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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예술사 - 한국문화 이천년을 이끈 예술후원자들
송지원 외 지음 / 글항아리 / 2014년 11월
평점 :
1.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2015년 여름 '발원(發願), 간절한 바람을 담다'라는 전시를 기획했었는데, 이 전시에서는 불교미술작품 그 자체 보다는 불교미술의 후원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종교적 측면에서 본다면 불상을 만들거나 불화를 그리는 행위, 경전을 간행하는 행위 등은 신앙행위에 해당하지만, 불교미술 측면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행위들은 예술후원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발원(發願)을 하고 그들은 무엇을 발원하였으며 또 그것이 어떤 작품으로 표현되었는지, 단순히 작품을 보여주고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배후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후원자들과 후원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가 있었던 전시였다.
2. 지난 전시를 언급하는 까닭은 이 책 역시도 우리 예술문화의 후원자에 초점을 두어 '우리 역사 속의 메세나인'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메세나'는 총체적 예술 지원활동을 일컫는 말인데, 시인과 예술가를 지원해 로마 예술의 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로마 귀족 마에케나스(Maecenas)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가 지원했던 시인 가운데에는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는 시구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남긴 후라티우스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이후에도 서양에서의 메세나 활동은 끊임없이 이어져, 예술 후원사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인정받는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은 문화사에서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특정 인물이나 조직, 기관이 후원활동을 했다는 명백한 사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고, 특히 고대로 갈수록 그 흔적은 매우 희미하다.
3.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한 음악가 우륵, 석장사·영묘사·사천왕사 등의 불상과 신장상, 전불 등을 만든 조각가였던 승려 양지, 황룡사의 노송도와 분황사의 관음보살, 단속사의 유마상을 그린 화공 솔거, 설화처럼 전해내려온 처용을 소재로 한 처용무 등은 신라왕실이 예술, 예술가를 후원했던 사례로 언급되었는데, 희미한 흔적속에서 찾아낸 이 사례들은 어쩌면 순수한 예술후원행위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진흥왕이 우륵을 발탁하지 않았다면 우륵과 가야금은 대가야의 운명과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듯이, 강력한 정치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그 희미한 흔적들마저 역사서에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시대는 어떠한가. 무인시대 최씨 정권 시기에는 고려문화의 정수로 남은 팔만대장경이 완성되고 가장 세련된 청자를 만들어냈다. 최충헌이 등용한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등을 남겼고, 정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문인화가들은 작품활동을 통해 중국에까지 명성을 알리기도 했다. 또한 최충헌과 최이는 불교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불교 외호자로 자처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최고 권력가의 지원행위는 점차 다른 권력층과 관료들, 그리고 사회 전반의 참여 및 후원으로 이어졌다. 이전의 무인정권 집권자들과 달리 최충헌은 예술문화 감각이 있었던 듯하고, 그의 아들 최이는 글씨로 유명한 문인이기도 했다. 비록 문인 우대 정책에는 권력 기반을 견고하게 다지기 위한 정책적 목적이 반영되어 있지만, 몽골의 침입과 비정상적인 독재정권 시기에 고려문화는 오히려 발전을 이루었다. '예술은 배고프다'라는 통념과 달리 역사적 맥락에서는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후원이 바탕이 될 때 최고의 예술문화가 만개했던 사실이 바로 후원의 역사이다.
4. 조선시대 후원의 역사는 고려시대 최씨 정권의 그것과 상당부분 유사하다. 바로 조선 최고의 벌열 안동 김문의 이야기이다. '세도정치'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최씨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고, 문화적 역할과 역량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점에서도 양자는 비슷하다. 정조 시대의 대표적 학자 이덕무가 '안동 김시 집안의 문헌이 청음 김상헌 이래 150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甲갑이었다'고 평가한 점이나 문화정치를 표방한 정조가 자신이 사돈으로 맺을 조선 최고 가문으로 안동 김문을 꼽은 사실을 보면 그들의 문화적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인조대의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 숙종대의 김수증과 김수항 형제,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형제, 김상헌의 자손 김조순에 이르기까지 누대에 걸쳐 형성된 안동 김문의 정치적·문화적 위상은 조선 최고 명가임을 공인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들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교류했던 정선과 같은 조선의 대표적인 예술가들,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곡운구곡도첩 작품들 이야기는 조선의 문화사 그 자체와 같다.
5. 그러나 조선시대 후원의 역사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인물은 심용(1711-1788)이라는 사람이다. 경상도 합천 군수를 지낸 그는 풍채가 뛰어났고 비할데 없이 호탕했던 인물인 듯하다. 재력과 풍류를 두루 갖추었던 그는 조선 후기 서울에서 뛰어난 음악 실력을 지닌 사람들의 후원자 역할을 자청하며 살았다. 그의 집 후원에는 언제라도 연주자들이 모여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심용 스스로 음악인들이 연습하는 자리에 어울려 비평가 역할도 했다. 심용은 자신이 후원하는 음악인들에게 폭넓은 활동을 기회를 마련해주고자 초대받지 않은 평안 감사의 회갑연에 몰래 참석하는데, 이 이야기는 마치 오늘날의 플래시몹 같은 멋스러움과 감동이 있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음악으로 자신들을 세상에 알렸고 다른 지역의 음악인과도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정조12년(1788) 심용이 생을 마감하자 그의 후원을 받았던 음악인들은 장례를 치루고, "우리는 평생 심공의 풍류 가운데 사람들이었고, 심공은 우리의 지기이며 지음이었다. 이제 노랫소리 그치고 거문고 줄은 끊어졌도다.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이렇게 읊고는 마음을 다해 한바탕 노래와 거문고 연주를 한 뒤 돌아갔다고 한다. 심용과 음악인들 사이에는 어떤 목적이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 오직 음악만이 그들의 동력이었다. 감동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후원의 역할과 그 지속성을 깊이 생각할 부분이다. 문화의 어느 분야이든 단순히 전문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예술가들의 활동은 후원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았을 때 위축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실을 잘 알았던 사람이 신재효(1812-1884)였다. 그는 《춘향가》《심청가》《적벽가》 등 여섯 바탕의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한 판소리 교육자이자 음악 후원자였다. 당시 남성들이 주도했던 판소리 세계에 여성이 진입해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는데, 그의 후원으로 배출된 여성 명창은 고창지역에서만 80여 명에 달했다. 심용과 신재효, 서상수(1735-1793)와 같은 인물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메세나 활동의 시초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사회의 바람직한 메세나 활동의 이상을 엿볼 수 있겠다.
6. 근대로 넘어오면 우리나라에서의 메세나 활동은 다른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일본 제국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이리저리 흩어지고 해외로 무단 반출되는 문화재들을 수호하는 활동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문화재 수호의 중심에는 5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상인집단인 개성상인이 있었다. 이들이 처음부터 문화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고 1920년대까지는 재산의 사회 환원이라는 메세나 활동에 대한 관심이 미미했다. 그러나 고려시대 수도이자 고려 문화의 중심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일본인에 의해 자행된 광범위하고 무차별적 도굴 및 약탈 현실, 그리고 개성 삼인방이라 불렸던 최순우, 진홍섭, 황수영이라는 걸출한 미술사학자와 이들을 이끌었던 한국 미술사학의 선구자 고유섭의 영향으로 1930년대부터 메세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대표적인 개성상인이 바로 이홍근, 이회림, 윤장섭이다. 이들이 문화재를 수집해왔던 일화들과 사회에 환원했던 과정들을 보면 범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호방하고 관심과 애정이 깊었다. 그 결과 인천의 송암미술관과 현재 신림 및 신사동에 위치한 호림박물관이 탄생했다. 아직 송암미술관은 방문해보지 못했고 호림박물관은 신림본관과 신사분관 모두 수차례 다녀봤다. 특히 호림박물관은 간송호암과 함께 3대 사립으로 꼽히고 있으며 한 신문은 '간송 전형필을 아는 사람이라면 호림 윤장섭을 알아야 한다'고 썼다. 지금도 대를 이어 지속적으로 예술문화지원활동을 하고 있으니 문화시민으로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호림박물관에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모범적인 사립박물관 운영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박물관(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조성되었고 운영되고 있는지, 국립 뿐만 아니라 사립 박물관(미술관)을 두루 다룬 《박물관 보는 법》을 읽어볼 만하다.
7. 그밖에 탁월한 심미안으로 우리 문화의 정수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문화대국을 꿈꾸었던 호암 이병철, 우리나라에 메세나를 뿌리 내린 '큰별' 박성용에 관한 이야기가 독립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송과 호암의 명성은 이 책이 아니더라도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고, 간송과 호암 미술관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다. 간송은 2014년 이후 DDP에서 6회에 걸쳐 간송문화전을 개최해왔고, 올해도 4월부터 간송문화전 시즌2가 열리고 있다. 아무튼 간송과 호암 두 인물이 수집한 문화재는 워낙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품들이기 때문에 그 작품들에 담긴 가치와 일화들만 살펴보더라도 우리 예술문화사 일면의 대강을 훑어보는 것과 같다. 한편 금호아시아니의 박성용 명예회장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듯한데, 이제껏 다루었던 인물들과 일화들 가운데서도 가장 감명 깊었던 마지막 장이다. 재단 설립이나 악단 창설, 다양한 음악회 기획, 인적·물적 지원 등의 메세나 활동에 아낌 없는 찬사를 보낼 만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을 사랑했던 그의 언행들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많은 일화 가운데서도 피아니스트 손열음과의 사연, 열한 살 초등학생 소녀와의 이메일 펜팔에 그의 면모가 담겨 있다. 기업 경영 상황이 어려운 가운데 '순수 문화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꼭 필요하기에 아낌없는 지원이 필요하다', '어려서부터 순수 예술을 접하면서 자라야 어른이 되어서도 창의적이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대답을 통해 평소 지론을 읽을 수 있다. 언론에서는 '한국의 메디치'라는 표현을 많이 쓰고, 이 책에서는 '메세나를 뿌리내린 큰 별'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그와 같은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8. 이 책은 신라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략 30여 명의 메세나인을 다루고 있다. 적어도 아시아권에서는 자국의 메세나 역사를 정리한 책을 발간한 것은 처음이라고 하는데, 이전과 다른 차원에서 예술사를 바라볼 수 있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이 책이 한국메세나협회 창립 2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되었다고 하는데, 앞으로 50주년, 100주년을 기념하여 재발간 되었을 때 책의 두께가 몇 배 두터워져 있기를 바란다. 그만큼 지속적이고 활발한 메세나 활동이 이루어져왔다는 사실을 담았을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