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내 유년의 빛
베이다오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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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억의 덫


오늘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형태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지만, 막상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나날이 새롭다거나 역동적인 경우는 흔치 않다. 세상이 복잡·다양해지고 분화되고 정밀해질수록, 일상은 더욱 시간의 압박에 쫓기는 듯하다. 예전에 비해 과거를 되돌아보거나 미래를 내다볼 여유가 없을 만큼 현실에 매달려 살고 있다. 기술과 제도가 발전하더라도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에는 영원히 미치지 못할듯 싶다. 그나마 자연법칙적으로 시간은 앞으로만 흘러갈 뿐이라 틈틈히 앞날을 내다보며 살지만,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가운데 지난날을 떠올릴 기회가 쉽게 찾아오진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 우연히 옛 사진들이 담긴 폴더를 열거나 사진첩을 들춰보게 되면, 의도치 않게 추억의 덫에 걸려버린다. 잠시 살펴본것만 같은데 어느새 시간은 한 시간,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어서 그 시간에 해야할 많은 것들을 미루게 된다. 이 덫은 마음이 공허할 때 더욱 강력하게 작동하는 듯하다. 

사진들이 보여주는 순간들을 떠올리다보면 평소에 잘 나타나지 않았던 감정들이 가슴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그 효과 가운데서도, 어떨 땐 창피해서 소름이 돋는 경우도 있지만, 공허했던 마음을 채워주고 나를 다독여주는게 역시나 가장 좋다. 그럴때면 할 일이 많더라도 추억에 덫에 걸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하다. 다만 사진이 보여주는 순간들은 평면적이고 피상적이라 한계가 있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동네를 20여 년만에 찾아갔을 때에는 더 많은 것들이 가능했다. 옛 집이 있었던 자리와 초등학교로 향하던 골목길과 분식집과 문방구 앞에 가만히 서 있으면 가로등 빛과 달콤한 달고나 냄새, 떡꼬치의 매콤한 맛,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와 운동장에서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의 유년시절이 되살아난다. 




2. "정전이 되면 집집마다 촛불을 켰다. 이는 사라진 유년생활에 대한 추억이자 애도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오래된 한옥집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잊은지 오래되었지만 그때만해도 아주 가끔씩 정전이되곤 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부엌에서 양초를 찾아 촛불을 켜기도 했다. 작가의 회고를 통해 내가 기억하는 정전과 촛불이 떠올랐다. 어둠속에서 촛불을 밝히는 상황은 무서우면서도 진지하고 따뜻해지는,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정전을 기다리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의 유년시절 재건은 빛과 그림자로부터 시작한다. 온 가족이 갓이 달린 전등 하나에 의지해 살던 시절, 어둠이 준 선물은 그림자 놀이와 숨바꼭질도 있었지만, '파이화즈'(정신을 잃게 만드는 약을 먹여 어린아이들을 납치하는 것) 이야기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점차 형광등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베이징 전체가 갑자기 밝아지고, 귀신들은 더이상 신비롭지 않게 되었지만, 걸핏하면 전기가 끊어졌다. 정전이 되면 집집마다 촛불을 켰고, 이는 사라진 유년생활에 대한 추억이자 애도였다.


아버지의 병세로 13년만에 베이징을 방문한 작가는 익숙했던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고,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은 그의 도시와 함게 사라졌다. 그 순간 글로써 자신의 베이징을 재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후퉁(베이징 주택가의 옛 골목길)의 등불과 그림자놀이, 겨울의 배추와 매연과 재 냄새, 우유 맛이 나는 흰토끼표 사탕과 입을 굳게 만들었던 고약한 냄새가 나는 취두부와 왕성한 식욕을 못이겨 먹어치웠던 인공조미료, 아침이면 들려온 수탉의 울음소리와 낮은 음조에 자신감이 깔려 있었던 폐품장수의 외침...작가는 감각적인 기억으로 그의 유년시절을 담담하게 재현하고 있다. 

 



3. "당신께서 저를 불러 아들이 되게 하셨기에 저는 당신을 따라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작가가 담담하게 재현해가는 기억들의 흐름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닿고 있다. 그와 아버지 사이는 여느 부자와 마찬가지로 좋지 않았고 단절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 책의 원제는 《성문이 열리다(城門開)》이다. 문은 닫힘과 열림, 곧 단절과 소통의 이중적인 기능이 있다. 작가는 이것을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과거의 베이징과 현재의 베이징 사이의 소통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도시에 시간이 거꾸로 흘러 고목이 봄을 맞고

사라진 냄새와 소리, 빛이 돌아오면

돌아갈 집이 없는 영혼들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모든 손님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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