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 - 유교도시 한양의 행사 공간
김동욱 지음 / 집(도서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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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동욱 선생님 글은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 동아시아 속 우리 건축 이야기≫(2015)를 통해 처음 접했다. 그동안 나름대로 전통 건축물을 보면서 가졌던 의문을 해소할 수 있어서 호감과 신뢰를 가지고 저자의 다른 책들도 찾아보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나온 ≪한국건축의 역사≫(2013)를 읽어 볼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가운데, 최근 서울의 다섯 궁궐을 다룬 이 책을 발견하였다.

정확히는 ‘다섯 궁궐’ 보다는 ‘그 앞길’을 살펴봄으로써 궁궐과 도시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의 지향점이다. 궁궐 그 자체는 이미 많은 책에서 다루어져 왔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2017), 홍순민 선생님의 ≪우리 궁궐 이야기≫(1999)와 ≪홍순민의 한양읽기≫(2017), ≪우리 궁궐을 아는 사전≫(2015) 등 몇 권의 책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밖에 독자 수준의 높낮이에 따라 적합한 다양한 책들이 있고, 때로는 소재와 시각을 조금씩 달리 하기도 한다. 반면 궁궐 밖 앞길이라는 외부공간으로 시야를 돌린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색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궁궐을 다루어 온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울타리 내부 세계에 치중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궁궐은 정문과 그 앞으로 열린 가로에서 벌어진 일들을 포괄함으로써 궁궐이 자리 잡은 도시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한다. 궁궐 정문 앞 가로는 궁궐의 연장선일 뿐 아니라 궁궐과 도시를 연결하는 고리와 같은 부분이다. 궁궐 앞 가로의 형태나 가로에서 벌어진 일들을 살피는 것은 궁궐 자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궁궐과 도시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된다.”

공간에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물질은 또 다른 물질의 운명을 좌우한다. 궁궐의 지형과 건물의  좌향(坐向)은 문의 위치와 방향을 정하고, 문의 위치와 방향은 길의 활용에 영향을 미친다. 경복궁의 광화문 앞길과 창덕궁의 돈화문 앞길, 창경궁의 흥화문 앞길이 보여주는 차이점은 위 세 가지 요인에서 말미암는다. 경희궁과 경운궁 또한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의 내부구조는 지형과 건물의 좌향, 문, 그리고 길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우리 궁궐에 황성을 두지 않은 결과 한양 공간 구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궁성 외곽을 둘러싸는 황성은 수문제 이후 중국의 모든 궁궐에서 나타나며 고려 궁궐 또한 황성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에서 종묘와 사직단은 황성 안에 두어 황제가 종묘나 사직단에 제례를 지내러 가는 모습이 일반 백성들에게 노출되지 않았고, 나라 최고위 관청들도 황성 안에 배치되어 일반인들의 주거지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반면 한양에서는 종묘나 사직단이 민간 주거지 안에 있으면서 제례가 있을 때 국왕의 움직임이 드러났다. 관청들도 주거지와 분리되지 않았다. 이런 차이점은 한양 공간 구성을 색다른 곳으로 만드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다섯 궁궐의 앞길에서 이루어졌던 각종 행사와 의례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것은 결채(結綵), 채붕(彩棚)과 산대(山臺)였다. 결채란 경사스런 날, 문 앞이나 건물 위, 누각 위 등에 붉은 색 비단을 엮어서 양끝을 기둥이나 처마에서 늘어뜨리고 곳곳에 꽃 모양으로 장식하는 것을 말하고, 채붕은 나무로 짠 거대한 단을 가리키며, 단 위에는 산 모양의 층단을 만들어 각종 장식물이나 인형을 올리고 기생이나 광대들이 잡희를 곁들이는 놀이를 한다. 그리고 산대는 채붕과 종종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용례를 보면 채붕은 산처럼 높은 대를 포함한 전체 시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는 반면, 산대는 산처럼 꾸민 시설물만을 따로 지칭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성호사설≫에 기록된 채붕을 보면, 지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 중기 이후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대단한 규모의 행사였다. 고려시대 권력가 최이(최우)가 연회를 베풀 때 채붕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으며 신라시대의 행사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점차 규모가 축소되다가 생략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경제적 사정에 기인하는 바도 있지만, 돈화문 앞길이 결채나 채붕을 행하기에 협소하다는 점이 언급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경복궁의 궁성과 정문인 광화문에서 이어지는 육조거리는 이와 같은 행사를 하기에 충분한 공간을 갖추고 있는 반면, 본래 별궁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창덕궁이나 창경궁 앞길은 매우 협소했던 것이다. 경희궁과 경운궁의 앞길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점은 다르지 않다.

정조 14년(1790)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온 서호수가 왕에게 중국 만수잘 결채가 공장히 화려했음을 아뢰자, 정조는 "나라를 다스리는 요채는 절검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수만 자금을 허비하여 오직 하루 볼거리를 만들었으니 경계해야 할 것이지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앞서 1733년 영조가 사치품 제작을 금지하면서 금사제작 기술의 명맥이 끊기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많은 풍습과 기술을 잃어버린 원인이 오로지 경제적인 사정에만 있을까. 공간은 물질의 연장(延長)을 제약한다. 인간의 정신도 여기에 포함된다. 협소한 공간이 절검 정신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 도성과 궁궐의 입지조건을 선정하는 데 신중을 기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영조 때 명맥이 끊긴 금사제작 기술은 2015년에 와서 복원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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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부엌 -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
류지현 지음 / 낮은산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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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내자"


    처음 읽는 책의 부제와 저자의 프로젝트에서 왠지 기시감이 드는 이유는 철학자 강신주의 글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일전에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라는 제목의 한 칼럼을 게재하여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문언과 달리 깊이 헤아릴만한 속뜻을 품고 있다고 보기에는 그의 주장과 표현은 지극히 직접적이고 단정적이었다. 그렇다면 마치 냉장고를 없애고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만한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어떤 메세지를 담고 있을까.


    토마토는 냉장고에 보관하면 안 되는 대표적인 채소이다. 냉장고에 있는 동안 토마토는 영양소가 파괴되고 그 맛도 잃는다. 또한 토마토는 단단한 겉껍질이 없는 까닭에 되도록 서로 닿지 않게 보관하는 게 좋다. 토마토에서 나오는 에틸렌 가스가 잘 빠져나가도록 해 준다면 좀 더 오랫동안 맛있게 보관할 수 있다. (p86)

    에틸렌 가스는 일반적으로 채소나 과일의 성장을 촉진하는 물질이다. 키위나 아보카도가 덜 익어 딱딱할 때 종이봉투 안에 사과 하나와 함께 넣고 잘 봉해 좋으면 빠르면 하룻밤 혹은 며칠 만에 부드럽게 익은 과일을 먹을 수 있다. 반면에 특이하게도 감자는 통풍이 잘 되는 공간에서 에틸렌 가스에 적당히 노출되면 노화가 지연된다. 물론 감자를 보관할 때 에틸렌 가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빛을 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빛이 차단되고 통풍이 잘 되는 주머니에 감자와 사과를 담아 부엌의 그늘진 곳에 두고 쓰면 추워서 퍽퍽하게 변해 버린 감자는 먹지 않을 수 있다. 아예 싱크대 서랍 한 칸을 감자와 사과를 보관하는 용도로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p328-330)

    감자, 생강, 당근 등 뿌리채소는 모래에서 보관할 수 있다. 유럽의 옛 농가에서는 작물을 보관하기 위해 모래를 이용해왔다고 하는데, 모래 속에서 수분 유지가 적절히 되어 무르지도 마르지도 않으며 편히 지낼 수 있다. (p331-334)

    식탁 위에는 초록색 호박, 보랏빛 가지, 빨갛고 노란 파프리카 등을 알록달록 예쁘게 담아 꽃에 뿌리듯 분무기로 물을 뿌려 주거나 물이 담긴 그릇 위에 망을 포개 놓고 올려놓는 방법도 있다. 수분 함량이 높은 채소들이라 수분을 지켜주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다. (p335)

    한쪽 용기에 버터를 채우고 조금 더 큰 다른 용기에 뒤집어 넣는다. 그리고 남은 공간에 물을 채우면 물이 버터와 산소의 접촉을 차단해 산화를 방지한다. 사나흘에 한 번씩 깨끗한 찬물로 갈아주면 한 달 쯤은 원할 때마다 부드러운 버터를 먹을 수 있다. (p341)

 

 

 

바나나는 상온에서 보관하며 서늘한 곳에 매달아 놓으면 좋다는 것쯤은 이젠 보편화된 상식이다. 이와 같이 저자가 궁극적으로 전달하려는 메세지는 '냉장고를 없애자'와 같은 반문명적인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인 식재료의 본성을 이해하며 각각의 식재료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 맞는 보관하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냉장고 문을 열면 식재료들이 있다'는 사실에 멈추어 있는 우리의 앎과 관심을 일으켜, 각각의 식재료마다 성격이 다르고 보관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보고 또 냉장고 중심으로 형성된 부엌의 리듬을 식재료의 특성과 가족의 식습관을 고려한 자신만의 리듬으로 전환시키자는 것이다.

    한편 이 책은 세계민속자료로서의 가치와 가능성도 담고 있다. 아직은 한정된 지역에 그치고 있으나, 저자가 직접 세계 각지를 탐방하고 그 지역 사람들과 교류하며 사라져가는 삶의 지혜, 식재료 관리법과 보관방법 등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지어진 파리 아파트에는 부엌 창문 아래로 '가르드 망제(garde manger)'라는 찬장이 함께 설계되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간단한 식재료를 보관하던 이 공간은 보통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통풍이 잘 되도록 공기구멍도 넉넉했다. 외부와 내부 공기의 온도 차에 의해 더 차가운 공기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원리이다. (p34-36)

    이탈리아 토리노 사람들은 눈을 모아 식재료를 보관하곤 했다. 길과 같은 높이로 나 있는 창 아래로 떨어뜨린 눈을 잘 쌓아 두면 얼음처럼 단단해진다. 이 얼음이 날씨가 더워질 그때 지하 저장고 온도를 낮춰주는 데 한몫을 한다.​ (p37-44)

    일본 니가타 현의 눈 저장고들은 보통 강과 산비탈이 만나는 곳에 만들어졌다. 경사진 면이 있어 눈을 쉽게 모을 수 있고 녹은 눈은 자연스레 강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또한 강을 통해 얼음을 간편하게 운송할 수 있었다.​ (p45-47)

    인도에서 지금도 물병으로 사용하는 테라코타(terra cotta)는 유약 없이 낮은 온도로 구워 표면에 구멍이 많다. 바깥 공기가 따뜻할수록 표면을 통한 물의 증발이 잘 일어나 단지 안 온도가 더 많이 떨어진다.​ (p-48-50)

    퐁텐블로와 센 강 사이의 작은 마을 토메리 마을은 식탁용 포도로 유명하다. 농부들의 창고에는 작은 유리병들이 줄을 맞춰 빼곡히 차 있고 각각의 물이 담긴 유리병에는 포도 한 송이씩 담겨 있다. 꽃병에 꽃을 꽂듯이 유리병에 포도송이를 꽂아 관상용으로도 좋고 냉장고에 보관할 때와 달리 단맛을 유지할 수 있다. 농부들은 마지막으로 유리병 물속에 숯 한 조각을 꼭 넣는다고 한다. (p109-110)

    남미 티티카카 호수에 있는 아만타니 섬에서는 감자를 냉장고 없이​ 2,3년간 거뜬히 보관한다. 감자들을 얼음이 얼 정도의 차가운 냇물에 넣어 두고 하룻밤을 보내면 감자가 언다. 언 감자를 살짝살짝 밟아주면 감자에 남은 물기가 빠지고, 다시 밟은 감자를 냇물에 넣고 얼리고 밟아주는 과정을 일주일 반복한다. 이렇게 가볍고 오래가는 감자, '툰타(tunta)'가 완성된다. (p152-153)

 

 

저자가 실행해오고 있는 프로젝트와 그 취지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해내자" 프로젝트는 사라져가는 음식 저장 지식에 디자인이라는 형태를 입히는 것으로 출발했다. 냉장고에 꼭 보관하지 않아도 괜찮은 식재료들, 혹은 보관하면 안 되는 식재료들을 알리고, 그 식재료를 보관하는 방법을 냉장고가 없던 시절을 살았던 이들에게 배워서 알리고자 한 것이다.

    다만 책이 담고 있는 메세지의 방향성은 좀 더 분명하게 정하는게 좋지 않을까.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젓갈들은 다양한 기술로 과거의 그 맛을 되살렸을지도 모른다. (중략) 엄마와 젓갈 아주머니가 나누던 수다와 정은 결코 담아낼 수 없다."와 같은 표현이 많아진다면 자칫 본래 의도를 왜곡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염려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지역에서의 사라질 위험에 놓인 식문화를 조사하고 기록으로 남기며, 현실적인 감각에 맞는 디자인을 선보인다면 이 책의 가치는 한층 뚜렷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또한 음식물쓰레기로 인한 환경문제를 개선하고 미래의 지속 가능한 식문화를 형성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저자의 프로젝트는 TED Talk에 초대 받았으며, 독일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발렌틴 투른의 음식물 쓰레기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Taste the Waste, 2011>에 소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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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은 학문이 될 수 있을까?

 

시중에 수많은 서평집과 서평 쓰기를 소개한 책들이 나와 있지만, 서평을 학문의 차원에서 소개한 책은 기억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평소 읽지 않던 종류의 책이지만, 올해 초에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이 책을 접하면서 같은 기회에 비교적 최근에 나온 또 다른 서평에 관한 책, 북바이북에서 나온 《서평 글쓰기 특강》(2015)과 유유에서 나온 《서평 쓰는 법》(2016)도 차례로 읽어보았다.

 

단순한 글쓰기 방법론만으로 학문의 지위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학문은 일정한 지식체계를 구축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서평을 학문의 지위로 고양시키기 위해 그 논의의 대상을 넓히려는 저자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書評은 문자 그대로는 책을 평가하는 하나의 형식이기 때문에 '책'과 그것과 인접한 제문제를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래서 책과 출판의 재개념화를 논의하는 것도, 저작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독서력 증진 방안을 논의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책의 전반적인 구성을 살펴보면 서평학이라는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기 보다는, 일정한 체계를 이루고 있는 여러 덩이들, 즉 독립적인 출판론과 독서론을 서평론 앞에 붙여 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저자의 논문 몇 개를 앞뒤에 붙여 놓은 탓에 하나의 체계로 융합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반적인 내용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아쉬운 가운데, 다만 책과 출판의 재개념화를 논의한 글과 중간중간 소개한 일부 평론가의 글들은 읽어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서평 쓰기 책들은 대체적으로 서평의 개념 정의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공통적으로 독후감과 서평을 구분하고, 서평과 비평을 구분하며, 다시 서평 안에서 글쓰기 특징에 따라 그 종류를 몇 갈래로 나누고 있다. 우선 독후감과의 비교에서, 《서평 쓰는 법》은 정서적 반응과 논리적 반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위 세 권의 책 모두 독후감과 달리 서평은 나와 글 외부에 제3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는 점과 제3자와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대체로 합치하는 듯하다. 이것을 '독자에 닿는 글쓰기'라든지 일방적·관계적 혹은 주관적·객관적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글의 갈래는 무지개 색을 구분하듯 그 경계의 이쪽저쪽을 확정짓기 곤란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특히 경계지점에 인접할수록, 외부의 제3자를 상정하고 글쓰기에 임한다면 같은 글을 두 번 써봐도 방향은 분명 달라질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서평과 비평 구분에 있어서는, 《서평 글쓰기 특강》의 저자는 단계적 글쓰기 정도의 차이로 바라보는 반면, 《서평 쓰는 법》의 저자(이원석)은 양자를 좀 더 체계적으로 구분한다. 객관적 서평쓰기의 대표적인 작가로서 위의 두 책 모두 다치바나 다카시와 로쟈 이현우의 글들을 예시로 소개하는데, 뒤의 책(이원석)은 로쟈의 서평/비평 구분론을 소개하면서 그와 다른 자신의 구분론을 소개한다. 즉 로쟈는 서평과 비평을 독립적 갈래의 글로 보는 반면, 이원석은 마치 경수필/중수필의 구분과 같이 광의의 서평 안에서 비평(중서평)과 협의의 서평(경서평)으로 나눈다고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처음의 책 《서평의 이론과 실제》에서는 서평의 종류를 서술적 서평, 비판적 서평 및 해설적 서평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와 같은 구분들은 종국적으로 비평 비중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서평의 글쓰기에서 과도한 비평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양자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비평을 서평에서 접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누군가 두 책을 읽어본다면 《서평 글쓰기 특강》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도움을 받을 만하고, 《서평 쓰는 법》은 영감을 얻을 만하다고 소개할 수 있을 듯하다. 아울러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작가와 평론가의 글들을 우연히 얻어간다는 점이 이 책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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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예술사 - 한국문화 이천년을 이끈 예술후원자들
송지원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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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2015년 여름 '발원(發願), 간절한 바람을 담다'라는 전시를 기획했었는데, 이 전시에서는 불교미술작품 그 자체 보다는 불교미술의 후원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종교적 측면에서 본다면 불상을 만들거나 불화를 그리는 행위, 경전을 간행하는 행위 등은 신앙행위에 해당하지만, 불교미술 측면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행위들은 예술후원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발원(發願)을 하고 그들은 무엇을 발원하였으며 또 그것이 어떤 작품으로 표현되었는지, 단순히 작품을 보여주고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배후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후원자들과 후원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었던 전시였다.

2. 지난 전시를 언급하는 까닭은 이 책 역시도 우리 예술문화의 후원자에 초점을 두어 '우리 역사 속의 메세나인'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메세나'는 총체적 예술 지원활동을 일컫는 말인데, 시인과 예술가를 지원해 로마 예술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로마 귀족 마에케나스(Maecenas)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가 지원했던 시인 가운데에는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는 시구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남긴 후라티우스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이후에도 서양에서의 메세나 활동은 끊임없이 이어져, 예술 후원사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인정받는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은 문화사에서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특정 인물이나 조직, 기관이 후원활동을 했다는 명백한 사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고, 특히 고대로 갈수록 그 흔적은 매우 희미하다. 

3.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한 음악가 우륵, 석장사·영묘사·사천왕사 등의 불상과 신장상, 전불 등을 만든 조각가였던 승려 양지, 황룡사의 노송도와 분황사의 관음보살, 단속사의 유마상을 그린 화공 솔거, 설화처럼 전해내려온 처용을 소재로 한 처용무 등은 신라왕실이 예술, 예술가를 후원했던 사례로 언급되었는데, 희미한 흔적속에서 찾아낸 이 사례들은 어쩌면 순수한 예술후원행위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흥왕이 우륵을 발탁하지 않았다면 우륵과 가야금은 대가야의 운명과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듯이, 강력한 정치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그 희미한 흔적들마저 역사서에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시대는 어떠한가. 무인시대 최씨 정권 시기에는 고려문화의 정수로 남은 팔만대장경이 완성되고 가장 세련된 청자를 만들어냈다. 최충헌이 등용한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등을 남겼고, 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문인화가들은 작품활동을 통해 중국에까지 명성을 알리기도 했다. 또한 최충헌과 최이는 불교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불교 외호자로 자처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최고 권력가의 지원행위는 점차 다른 권력층과 관료들, 그리고 사회 전반의 참여 및 후원으로 이어졌다. 이전의 무인정권 집권자들과 달리 최충헌은 예술문화 감각이 있었던 듯하고, 그의 아들 최이는 글씨로 유명한 문인이기도 했다. 비록 문인 우대 정책에는 권력 기반을 견고하게 다지기 위한 정책적 목적이 반영되어 있지만, 몽골의 침입과 비정상적인 독재정권 시기에 고려문화는 오히려 발전을 이루었다. '예술은 배고프다'라는 통념과 달리 역사적 맥락에서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후원이 바탕이 될 때 최고의 예술문화가 만개했던 사실이 바로 후원의 역사이다.

4. 조선시대 후원의 역사는 고려시대 최씨 정권의 그것과 상당부분 유사하다. 바로 조선 최고의 벌열 안동 김문의 이야기이다. '세도정치'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최씨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고, 문화적 역할과 역량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점에서도 양자는 비슷하다. 정조 시대의 대표적 학자 이덕무가 '안동 김시 집안의 문헌이 청음 김상헌 이래 150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甲갑이었다'고 평가한 점이나 문화정치를 표방한 정조가 자신이 사돈으로 맺을 조선 최고 가문으로 안동 김문을 꼽은 사실을 보면 그들의 문화적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인조대의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 숙종대의 김수증과 김수항 형제,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형제, 김상헌의 자손 김조순에 이르기까지 누대에 걸쳐 형성된 안동 김문의 정치적·문화적 위상은 조선 최고 명가임을 공인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들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교류했던 정선과 같은 조선의 대표적인 예술가들,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곡운구곡도첩 작품들 이야기는 조선의 문화사 그 자체와 같다.


5. 그러나 조선시대 후원의 역사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인물은 심용(1711-1788)이라는 사람이다. 경상도 합천 군수를 지낸 그는 풍채가 뛰어났고 비할데 없이 호탕했던 인물인 듯하다. 재력과 풍류를 두루 갖추었던 그는 조선 후기 서울에서 뛰어난 음악 실력을 지닌 사람들의 후원자 역할을 자청하며 살았다. 그의 집 후원에는 언제라도 연주자들이 모여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심용 스스로 음악인들이 연습하는 자리에 어울려 비평가 역할도 했다. 심용은 자신이 후원하는 음악인들에게 폭넓은 활동을 기회를 마련해주고자 초대받지 않은 평안 감사의 회갑연에 몰래 참석하는데, 이 이야기는 마치 오늘날의 플래시몹 같은 멋스러움과 감동이 있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음악으로 자신들을 세상에 알렸고 다른 지역의 음악인과도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정조12년(1788) 심용이 생을 마감하자 그의 후원을 받았던 음악인들은 장례를 치루고, "우리는 평생 심공의 풍류 가운데 사람들이었고, 심공은 우리의 지기이며 지음이었다. 이제 노랫소리 그치고 거문고 줄은 끊어졌도다.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이렇게 읊고는 마음을 다해 한바탕 노래와 거문고 연주를 한 뒤 돌아갔다고 한다. 심용과 음악인들 사이에는 어떤 목적이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 오직 음악만이 그들의 동력이었다. 감동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후원의 역할과 그 지속성을 깊이 생각할 부분이다. 문화의 어느 분야이든 단순히 전문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예술가들의 활동은 후원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았을 때 위축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실을 잘 알았던 사람이 신재효(1812-1884)였다. 그는 《춘향가》《심청가》《적벽가》 등 여섯 바탕의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한 판소리 교육자이자 음악 후원자였다. 당시 남성들이 주도했던 판소리 세계에 여성이 진입해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는데, 그의 후원으로 배출된 여성 명창은  고창지역에서만 80여 명에 달했다. 심용과 신재효, 서상수(1735-1793)와 같은 인물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메세나 활동의 시초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사회의 바람직한 메세나 활동의 이상을 엿볼 수 있겠다.


6. 근대로 넘어오면 우리나라에서의 메세나 활동은 다른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일본 제국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해외로 무단 반출되는 문화재들을 수호하는 활동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문화재 수호의 중심에는 5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상인집단인 개성상인이 있었다. 이들이 처음부터 문화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고 1920년대까지는 재산의 사회 환원이라는 메세나 활동에 대한 관심이 미미했다. 그러나 고려시대 수도이자 고려 문화의 중심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일본인에 의해 자행된 광범위하고 무차별적 도굴 및 약탈 현실, 그리고 개성 삼인방이라 불렸던 최순우, 진홍섭, 황수영이라는 걸출한 미술사학자와 이들을 이끌었던 한국 미술사학의 선구자 고유섭의 영향으로 1930년대부터 메세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대표적인 개성상인이 바로 이홍근, 이회림, 윤장섭이다. 이들이 문화재를 수집해왔던 일화들과 사회에 환원했던 과정들을 보면 범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호방하고 관심과 애정이 깊었다. 그 결과 인천의 송암미술관과 현재 신림 및 신사동에 위치한 호림박물관이 탄생했다. 아직 송암미술관은 방문해보지 못했고 호림박물관은 신림본관과 신사분관 모두 수차례 다녀봤다. 특히 호림박물관은 간송호암과 함께 3대 사립으로 꼽히고 있으며 한 신문은 '간송 전형필을 아는 사람이라면 호림 윤장섭을 알아야 한다'고 썼다. 지금도 대를 이어 지속적으로 예술문화지원활동을 하고 있으니 문화시민으로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호림박물관에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모범적인 사립박물관 운영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박물관(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조성되었고 운영되고 있는지, 국립 뿐만 아니라 사립 박물관(미술관)을 두루 다룬 《박물관 보는 법》을 읽어볼 만하다.


7. 그밖에 탁월한 심미안으로 우리 문화의 정수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문화대국을 꿈꾸었던 호암 이병철, 우리나라에 메세나를 뿌리 내린 '큰별' 박성용에 관한 이야기가 독립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송과 호암의 명성은 이 책이 아니더라도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고, 간송과 호암 미술관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다. 간송은 2014년 이후 DDP에서 6회에 걸쳐 간송문화전을 개최해왔고, 올해도 4월부터 간송문화전 시즌2가 열리고 있다. 아무튼 간송과 호암 두 인물이 수집한 문화재는 워낙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품들이기 때문에 그 작품들에 담긴 가치와 일화들만 살펴보더라도 우리 예술문화사 일면의 대강을  훑어보는 것과 같다. 한편 금호아시아니의 박성용 명예회장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듯한데, 이제껏 다루었던 인물들과 일화들 가운데서도 가장 감명 깊었던 마지막 장이다. 재단 설립이나 악단 창설, 다양한 음악회 기획, 인적·물적 지원 등의 메세나 활동에 아낌 없는 찬사를 보낼 만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했던 그의 언행들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많은 일화 가운데서도 피아니스트 손열음과의 사연, 열한 살 초등학생 소녀와의 이메일 펜팔에 그의 면모가 담겨 있다. 기업 경영 상황이 어려운 가운데 '순수 문화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꼭 필요하기에 아낌없는 지원이 필요하다', '어려서부터 순수 예술을 접하면서 자라야 어른이 되어서도 창의적이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대답을 통해 평소 지론을 읽을 수 있다. 언론에서는 '한국의 메디치'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이 책에서는 '메세나를 뿌리내린 큰 별'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그와 같은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8. 이 책은 신라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략 30여 명의 메세나인을 다루고 있다.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자국의 메세나 역사를 정리한 책을 발간한 것은 처음이라고 하는데, 이전과 다른 차원에서 예술사를 바라볼 수 있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이 책이 한국메세나협회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되었다고 하는데, 앞으로 50주년, 100주년을 기념하여 재발간 되었을 때 책의 두께가 몇 배 두터워져 있기를 바란다. 그만큼 지속적이고 활발한 메세나 활동이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담았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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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조선시대를 다룬 책으로 무려 1천여 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 정리된 이성무 선생님의 조선왕조사》와 민음사에서 기획한 '민음 한국사(조선편)' 세트를 소장하고 있다. 전자는 정치사를 밀도 있게 다루었고, 후자는 정치 뿐만 아니라 다방면의 분야를 함께 다루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개설서나 통사는 필요 없었다.

 

 

 

 

 

 

 

 

 

 

 

 

 

 

 

 

 


 

 

 

 

 

 

 

 

 

 

 

 

 

 

 

 

 

그런데 한국역사연구회에서 집필을 하고 푸른역사 출판사에서 나온 또다른 시대사 시리즈가 있다고 해서 내심 궁금하던 차에 구입하게 됐다. 기획 의도와 구성 방식은 민음 한국사 시리즈와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민음 한국사 시리즈도 현재는 조선편만 나와 있지만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근현대사까지 장기적으로 다루는 기획물로 알고 있다. 푸른역사에서 나온 이 시대사 시리즈도 고대에서 근현대까지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고(다만 순서대로 나오진 않는 듯하다), 현재는 한국고대사, 조선시대사, 한국근대사 각각 2권씩 출판된 상태이다.

 

 

 조선시대사만 놓고 비교를 하자면 양적으로는 민음 한국사가 풍부하다. 민음의 경우엔 15세기부터 한 권에 한 세기씩 다루어 전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푸른역사의 경우엔 '국가와 세계'편과 '인간과 사회'편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쪽 모두 전문적인 집필진으로 구성되어 있고, 심지어 겹치는 인원도 있어서 질적으로는 큰 차이는 없다고 보인다. 다만 질적으로 같다면 아무래도 양적으로 갑절 이상이 차이나는 민음이 좋은 내용을 더 많이 다루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푸른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조선의 모든 시기와 분야를 전반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핵심 주제를 선정하여 그 주제에 있어서는 좀 더 깊이 다루도록 노력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사 제1권과 제2권에서는 각 8개씩, 전체 16개의 소주제를 다루고 있다. 모두 겹칠듯 하면서도 저마다 개성이 있어서 읽어볼만하다.

 

 

 

 

 

 

 

 

 

시각적인 효과에 힘을 준 민음사 시리즈.

 

18세기까지는 소장을 하고 있는데 아직 19세기을 구입하지 못했다.


 

 

방대한 분량의 정치사.

 

시대별로 이런 통사 한 권 구비해두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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