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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ㅣ 사계절 1318 문고 53
배봉기 지음 / 사계절 / 2009년 3월
평점 :
"입을 열어 가슴속 말을 하고, 그래서 눈물이라도 흘리면 자신의 마음속 저 무언가가 터져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렇게 그 무엇이 터져 버리면, 스스로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정말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장 싱그러워야 할 십대들. 하지만 입시제도와 대학에 목맨채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자유라는 건, 그리고 감정이라는 건 어쩌면 사치처럼 느껴지는 우리의 현실. 그 가운데서 아이들이 잃어가는 것과 잊어가는 것들..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준 책이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 민제.
늘 전교 1,2등을 다투던 형이 갑작스럽게 대학을 안 간다고 선언한 후, 가슴이 찢어져버린 엄마가 기대하는 건 민제. 민제는 그렇게 숨막히듯 답답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기에 열심히 공부하며 지내고 있다. 그야말로 숨통이 트이는 공간은 서용현 선생님과 아이들과 함께 만든 인터넷 신문.
어느 날 밤, 민제는 전화를 한 통 받는다.
작년 1학년 8반의 동급생이었던 김찬오로부터..
찬오는 뇌의 어떤 부분이 조금 아파서 모든 반응이 느릿느릿한 아이였다. 찬오는 전화로 미.안.해.. 라는 말을 남긴다. 민제가 무슨 의미인지 물어볼 겨를도 없이 전화는 끊어지고 다음날, 민제는 학교에서 찬오의 사망소식을 듣는다.
민제와 가장 절친이고 1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던 영우는 찬오가 죽기 전날 자신을 찾아왔다고 말하고, 침묵하고 있을 수 없는 인터넷 신문 기자들은 찬오의 죽음에 대해, 청소년 자살에 대해 기사에 다루려고 한다. 학생들의 편집회의를 통해 기획칼럼으로 하여 1학년들이 글 1개를 쓰고 2학년이 각자 1,2,3차로 나누어 글을 싣기로 하고 1차는 평소 냉정하고 성적좋은 승욱이가.. 2차는 민제가 3차는 영우가 쓰기로 결정한다. 중간에 영우가 민제에게 순서를 바꾸자고 제안하고 1차가 올라간 시점에서 수능을 앞두고 분위기가 흐트러지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학교에서는 계속해서 압력이 들어온다. 2차를 써서 올린 영우. 서 선생님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직접 통제하겠다는 명령을 받게 되고 기획특집 기사를 중단하기로 결정한다. 왠지 안심하는 민제. 그리고 다음 날, 서 선생님과 민제는 영우로부터 3차를 쓰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는데...
찬오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동안 억누르고 감춰왔던 것들로부터 자신을 발견하는 영우와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배워가려는 민제.. 그 십대들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 책이었다. 현재 한국의 교육현실이라는 것, 그리고 학교의 분위기라던가.. 전반적으로 수능날이 다가오면 초긴장상태.라는 거..
공감가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학교를 떠난 영우, 그리고 여행을 떠난 민제..두 사람은 각자의 분량만큼 인생을 배워갈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돌아봤을 때 찬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독이며 잘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 두 사람은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들과 같은 학생들에게 힘을 주는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또 그러길 바란다.
민제와 영우. 그리고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찬오.. 멀지 않은 바로 우리 옆에 있는 지금 청소년들의 자화상이었다.
p.210
영우는 자신이 마치 그림자가 된 것 같았다. 강태준 선생이, 학교가, 자신을 가벼운 그림자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있으면 정말 자신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게 될 것 같았다. 영우는 자신이 그림자가 아니라는 것을, 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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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그 어둠 속에서 영우는 결심했다.
더 이상 자신이 수백 명 중 하나, 아무것도 아닌 그림자로 취급되는 것을 참지 않겠다고.
감각이 마비된 채로 짐승처럼 내몰리면서 이 길을 계속 갈 수는 없다고. 어떤 길이 될지는 모르지만, 이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고.
p.222
"이 여행이 무슨 해답을 줄 거라고 생각해?"
"모르겠어. 지금은 이대로 있을 수 없으니까 떠나는 거야.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그저 앉아있을 수는 없으니까. 스스로 선택해서 떠나니 스스로 해답을 찾아봐야지."
"마음 단단히 먹었어? 이 여행을 견뎌낼 각오가 되었느냐고."
"그래. 그럴 결심이야. 17년 동안 그저 시키는 대로 해 왔어. 이제 나 스스로 떠나는 거야. 각오를 했어. 내가 선택한 여행이니까."
거울 속의 아이가 슬며시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파이팅!"
"파이팅!"
민제도 손을 들어 올려 속으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