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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만 있어줘
조창인 지음 / 밝은세상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사는 일은 복잡해도 죽는 일만은 간단한 줄 알았다. 사는 일은 고통과 절망의 연속이지만 죽는 일만큼은
소슬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가벼운 줄 알았다. 틀렸다. 간단하고 가벼운 죽음은 없었다."
가시고기, 등대지기, 길, 아내 등 마음을 깊숙히 적시는 작품들로 우리를 만나온 조창인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
나이 스물에 실의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지만 겨우 목숨을 건진 해나. 말기 암으로 시한부 생을 선고받은 은재(유명 베스트셀러 작가 이은우),
혈연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20년 동안 지내온 아버지와 딸이 죽음을 앞에 두고 만나 절망을 딛고 한 걸음씩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소설로 생은 때로 좌절을 안기지만 끝까지 살아낼 가치가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부모도, 자신을 돌봐주던 할머니도 모두 잃고 자살을 하려고 했던 중학교 3학년 이은재.
나도 너와 같다며... 그러니까 살아가자고 이야기해준 소녀 한인희..
그렇게 만난 둘은 함께 살아가려고 발버둥쳤고 자라났고, 고등학교에도 함께 진학했다.
아무것도 없이 누구도 없이 혼자서 살아남아야 했던 생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고..
고등학생이 되어 같은 문예반에서 기호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어째서였을까.. 은재와 인희와 기호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인희의 희생으로 대학생이 되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은재는 이제서야 인희에게 그 모든 세월을 보상해주고 싶었고
둘은 결혼을 약속했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인희는 얼굴에 회복불가능한 심각한 흉터를 남기게 된다.
그것이 미안해서, 인희를 수술해 주기 위해 원치 않는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해야했던 은재.
은재가 감옥에서 나왔을 땐 이미 인희도 기호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다시 둘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있다.
그리고 기호가 사고로 죽고, 인희마저 죽고 은재는 이제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이용하여 그들의 딸인 해나에게 그 빚을 갚으려 한다.
기호가 죽기 전, 그리고 인희와의 이야기를 통해 은재는 해나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책속에서..>
p.7
누구에게 보내지? 휴대전화에 저장된 연락처를 훑어본다. 문자메시지를 곱씹으며 읽어줄만한 사람은, 없다. 유감이다.
이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이런 인생을 살아버렸다.
p.8
두려움은 떨쳐내는 것이 아니다. 부딪히고 겪고 다시 부딪혀 익숙해져야 하는 법. 성공했다, 어느 순간부터 높이에 무감각해졌다.
그런데 어쩌자고 도무지 닿지 못할 만큼 끔찍하게 느껴질까. 이제 와서.
살아 있는 게, 살아서 하루를 견디는 게 더 무섭잖아. 나에게 필요한 건 깨끗한 최후일 뿐이야.
깨. 끗. 한. 최. 후.
p.9
죽음은 마침표일까? 쉼표, 혹은 느낌표일까? 아니면 영원한 물음표?
p.12
내가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게 아니다. 세상이 나를 튕겨내고 있을 뿐이다. 난 버림받은 거야. 그러니까 죽을 자격이 충분해.
p.29
저 사람에게는 뭔가 뻥, 구멍이 뚫려 있다. 좀처럼 메울 수 없기에, 메우길 포기한 채 평생 구멍을 지니고 살아왔다.
p.33
추억이란 어제의 희망을 오늘의 눈으로 꾸며낸 속임수다. 어제의 희망은 어제로 끝이 났을 뿐이다.
어제의 희망으로 오늘을 괴롭히는 건, 눈먼 자에게 꽃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하는 짓이다. 향기는 별로지만 빛깔만큼은 굉장히 아름답네요.
p.56
세상에서 잊히길 원했다.
틀렸다. 원하지 않더라도 기억해 줄 사람은 이미 사라졌다. 세상과 연결된 끈은 무참하게 끊어졌다. 완벽한 외톨이였다.
가만히 있어도 스르르 녹아 없어질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서글픈 자각처럼 다가왔다.
p.75
"너에게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고 싶어. 너도 나에게 그래 줘. 그때, 그날 깜깜했던 밤길처럼 휘파람을 불어줘. 날 위해 계속 불어줘."
p.89
희망도 계획도 없이 맞이하는 시간들을 견디기 힘들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조차 사치처럼 여겨지는 하루하루가 두렵고 끔찍했다.
패배자였고, 궁지에 몰린 생쥐 꼴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삶이라면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정직하게 말해,
억지로 산다고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고나 할까. 죽은 게 낫다고 봤다.
p.131
세상이 살 만하다고 여기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스스로 바보가 되어 세상에 속아 넘어가거나, 용의주도하게 세상을 속이는 것,
그 외에는 세상의 끝자락이든 중심이든 삶은 고단할 뿐이다. 질질 끌려 다니다 속절없이 안녕하게 된다.
p.190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 사느냐 역시 그 못지 않다. 인생은 산모퉁이를 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퉁이를 돌아봐야 거기가 사막인지, 초원인지 알 수 있다. 여러 모퉁이를 돌아봐야 해. 그래야 어떤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말할 수 있는거다."
p.305
"안다. 잘 알고 있다. 나도 그랬다. 세상을 미워하는 일에 지친 다음부터는 줄곧 내 자신을 미워해 왔다."
"그런데 왜 죽지 못했죠?"
"언젠가 내 자신에 대한 미움도 끝나리라, 믿었으니까"
p.
382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아직도 외롭다. 아직도 힘들고, 아직도 두렵다. 아직도 해나의 내부 어딘가에 깃든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내곤 한다.
그러나 해나는 알고 있다 그때마다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그때마다 어디를 바라봐야 하고,
그때마다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넘어질 때마다 해나를 다시 일으키는 그의 간절한 외침.
살. 아. 만. 있. 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