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신라에서 도리사를 창건하고 고구려로 돌아가는 길에 백제땅 계룡산을 지나다가 상서로운 빛을 보고 갑사를 창건하였으니 이때가 구이신왕 원년(420)이었다고 한다. 아도화상은 고구려에서 신라로 불교를 전한 스님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출생과 활동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삼국유사가 가장 포괄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도 아도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으며, 대표적으로 제3권 흥법 제3 '순도조려(順道肇麗)'조와 '아도기라(阿道基羅)'조 두 군데에 기록되어 있다.


2-1.
순도조려(順道肇麗)조에서는 '고구려본기'를 인용하며,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 부견이 승려 순도와 함께 불상과 불경을 보냈고, 이어 4년에는 승려 아도가 진나라(晉)에서 왔다고 한다. 이듬해 초문사를 창건하여 순도를 있게 하였고,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를 있게 하였다. 그런데 아도기라(阿道基羅)조의 경우는 다른 내용을 전한다. 심지어 상충하는 세 가지 다른 이야기를 함께 다루고 있다. 첫번째는 '신라본기'를 인용하면서 19대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일선군으로 와서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서 지냈다고 한다. 신라가 불교를 수용하기 전이라 굴을 파서 방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숨어 지냈던 사실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마침 당시 양나라에서 향을 보내왔는데 임금과 신하가 용법을 몰라 온나라에 두루 물어보자, 묵호자가 나서서 향을 알려주고 또 위독한 왕녀의 병을 향으로 낫게 해주었다고 한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아도기라'라는 제목 아래 묵호자의 이야기를 쓴 것을 보아 이 둘이 동일인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바로 다음 두번째 이야기에서는 21대 비처왕(재위 479-500) 때 아도화상이 시종 세 명과 함께 와서 모례의 집에 머물렀으며 그의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고 적고 있다. 비교적 간략한데, 아도가 병 없이 죽은 이후에도 그 세 사람이 남아서 불교를 전파했다는 이야기이다.
2-2.
세번째 이야기는 색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현존하지 않는 '아도본비(我道本碑)'의 주요 내용을 옮겨 소개하고 있는데, 정시(正始) 연간 조위(曹魏) 사람 아굴마(我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고구려인 고도녕과 정을 통하고 아도를 낳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위는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위나라이고 정시는 위나라에서 240년부터 248년까지 사용했던 연호이다. 고도녕은 아도가 5세가 되던 해에 출가를 시켰고, 아도는 16세가 되던 해 위나라로 건너가 아굴마를 만난 후 현창화상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19세에 다시 고구려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아도가 신라땅에 들어간 때는 미추왕 2년(263)이었는데, 아도가 불법을 행하려 하였지만 아직 신라에서는 불교가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에 목숨의 위협까지 받아야 했다. 모례라는 사람의 집에서 숨어 지내던 중, 미추왕 3년 성국공주가 위독하여 어떤 약이나 치료도 소용이 없자 아도가 나서 병을 치유하였다. 그러자 왕은 기뻐하며 아도의 소원대로 흥륜사 창건을 명하였다는 이야기이다.
3.
아도비에서 인용한 내용은 상세하고 명확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믿음이 가면서도 한편으론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고구려와 신라가 불교를 수용했던 시기가 3세기까지 올라가기 때문이다. 물론 안악3호분의 연꽃 벽화 등 공식적인 불교 수용 시점 보다 이른 시기에 불교가 전파 된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3세기까지 연대가 올라가는 이야기는 너무 이르다. 만약 조위를 북위로 바꾼다면 좀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될 수는 있다. 북위에서도 정시(504-508)를 연호로 사용한 바 있어 더욱 그럴듯하다. 한편 미추왕 때 흥륜사를 창건했다는 부분도 삼국사기에서 진흥왕 때 준공되었다는 기록에 비추어 잘못되었다고도 하는데, 아도가 처음 창건했던 절이 폐사되고 진흥왕에 이르러 같은 자리에 다시 절을 세웠으며, 이때 흥륜사로 명명된 사실이 소급하여 기록되었다고 본다면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4.
무엇보다도 상충하는 기록들 사이에서 명확한 기준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승전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면, 소수림왕 시기에 순도와 아도가 고구려로 와서 고구려 불법(佛法)의 시작이 되었다는 기록이 가장 정확한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면 눌지왕 때 묵호자가 신라땅에 들어가 활동했다는 기록도 이어지는 사실로서 큰 무리가 없다. 일연도 소수림왕 시대와 눌지왕 시대가 서로 접해 있어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에 도착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묵호자는 아도의 다른 칭호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달마(達摩)를 가리켜 벽안호(碧眼胡)라고' 부르는 경우와 같다는 것이다. 지금도 묵호자(墨胡子)를 말 그대로 '검은 서역인'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아도와의 관계는 어떻게 봐야할까. 비처왕 때 세 사람과 함께 신라로 온 아도화상은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동명이인이었음을 가정할 수 있다. 아도는 삼국유사의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 )'조에 첫번째로 이름을 올려놓은 성인이었다. 아마도 원래의 아도 이후에 포교활동을 위해 신라땅으로 들어온 승려들이 편의상 그 이름을 사용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신라인들의 눈에 '검은 서역인'의 외관이 비슷하게 보였던 결과일 수도 있겠다. 한편 '아도비(我道本碑)'에 등장하는 아도의 경우 '조위 정시'를 '북위 정시'로 고친다면 비처왕 때의 가정과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다만 출생에 관한 이야기 만큼은 원래 아도화상의 이야기와 혼합된게 아닐까.
5.
결론적으로 아굴마와 고도녕 사이에서 출생한 아도가 눌지왕 때 신라에서 활동을 하였고, 이후에 포교활동을 했던 승려들의 이야기와 뒤섞여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효종 6년에 조성된 '도리사아도화상사적비'에서는 뒤섞인 이야기들을 그럴듯하게 이어붙이고 있는데, 도입부만 살펴보면 진(晉) 목제(穆帝) 영화 12년(356) 사신으로 온 아굴마를 고도녕이 빈관에서 맞이한 이후 아도를 낳게 되었고, 아도는 간문제(簡文帝) 함안 임신년(372)에 사신단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간다. 꼼꼼히 들여다보면 오류가 많은 비문이지만, 어쨌든 여기에서도 아도가 고구려로 온 374년을 기준으로 이야기를 꾸미고 있다.
6.
계룡산 갑사를 창건했다는 아도에 관한 기록을 찾다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궁금한 것은 왜 갑사의 창건기에 아도라는 이름이 등장하는가이다. 도리사를 창건하였다는 이야기는 그렇다쳐도, 고구려로 돌아가는 길에 계룡산을 거쳤다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미심쩍다. 남아 있는 기록상 아도가 고구려로 다시 돌아간 흔적도 찾기 어렵고, 또 '고구려로 돌아가는 길'로 보기도 어렵고...물론 고승들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는 일이야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아무래도 창건 연대를 끌어올리다보니 그런것 같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