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 - 유교도시 한양의 행사 공간
김동욱 지음 / 집(도서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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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동욱 선생님 글은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 동아시아 속 우리 건축 이야기≫(2015)를 통해 처음 접했다. 그동안 나름대로 전통 건축물을 보면서 가졌던 의문을 해소할 수 있어서 호감과 신뢰를 가지고 저자의 다른 책들도 찾아보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나온 ≪한국건축의 역사≫(2013)를 읽어 볼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가운데, 최근 서울의 다섯 궁궐을 다룬 이 책을 발견하였다.

정확히는 ‘다섯 궁궐’ 보다는 ‘그 앞길’을 살펴봄으로써 궁궐과 도시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이 책의 지향점이다. 궁궐 그 자체는 이미 많은 책에서 다루어져 왔다. 대중적으로 유명한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서울편>(2017), 홍순민 선생님의 ≪우리 궁궐 이야기≫(1999)와 ≪홍순민의 한양읽기≫(2017), ≪우리 궁궐을 아는 사전≫(2015) 등 몇 권의 책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밖에 독자 수준의 높낮이에 따라 적합한 다양한 책들이 있고, 때로는 소재와 시각을 조금씩 달리 하기도 한다. 반면 궁궐 밖 앞길이라는 외부공간으로 시야를 돌린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색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궁궐을 다루어 온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장으로 둘러싸인 울타리 내부 세계에 치중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궁궐은 정문과 그 앞으로 열린 가로에서 벌어진 일들을 포괄함으로써 궁궐이 자리 잡은 도시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한다. 궁궐 정문 앞 가로는 궁궐의 연장선일 뿐 아니라 궁궐과 도시를 연결하는 고리와 같은 부분이다. 궁궐 앞 가로의 형태나 가로에서 벌어진 일들을 살피는 것은 궁궐 자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궁궐과 도시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된다.”

공간에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물질은 또 다른 물질의 운명을 좌우한다. 궁궐의 지형과 건물의  좌향(坐向)은 문의 위치와 방향을 정하고, 문의 위치와 방향은 길의 활용에 영향을 미친다. 경복궁의 광화문 앞길과 창덕궁의 돈화문 앞길, 창경궁의 흥화문 앞길이 보여주는 차이점은 위 세 가지 요인에서 말미암는다. 경희궁과 경운궁 또한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의 내부구조는 지형과 건물의 좌향, 문, 그리고 길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우리 궁궐에 황성을 두지 않은 결과 한양 공간 구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궁성 외곽을 둘러싸는 황성은 수문제 이후 중국의 모든 궁궐에서 나타나며 고려 궁궐 또한 황성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에서 종묘와 사직단은 황성 안에 두어 황제가 종묘나 사직단에 제례를 지내러 가는 모습이 일반 백성들에게 노출되지 않았고, 나라 최고위 관청들도 황성 안에 배치되어 일반인들의 주거지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반면 한양에서는 종묘나 사직단이 민간 주거지 안에 있으면서 제례가 있을 때 국왕의 움직임이 드러났다. 관청들도 주거지와 분리되지 않았다. 이런 차이점은 한양 공간 구성을 색다른 곳으로 만드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다섯 궁궐의 앞길에서 이루어졌던 각종 행사와 의례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것은 결채(結綵), 채붕(彩棚)과 산대(山臺)였다. 결채란 경사스런 날, 문 앞이나 건물 위, 누각 위 등에 붉은 색 비단을 엮어서 양끝을 기둥이나 처마에서 늘어뜨리고 곳곳에 꽃 모양으로 장식하는 것을 말하고, 채붕은 나무로 짠 거대한 단을 가리키며, 단 위에는 산 모양의 층단을 만들어 각종 장식물이나 인형을 올리고 기생이나 광대들이 잡희를 곁들이는 놀이를 한다. 그리고 산대는 채붕과 종종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용례를 보면 채붕은 산처럼 높은 대를 포함한 전체 시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는 반면, 산대는 산처럼 꾸민 시설물만을 따로 지칭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성호사설≫에 기록된 채붕을 보면, 지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 중기 이후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대단한 규모의 행사였다. 고려시대 권력가 최이(최우)가 연회를 베풀 때 채붕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으며 신라시대의 행사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점차 규모가 축소되다가 생략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경제적 사정에 기인하는 바도 있지만, 돈화문 앞길이 결채나 채붕을 행하기에 협소하다는 점이 언급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경복궁의 궁성과 정문인 광화문에서 이어지는 육조거리는 이와 같은 행사를 하기에 충분한 공간을 갖추고 있는 반면, 본래 별궁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창덕궁이나 창경궁 앞길은 매우 협소했던 것이다. 경희궁과 경운궁의 앞길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점은 다르지 않다.

정조 14년(1790) 진하사로 북경에 다녀온 서호수가 왕에게 중국 만수잘 결채가 공장히 화려했음을 아뢰자, 정조는 "나라를 다스리는 요채는 절검 두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 수만 자금을 허비하여 오직 하루 볼거리를 만들었으니 경계해야 할 것이지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앞서 1733년 영조가 사치품 제작을 금지하면서 금사제작 기술의 명맥이 끊기기도 했다. 17세기 이후 많은 풍습과 기술을 잃어버린 원인이 오로지 경제적인 사정에만 있을까. 공간은 물질의 연장(延長)을 제약한다. 인간의 정신도 여기에 포함된다. 협소한 공간이 절검 정신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 도성과 궁궐의 입지조건을 선정하는 데 신중을 기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영조 때 명맥이 끊긴 금사제작 기술은 2015년에 와서 복원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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