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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인간에 대하여 -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9월
평점 :
믿는 인간에
대하여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
저: 한동일
출판사: 흐름출판 출판일: 2021년 9월30일
한동일 신부가 쓴 ‘라틴어 수업’을 읽었던 것이 2017년이니 참으로 시간이 빨리도 지난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읽었던 그의 에세이가 기억에 남아서, 이번에
출간한 ‘믿는 인간에 대하여’도 펼쳐 들었다. 믿음에 대한 책이라. 생각해보면 종교와 정치에 대해서는 대화의 주제로
하지 말라는 오래 전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다툼만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사실 종교,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민감하다. 신의 존재에 대한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평행선, 유신론자 사이에서의 종교적 갈등.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어떤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어떠한 양보도 없기 때문이다. 국교도 없고,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이 곳에서도 이런 상황인데 중동에서는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는 실제로는 그렇게 엄격한 무신론자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일종의 ‘범신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자신이 자본주의적 속성에 너무 물들어 있기 때문일까? 사찰이든 교회에 가든 나는 현세기복적 태도를 보인다. 말하자면, 사찰에 가서 절하고 교회에 가서 기도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내게는 종교는 어쩌면 운을 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타로카드로
운세를 보는 그 정도일까?
사실 이러한 무례한 태도는 종교가 일치감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시대가 지났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도, 의학도, 정치도… 종교에서 분리되어 버렸다.
주변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더욱더 적어지는 것 같다. 세속주의는 성공한 것인가? 그러나 종교적 극단주의의 형태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슬람에서
행해지는 일부 극단주의자의 테러를 보면 알 수 있고, 탈레반에 넘어간 아프가니스탄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조리한 상황을 접할 때마다, 당연하게
질문한다. 신은 왜 이런 부조리한 상황을 용인하는가? 우리가
상상하고 만들어낸 의인화된 신은 실제와 달라서일까? 신은 관조하되 관여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신에게서 믿음에서 어떤 것을 찾아야 될 것인가? 단순히
현세의 문제는 인간이 만든 문제이고, 그래서 우리 자신이 그 해답을 스스로 찾아야 되는 것일까?
오늘날 종교가 외면받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배타적 집단의 원천이 되기 때문은
아닐까? 신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보다는 이들은 스스로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믿음이라는 핑계로 우리와 나를 나눈다. 자신만이 정의를 독점했다는
오만함을 내보인다. 적어도 현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원래 예수가 이야기했던 가르침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신앙에 신실한 회사 후배가 생각났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함으로써 믿음을 충만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일종의 압박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코로나 시기로 교회를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스스로 물었다고 한다. 교회에 나가서 예식에 충실한 것이 전부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고, 그것이 자신의 내면에 깊게 침잠된다면
내밀하게 된다면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었다.
아마도 앞으로 종교가 가야 되는 방향의 일부를 조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