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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ㅣ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피사의 아르노강과 솔페리노 다리, 그리고 이스키아 섬은 소설에서 상징적인 공간이자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이다. 책 표지에 보이는 주인공 레누가 서 있는 다리가 바로 솔페리노 다리인데, 릴라로부터 몸과 마음을 지배당하는 듯한 느낌을 떨쳐내며 릴라의 공책이 든 상자를 강물 속으로 밀어내는 장면이다.
"나는 솔페리노 다리에 멈춰 서서 차가운 안개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다 다리 난간에 상자를 올려놓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상자를 밀었다. 마침내 상자가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릴라의 말과 생각, 자신에게 상처를 준 주변의 모든 이에게 아픔을 되갚고야마는 독한 근성, 사람, 물건, 사건, 지식 할 것 없이 나를 포함해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을 장악하는 능력을 담은 상자는 그 자체가 릴라인 양 강물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책과 구두, 달콤한 추억과 폭력으로 인한 상처, 결혼식과 신혼 첫날밤, 신혼여행 후 라파엘라 카라치 부인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일어난 모든 일과 함께"
1부에 이어 2부에서도 역시 둘 사이의 복잡·미묘한 감정은 이어지고 있다. 레누는 릴라를 질투하고 그리워하면서도 그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반면, 릴라는 레누의 성취를 부러워하면서도 진심으로 기뻐한다. 20대 초반의 이들 관계는 유년시절과 사춘기의 그것보다 더 격정적이었고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였다.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 내 삶에 투영된다.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 내 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이스키아 섬은 릴라와 니노의 부적절한 관계와 첫사랑을 친구에게 빼앗긴 상실감으로 인한 또다른 관계가 발생하는 장소이다. 상실감으로 인한 그 관계는 두고두고 수치심으로 남을 기억이었다. 이미 1부에서도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던 장소였기에, 이 섬은 아름다운 경관과는 대비되는 공간이 되었다.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던 결혼과 신혼여행에서 강제로 범해지듯 보낸 첫날밤, 이어지는 가정폭력과 불륜, 임신과 가출, 이혼에 이르기까지...이들의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의 삶은 이렇게 눈살이 찌푸려질 법한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가 단순히 막장 드라마와 같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여성문제와 폭력적인 사회, 물질만능주의 등 당시 사회상을 완연히 드러내는 한편 다양한 사람들의 보편적이면서 때로는 특수한 감정을 치밀하게 관찰하듯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두려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편적으로 보이고 있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이면서 이것을 극복하는 행위는 사람에 따라 다른 형태로 표출된다. 그런 사람들과 행위들이 관계를 맺으면서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고 감정은 증폭된다. 레누와 릴라, 두 소녀의 성장과정은 언제나 두려움과 밀착되어 있었다.
"나는 평생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말을 잘못 할까봐, 너무 과장된 어조로 말할까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을까봐, 옹졸한 마음을 들킬까봐, 흥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까봐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것이다."
"평생 릴라는 '경계의 해체' 현상이 사물보다 사람에게 더 심각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허물어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두려워했다. 지난날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오빠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기운을 잃었고 스테파노가 약혼자에서 남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고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두려움을 벗어던질 때 기쁨과 즐거움, 행복 따위의 감정이 뒤따르고,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을 때 슬픔, 분노, 좌절 따위가 뒤따른다. 감정들의 뿌리이며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내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본인조차 이해하거나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는 작가의 힘이 대단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지점이다. 또 소설 속 인물들마다 어떤 형태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다른 행태로 표출되는지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