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에서 도리사를 창건하고 고구려로 돌아가는 길에 백제땅 계룡산을 지나다가 상서로운 빛을 보고 갑사를 창건하였으니 이때가 구이신왕 원년(420)이었다고 한다. 아도화상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를 전한 스님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출생과 활동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삼국유사가 가장 포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도 아도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으며, 대표적으로 제3권 흥법 제3 '순도조려(順道肇麗)'조와 '아도기라(阿道基羅)'조 두 군데에 기록되어 있다.

 

 

 

 

 

     

 

 

 

 

 

 

 

 

 

 

 

 

 

 

 

 

 

 

 

 

2-1.

 

순도조려(順道肇麗)조에서는 '고구려본기'를 인용하며,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 부견이 승려 순도와 함께 불상과 불경을 보냈고, 이어 4년에는 승려 아도가 진나라(晉)에서 왔다고 한다. 이듬해 초문사를 창건하여 순도를 있게 하였고,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를 있게 하였다. 그런데 아도기라(阿道基羅)조의 경우는 다른 내용을 전한다. 심지어 상충하는 세 가지 다른 이야기를 함께 다루고 있다. 첫번째는 '신라본기'를 인용하면서 19대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일선군으로 와서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신라가 불교를 수용하기 전이라 굴을 파서 방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숨어 지냈던 사실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마침 당시 양나라에서 향을 보내왔는데 임금과 신하가 용법을 몰라 온나라에 두루 물어보자, 묵호자가 나서서 향을 알려주고 또 위독한 왕녀의 병을 향으로 낫게 해주었다고 한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아도기라'라는 제목 아래 묵호자의 이야기를 쓴 것을 보아 이 둘이 동일인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바로 다음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21대 비처왕(재위 479-500) 때 아도화상이 시종 세 명과 함께 와서 모례의 집에 머물렀으며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고 적고 있다. 비교적 간략한데, 아도가 병 없이 죽은 이후에도 그 세 사람이 남아서 불교를 전파했다는 이야기이다.

  

 

 

2-2.

 

세번째 이야기는 색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현존하지 않는 '아도본비(我道本碑)'의 주요 내용을 옮겨 소개하고 있는데, 정시(正始) 연간 조위(曹魏) 사람 아굴마(我堀)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구려인 고도녕과 정을 통하고 아도를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위는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위나라이고 정시는 위나라에서 240년부터 248년까지 사용했던 연호이다. 고도녕은 아도가 5세가 되던 해에 출가를 시켰고, 아도는 16세가 되던 해 위나라로 건너가 아굴마를 만난 후 현창화상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19세에 다시 고구려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아도가 신라땅에 들어간 때는 미추왕 2년(263)이었는데, 아도가 불법을 행하려 하였지만 아직 신라에서는 불교가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에 목숨의 위협까지 받아야 했다.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서 숨어 지내던 중, 미추왕 3년 성국공주가 위독하여 어떤 약이나 치료도 소용이 없자 아도가 나서 병을 치유하였다. 그러자 왕은 기뻐하며 아도의 소원대로 흥륜사 창건을 명하였다는 이야기이다.

  

 

 

3.

 

아도비에서 인용한 내용은 상세하고 명확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믿음이 가면서도 한편으론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고구려와 신라가 불교를 수용했던 시기가 3세기까지 올라가기 때문이다. 물론 안악3호분의 연꽃 벽화 등 공식적인 불교 수용 시점 보다 이른 시기에 불교가 전파 된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3세기까지 연대가 올라가는 이야기는 너무 이르다. 만약 조위를 북위로 바꾼다면 좀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될 수는 있다. 북위에서도 정시(504-508)를 연호로 사용한 바 있어 더욱 그럴듯하다. 한편 미추왕 때 흥륜사를 창건했다는 부분도 삼국사기에서 진흥왕 때 준공되었다는 기록에 비추어 잘못되었다고도 하는데, 아도가 처음 창건했던 절이 폐사되고 진흥왕에 이르러 같은 자리에 다시 절을 세웠으며, 이때 흥륜사로 명명된 사실이 소급하여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4.

 

무엇보다도 상충하는 기록들 사이에서 명확한 기준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승전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면, 소수림왕 시기에 순도와 아도가 고구려로 와서 고구려 불법(佛法)의 시작이 되었다는 기록이 가장 정확한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면 눌지왕 때 묵호자가 신라땅에 들어가 활동했다는 기록도 이어지는 사실로서 큰 무리가 없다. 일연도 소수림왕 시대와 눌지왕 시대가 서로 접해 있어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에 도착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묵호자는 아도의 다른 칭호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달마()를 가리켜 벽안호()라고' 부르는 경우와 같다는 것이다. 지금도 묵호자(墨胡子)를 말 그대로 '검은 서역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아도와의 관계는 어떻게 봐야할까. 비처왕 때 세 사람과 함께 신라로 온 아도화상은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동명이인이었음을 가정할 수 있다. 아도는 삼국유사의 '동경흥륜사금당십성( )'조에 첫번째로 이름을 올려놓은 성인이었다. 아마도 원래의 아도 이후에 포교활동을 위해 신라땅으로 들어온 승려들이 편의상 그 이름을 사용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신라인들의 눈에 '검은 서역인'의 외관이 비슷하게 보였던 결과일 수도 있겠다. 한편 '아도비(我道本碑)'에 등장하는 아도의 경우 '조위 정시'를 '북위 정시'로 고친다면 비처왕 때의 가정과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다만 출생에 관한 이야기 만큼은 원래 아도화상의 이야기와 혼합된게 아닐까.


 

 

5.

 

결론적으로 아굴마와 고도녕 사이에서 출생한 아도가 눌지왕 때 신라에서 활동을 하였고, 이후에 포교활동을 했던 승려들의 이야기와 뒤섞여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효종 6년에 조성된 '도리사아도화상사적비'에서는 뒤섞인 이야기들을 그럴듯하게 이어붙이고 있는데, 도입부만 살펴보면 진(晉) 목제(穆帝) 영화 12년(356) 사신으로 온 아굴마를 고도녕이 빈관에서 맞이한 이후 아도를 낳게 되었고, 아도는 간문제(簡文帝) 함안 임신년(372)에 사신단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간다. 꼼꼼히 들여다보면 오류가 많은 비문이지만, 어쨌든 여기에서도 아도가 고구려로 온 374년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


 

 

6.

 

계룡산 갑사를 창건했다는 아도에 관한 기록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궁금한 것은 왜 갑사의 창건기에 아도라는 이름이 등장하는가이다. 도리사를 창건하였다는 이야기는 그렇다쳐도, 고구려로 돌아가는 길에 계룡산을 거쳤다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미심쩍다. 남아 있는 기록상 아도가 고구려로 다시 돌아간 흔적도 찾기 어렵고, 또 '고구려로 돌아가는 길'로 보기도 어렵고...물론 고승들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는 일이야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아무래도 창건 연대를 끌어올리다보니 그런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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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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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4부작의 제2권《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정서가 두려움이었다면, 제3권《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를 관통하는 정서는 불안감이다. 결혼에 대한 불안감, 임신과 출산에 대한 불안감, 작가로서의 성공에 대한 불안감, 성에 대한 불안감,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이런 불안감은 자아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사유하는 레누에게 원동력이 된다."


불안과 두려움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두려움은 보다 원초적이고 근원적이며, 이것은 결코 부정적이거나 나약하고 비겁한 감정이 아니다. 두려움을 정확히 직시하고 반응했을 때 비로소 다양한 감정이 파생되어 나온다. 엘레나는 언제나 두려움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감정에 충실했다. 나이의 변화에 따라 그녀의 내적 사유는 깊어지고 외연은 확장된다.  20대 후반, 결혼과 출산 및 사회적 성공을 거치면서 그녀가 맞닥뜨린 두려움과 고뇌는 당시 정치적·사회적 환경과 더욱 밀착되었다. 반전운동이나 노동운동, 여성해방 같은 사회현상들 속에서 그녀는 갈등과 방황을 거쳐 어떤 결론에 다다른다. 이것은 릴라의 '경계의 해체' 만큼이나 정체성의 중요한 변화였다.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을 릴라와 일치시키려 했다. 릴라에게서 분리되려고 할 때마다 불구가 되는 것 같았다. 릴라가 없으면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릴라 없이는 내 생각에 확신이 생기지 않았고 어떠한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릴라와 분리된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다. 해답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던 엘레나가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과 의지에 따라 내린 결정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실비아의 아기가 사랑스러웠고 책임감을 느꼈을 때, 그 아이가 엘레나의 품에서 안정감을 느꼈을 때 빠져나갈 수 없는, 끊어낼 수 없는 인연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감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결정이 의지에 따른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회피에 불과했는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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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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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의 아르노강과 솔페리노 다리, 그리고 이스키아 섬은 소설에서 상징적인 공간이자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이다. 책 표지에 보이는 주인공 레누가 서 있는 다리가 바로 솔페리노 다리인데, 릴라로부터 몸과 마음을 지배당하는 듯한 느낌을 떨쳐내며 릴라의 공책이 든 상자를 강물 속으로 밀어내는 장면이다. 


"나는 솔페리노 다리에 멈춰 서서 차가운 안개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다 다리 난간에 상자를 올려놓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상자를 밀었다. 마침내 상자가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릴라의 말과 생각, 자신에게 상처를 준 주변의 모든 이에게 아픔을 되갚고야마는 독한 근성, 사람, 물건, 사건, 지식 할 것 없이 나를 포함해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능력을 담은 상자는 그 자체가 릴라인 양 강물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책과 구두, 달콤한 추억과 폭력으로 인한 상처, 결혼식과 신혼 첫날밤, 신혼여행 후 라파엘라 카라치 부인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난 모든 일과 함께"


1부에 이어 2부에서도 역시 둘 사이의 복잡·미묘한 감정은 이어지고 있다. 레누는 릴라를 질투하고 그리워하면서도 그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반면, 릴라는 레누의 성취를 부러워하면서도 진심으로 기뻐한다. 20대 초반의 이들 관계는 유년시절과 사춘기의 그것보다 더 격정적이었고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였다.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 내 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이스키아 섬은 릴라와 니노의 부적절한 관계와 첫사랑을 친구에게 빼앗긴 상실감으로 인한 또다른 관계가 발생하는 장소이다. 상실감으로 인한 그 관계는 두고두고 수치심으로 남을 기억이었다. 이미 1부에서도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던 장소였기에, 이 섬은 아름다운 경관과는 대비되는 공간이 되었다.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던 결혼과 신혼여행에서 강제로 범해지듯 보낸 첫날밤, 이어지는 가정폭력과 불륜, 임신과 가출, 이혼에 이르기까지...이들의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의 삶은 이렇게 눈살이 찌푸려질 법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가 단순히 막장 드라마와 같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여성문제와 폭력적인 사회, 물질만능주의 등 당시 사회상을 완연히 드러내는 한편 다양한 사람들의 보편적이면서 때로는 특수한 감정을 치밀하게 관찰하듯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두려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편적으로 보이고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이면서 이것을 극복하는 행위는 사람에 따라 다른 형태로 표출된다. 그런 사람들과 행위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감정은 증폭된다. 레누와 릴라, 두 소녀의 성장과정은 언제나 두려움과 밀착되어 있었다.  


"나는 평생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말을 잘못 할까봐, 너무 과장된 어조로 말할까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을까봐, 옹졸한 마음을 들킬까봐, 흥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까봐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것이다."


"평생 릴라는 '경계의 해체' 현상이 사물보다 사람에게 더 심각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허물어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두려워했다. 지난날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오빠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기운을 잃었고 스테파노가 약혼자에서 남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고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두려움을 벗어던질 때 기쁨과 즐거움, 행복 따위의 감정이 뒤따르고,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을 때 슬픔, 분노, 좌절 따위가 뒤따른다. 감정들의 뿌리이며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내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본인조차 이해하거나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는 작가의 힘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지점이다. 또 소설 속 인물들마다 어떤 형태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다른 행태로 표출되는지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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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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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아 문학 돌풍의 주역

 

움베르트 에코 외에는 이탈리아 문학을 접해본 바 없어서 이색적인 느낌이 드는데, 요즘 출판계에서는 프리모 레비의 소설 《릴리트》와 《지금이 아니면 언제?》라든지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에세이 《작은 우주들》과 《다뉴브》 등 다양한 이탈리아 문학이 출간되고 있다. 특히 한길사에서 창사 4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나폴리 4부작'은 작품 자체로서도 세계적 돌풍을 일으켰지만, 작가의 이력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점이 많다. 1992년 첫 작품인 《성가신 사랑》으로 데뷔한 이후 좋은 작품들을 잇따라 발표하면서도 얼굴과 신상을 전혀 공개하지 않았으며 '엘레나 페란테'라는 이름조차 필명이다. 그래서 작가의 정체에 대해 많은 추측들이 있어왔고, 심지어 언론의 '가면 벗기기'와 같은 행태도 있었던 모양이다. 일부 언론의 탐사보도는 많은 비판을 받았고, 미국의 작가 록산나 게이는 '그런 정보는 내 삶을 바꾸지도 못하고, 페렌테의 책을 더 탁월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도 남겼다고 한다. 필명과 주인공의 이름이 같아서일까. 글을 읽으면서 자전적 소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 탓에 작가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심리도 작용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은둔을 선택하고 필명으로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고, 작가의 정체를 아는 것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는 영국 소설가 조조 모예스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2. '흔적'

 

나폴리 4부작의 제1권은 노년이 된 주인공이자 화자인 '레누'가 60년 우정을 나눈 친구 '릴라'의 아들로부터 어머니가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릴라는 언제나 그렇듯이 극단적이었다. 단순히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옷가지는 물론 출생증명서까지 모든 흔적을 지운 채 사라져버렸다. 60년 인생을 통째로 지우려는 친구를 떠올리며, 주인공은 '이번엔 누가 이기는지 보자'라고 마음을 먹으며 반대로 그녀들의 이야기를 복원하듯 글을 써내려간다. 처음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극단적인 성향이 릴라를 이해할 수 없었고, 또 주인공은 왜 그토록 화가 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유년시절과 사춘기를 다룬 1부의 마지막장을 넘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보니 어렴풋이 통하는 느낌이 있었다.

 

3. 두 소녀의 성장기

 

60년의 우정 가운데 이 책은 1950년대 나폴리를 배경으로 이들이 함께 한 유년기와 사춘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레누는 어른들이 좋아할만한 조용하고 모범생 스타일인 반면, 친구 릴라는 두려움이 없고 거칠면서도 영특하고 남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스타일이다. 이 둘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의지하고, 질투하면서도 그리워하며 성장해간다. 레누에게 릴라는 홀로 여행 중 처음으로 평생 잊지 못할 풍요롭고 여유로운 감정을 느끼는 가운데 유일하게 그리워했던 대상이었고, 릴라에게 레누는 '눈부신 친구'였다. 화자가 레누이기 때문에 그녀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훨씬 많은 비중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첫 만남부터 레누는 릴라를 바라보며 동경하면서도 열등감을 느껴왔고, 릴라의 영향력에 잠식되어가는 자신을 항상 느낀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한 릴라의 바상함에 자극을 받아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뛰어난 학생이 되었지만, 막상 릴라는 선생님의 권유도 뿌리치고 가업인 구두제작에 몰두하다가 열여섯 나이에 결혼을 선택했고, 그 선택을 지켜보며 레누는 목표를 잃은 듯이 마구 흔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동경과 열등감으로 인해 릴라에게 기울어져 있던 무게중심이 어느 순간 다시 균형점을 찾게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너는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해. 남녀를 통틀어서 말이야."


화자인 레누가 바라본 동경의 대상 릴라만 보이다가, 이 지점에 이르러 비로소 릴라의 내심을 엿볼 수 있었던 순간이다. 무신경하고 무뚝뚝해 보였던 릴라는 경제적 문제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꿈을 '나의 눈부신 친구'가 이루어주길 바랐던 것이다.


남성 독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소녀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성과 가치체계의 형성·해체과정의 반복을 작가는 공감하기 쉽게끔 내면에서 이끌어내고 있다. 꾸밈이 없는, 솔직하고 담백한 독백의 느낌이라 더욱 끌린다. 외설적인 장면의 표현 마저도...


4. 전후 나폴리


이 소설은 단순히 두 소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유년기와 사춘기의 부제를 보면 당시 사회적·경제적 문제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알 수 있다. 전후 나폴리는 빈곤했고, 폭력이 만연했다. 여성으로서 꿈을 갖기에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시대에, 여자아이는 공부가 필요 없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배경의 도시는 두 소녀의 성장과 함께 역동적으로 변한다. 그 과정에서 고리대금업자인 '돈 아킬레의 이야기'와 '구두 이야기'는 두 소녀의 삶에 상징적인 의미와 깊은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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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여자의 향기
왕안이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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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하이와 베이징, 해파문학과 경파문학, 왕안이와 베이다오


상하이 대표적 작가왕안이의《상하이, 여자의 향기》는 베이다오의《베이징, 내 유년의 빛》과 짝을 이루어 나왔다. 해파문학과 경파문학의 특징과 차이가 바로 이런 것일까. 두 에세이 모두 일상이 녹아든 기억과 느낌들을 꺼내어 그들이 살아온 도시를 재구성하고 있지만, 두 도시 사람들의 기질과 사고방식, 문화적 유전자가 대조적인 만큼이나 이 에세이들도 표현방식이 상이하다. 양둥핑의 《중국의 두 얼굴》(2008)에서는 베이징과 상하이의 문화적 차이와 경파(京派)·해파(海派) 논쟁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문인 린위탕의 말을 빌려 상하이 사람들은 "타고난 상인이고 우수한 문인이지만 전장에서는 새가슴"이라 말하고, 베이징 사람들을 가리켜 "기개가 있는 자연의 사람들"이라 표현했으며, 베이징의 경극과 상하이의 호극, 궁정화풍과 자유로운 화풍, 문화대혁명이 가른 두 도시의 명암 등을 보여준다. 왕안이 또한 이 책에서 두 도시를 대비시키며 자연환경, 도시, 사람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바람의 계절이 돌아오면 베이징의 하늘은 거대한 바람이 호호탕탕 거친 기세로 행군하지만, 눈으로는 바람이 있는지 없는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투명하던 공기가 과립 형태로 변해 바스락거리기 시작하고 천지간에 울음소리가 가득하게 된다. 이 소리는 들리지 않는 곳이 없다. 반면 상하이의 바람은 훨씬 가늘고 귀엽다. 상하이의 바람은 아주 좁은 거리와 골목 구석구석을 뚫고 다니다가 손바닥만 한 공터에서 회오리를 일으켜 종잇조각이나 낙엽을 날려 이리저리 떠돌게 한다. 바람이 두 건물 사이를 비집고 지나갈 때면 가벼운 충격과 함께 비비고 튕기는 듯한 느낌이 든다."


"베이징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인의 기질이 있어 입을 열었다 하면 훌륭한 글이 된다. 그들은 역사학자의 기질도 있어 언어의 배후에 무수한 전고(典故)가 담겨 있다. ··· 그에 비하면 상하이 사람들은 몹시 거친 편이다. 상하이 사람들은 수십 년에 걸친 식민지 시대의 속성으로 신사와 숙녀의 규범을 배웠고, 아주 피상적인 것들을 일종의 학문으로 간주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과거의 역사가 많이 들어 있지 않다. 그저 20년 동안 번화했던 옛 꿈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꿈은 아무리 해도 다 꿀 수 없는 꿈이라도 지금도 상하이 사람들은 이 꿈에 취해 있다."


"베이징은 감성적이다. 베이징에서 어느 장소를 찾아가려면 지명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환경의 특징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 이에 비해 상하이의 택시 기사들은 개괄적으로 추리하는 능력이 있다. 그들은 지명만 가지고도 손님이 가고자 하는 곳까지 무사히 데려다준다."




2.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역사를 단 한 번도 더듬어보지 않는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상하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 말투, 성격부터 이곳의 음식, 주택, 거리의 풍경, 생활, 문학에 이르기까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에서 도시의 풍경과 역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베이다오의 '베이징'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한 가운데서 유년기를 겪으며 체험했던 에피소드들을 긴 호흡으로 재구성했다면, 왕안이의 '상하이'는 글로 풍경을 그리듯 가볍고 산뜻한 느낌으로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상하이의 현대성과 풀뿌리처럼 아직은 밑바탕에 남아 있는 전통의 교차점을 예리하게 파악하는 관찰력이 일품이다.


"···이처럼 기본이 없는 만큼 융합과 소통이 편리한 것이 상하이 음식의 특징이다. 그러다가 근대에 이르러 개방의 추세가 필연으로 굳어지다 보니 여러 지역의 음식과 조리법이 전부 상하이로 몰려들어 국제 카니발무대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무대 뒤로 가보면 집집마다 뒷골목을 향한 부엌 밖에 온갖 조리 기구를 내놓고 눈발을 맞으며 생선과 고기, 온갖 채소를 평범하지만 다양한 조미료와 양념을 넣어 볶고 굽고 튀기는 풍경이 펼져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도시, 상하이 풀뿌리들의 향기다."


"···이 도시에 사방 도처에 농민공들이 가득하고 공중에는 그들이 흘리는 땀 냄새와 시골 방언 억양이 떠다니고 있다. ··· 아무 거리낌도 없이 당당하면서도 왠지 모를 두려움에 젖어 있는 모습들이다. ㅡ고 작은 거리와 골목 담장 아래서 소변을 복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도 눈에 띈다. 이런 모습들은 이 도시가 갖고 있는 부르주아적 풍격을 거칠고 조악하게 바꿔놓는다."




3. 남자와 여자, 여자의 도시 


도시의 일상을 관찰하며 느낀 전통과 현대성을 다음 2부에서는 여성성과 여성으로서의 도시적 삶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왕안이는 여성성을 발견하고, 특히 여성들의 '자아의식'이 글과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말한다. 


"여성 작가들에게는 자아가 가장 중요한 창작 요소였고, 자신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었다. ··· 그래서 중국 여인들의 자아의식은 더욱 강렬해지고 남성들의 집단의식을 더욱더 강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하이라는 이 단단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곧고 강직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영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얼마간이라도 이 도시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도시의 여자들이 강인하게 자신들의 존재와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는 도시가 교체의 시절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역사를 차분히 더듬어 본 이후에 마지막으로 그 공간에서의 자신의 삶을 떠올려본다. 


"195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이 구간의 역사에 속해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정말로 만족스럽다. 먼저 이 시대는 내가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게 해주었고, 충실하게 나의 사상을 개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다음, 나를 아주 힘든 곤경으로 밀어 넣어 계속 학습하고 인식하며 실천하고 경험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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