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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
류근 지음 / 해냄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시집도, 산문집(에세이)도 사실은
태어나서 읽어 본 적이 별로 없다.
시인이라고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시인들이나 류시화까지만 알고 있다.
그래서 사실 류근 시인은
처음 알게 되었다. 소개 글을 보면
가장 인상에 남는 게 바로 이건데
대학 재학 중에 쓴 노랫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김광석에 의해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내 윗세대라면 한 번쯤은
노래방 가서 감수성 어린 목소리로
불러봤을 그 노래, 이별 후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며 애절하게 듣는 노래가
류근이라는 시인의 글이었다니.
류근 시인은 등단 후 18년간 공식적인
작품을 발표하지 않다가 2010년에 첫 시집인
<상처적 체질>, 2016년에 두 번째 시집
<어떻게든 이별>을 출간했다고 한다.
그리고 5월 말 해냄 출판사에서
바로 이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
이란 산문집이 출간된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참 기억에 남는
소개이기도 하다. 노래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산문집까지 읽게 되다니 말이다.
산문집에 이렇게 목차를
소개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이 책은

희망을 기다리는 그대에게,
팍팍한 일상을 견디는 그대에게,
지난날을 돌아보는 그대에게,
오늘도 휘청거리는 그대에게,
여리고 상처받은 그대에게란
부제목으로 크게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또 최근에야 에세이를
읽어보긴 했지만 처음에는 어색했다.
뭔가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류근 시인님은 글 속에 시바 라든가
조낸이라든가 지즈배 이런 표현을
자주 쓰는데 처음엔 그것도 어색했다가
글을 읽다 보니 동화되어 점점 정겨워졌다.
읽다 보니 슬슬 느껴진다.
이 사람 마치 '시바' 라든가 '조낸'을
내공을 숨기는 장비로 쓰는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말이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엄청 센데 겉으로는 티 내지 않는,
무협지로 따지자면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 같은, 이분이 딱 그런 분이었다.
순간순간의 글에서 숨길 수 없는
아련함과 그리움이 묻어나는데
그러다 또 어느 부분에선 한량처럼
쓰기도 하고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글을 읽다 보면 마음이 웃다가 울다가
를 반복하고 웃긴데 슬프고, 슬픈데 웃기다.
가난에 대한 이야기,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음 한구석
그리움이라는 것이 마중 나와서 나도 어쩔 줄
모르겠다. 글 속에 해학과 풍자를 숨겨놓기도
하고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쓰기도 한다.
아마 내 말이 무슨 말인지는
올려 둔 사진 속 글귀만 봐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책 속 내용 중에 '일요일의 서촌 투어'라는
제목의 산문이 있다. 애인이 힘들게 번
돈으로 저녁 한 끼 먹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느 곳은 또 너무 비싸서 헤매다 스위스
베른식 레스토랑으로 갔는데 조낸 검열이
삼엄하고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서
정말 많이 웃었다) 처음 고아원에 간 남매처럼
가서 앉았다가 메뉴판을 보고 도저히
안되겠기에 그냥 나와서 삼선짬뽕을
먹으러 갔다는 이야기.
고아원에 간 남매처럼 앉았다는 표현이
너무나 적절하고 와닿아서 이 사람은 정말
표현력이 좋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전까지 시라고 하면 내가 모르는
의미를 주저리주저리 써놓고 깊은
고뇌에 빠진냥 뜻깊은 것처럼 써놓은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사고가 얼마나
편협한지 새삼 깨달았다. 산문이나 에세이도
마찬가지 그저 쉽게 쓴다고 생각했다.
간단하게 내 감정을 써두고, 생각을 써둔다고
생각했다. 대충 그럴듯한 말로 이런 말 저런
말 쓰는 거라는 생각도 이제는 접었다.
지난번에 읽은 <당신은 우는 것 같다>라는
에세이에서도 많이 느꼈지만
이 책 역시 한자 한자마다 의미가 있고,
그리움이 있다. 가짜 글이 아닌 (이걸 내가
감히 어떻게 판단하겠냐마는) 진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가 보다. 새삼 존경스럽다.
처음에 어색하게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읽기 시작했던 이 책은 어느새 내 마음에
와닿기도 하고 가끔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기도 했지만 한 사람의 그리움을,
사랑을, 가난을, 겨울을 그리고 우리에게
통용되는 이야기들을 읽게 된 것
같아서 읽는 내내 재밌었다.
작가님의 농담과 진담 어느 중간에서
공감을, 위로를 받고 싶다면
그리고 쿨하게 조낸 시바하고 싶다면
류근 시인님의 글을 추천해 본다.
자존심과 자존감 p30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 타인에게 삶의
높이를 재면 자존심이 되고, 자기 가치에
삶의 높이를 맞추면 자존감이 된다.
낮은 자리 p38
슬퍼 말자. 언제나 가장 깊고, 가장 넓고,
가장 힘센 것들은 모두 다 낮은 자리에 산다.
더 늦기 전에 p77
사람은 자기 삶 아닌 것에 발목을 적실 때
비로소 한꺼번에 '폭삭' 늙는 법이다.
그러니 더 늙기 전에 자기 삶이 무엇인지도
한번 되물어볼 일이다. 그것이 먼저 규명되지
않으면 결국 남의 삶을 살다가
그냥 '허투루' 스러지게 되는 법이니까.
틈 p114
자기의 틈으로 소통하기보다 남의 틈만을
노려 거기를 비집고 들어가 뭔가를 해치워야
하는 삶은 가련하다. 그러한 진지함이
세상을 이 모양 이 꼴로 '안녕들 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안 죽었다 p269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았는데
한 번도 안 죽었다.
앞으로도 그래야지.
진짜 솔직하게 자주 꺼내보진 않겠지만
가끔씩 추운 겨울날, 혹은 마음이 시린 날
내 마음 위로 차원에서 한 번씩 읽어보고 싶다.
바빠서, 힘들어서, 아파서, 화가 나서,
짜증 나서 죽을 것 같았는데
나도 한 번도 안 죽었다.
앞으로도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