획적으로 공주로 와서는 고분군을 철저하게 도굴했다. 이 장면에서 식은땀을 흘리게 했던 것은 그가 지금의 무령왕릉의 외관을 인식했던 점이다. 다만 의아하면서도 무척이나 다행인 점은 이 무령왕릉을 당시엔 6호분의 배총(背塚)으로 파악하고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만약 가루베가 이것을 수상쩍다 여겨 파헤쳤다면 무령왕릉임을 밝히는 금석문을 비롯한 수많은 유물들이 알려지지 않고 일본으로 반출됐을 것이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그야말로 우연에 의한 우연이었다. 만약 배수로 공사를 하던 인부의 삽 끝이 한 치라도 벗어났다면, 혹은 공사 진행 도중에 튀어나온 '강돌'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더라면 공주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일본인의 마수를 피하고 하늘의 계시처럼 우리 앞에 나타난 무령왕릉이 최악의 졸속발굴을 피하지 못했던 것은 너무나도 안타깝다. 흥분이 '환장'에 이르러 무덤 안으로 들어가 유물을 마치 '감자밭에서 감자를 캐내듯' 끄집어낸 행위는 사실상 도굴꾼과 도굴행위와 같았다. 당시 우리의 발굴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기자의 한마디는 다음과 같다. '발굴은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17년간 문화재 전문기자로서 논문 같은 기사를 써온 김태식 전 연합뉴스 기자의 신간이다. 풍납토성(2001년)과 화랑세기(2002년)을 출간한 이후 다음 작품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궁금해하고 기다려왔는데, 14년만에 고고학계와 백제사에 큰 파급력을 몰고 왔던 무령왕릉을 들고 나왔다. 저자의 글솜씨는 탁월하다. 처음 써낸 책 풍납토성도 구성이 비슷한데, 풍납토성 발굴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줄곧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방대하면서 자칫 호흡이 길어져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가 명료하게 전달된다. 주제와 관련된 모든 사안을 아우르는 능력 또한 발군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관련 고대 기록과 그동안의 한·중·일 연구 성과를 모두 담고 있는데, 무령왕릉은 이 한 권이면 충분하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무엇보다도 가장 핵심은 흔히 묘지석 혹은 매지권으로 부르는, 앞뒤로 글시가 새겨져 있는 두 장의 돌판이 무엇인지를 규명한 부분이다. 저자가 묘권(墓券)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 돌판은 함께 나온 수천 점의 유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묘권에 의해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이라는 점이 확인 된다는 점은 이들의 가치부여에 있어서 국보지정 문화재와 일반 유물 만큼이나 큰 차이를 가져온다. 무령왕릉에거 가장 핵심적이고 학술적인 '돌판에 새긴 비밀'을 규명해가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이 책은 무령왕릉의 발견과 발굴 전후사정 및 그 실체를 규명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이 모든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궁극적으로 파헤치고자 하는 바는 따로 있다. 책의 부제를 보면 '권력은 왜 고고학 발굴에 열광했나'라는 문구가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국가권력이 고고학에 개입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였다. 군사정권이 수립한 경주개발계획에서는 '국민정서 순화'라든지 '조국근대화', '민족주체성 회복' 등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드러난다. 국가권력은 '정통성'에 집착하고 고고학과의 접점을 이룬다. 이와 같은 메카니즘은 무령왕릉의 발굴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직설 무령왕릉≫은 궁극적으로 국가권력이 역사문화를 통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고학은 왜 그와 같은 권력에 장단을 맞추는지, 무령왕릉을 통해 양자의 유착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 일부분을 발췌하여 책 소개를 마무리한다.
"당속에서 파내는 민족주체성, 그 뿌리는 누가 뭐라 해도 무령왕릉이다. 고고학이 캐내는 유물을 통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위대한 왕이 다스리던 왕국을 떠올린다. 독재자는 대체로 극단적인 국수주의 성향을 지니며, 이를 위해 과거 어느 때인가의 영광을 재현하려 한다. 여기서 고고학과 독재정권은 접점을 이루며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