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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호각 ㅣ 창비시선 230
이시영 지음 / 창비 / 2003년 11월
평점 :
'참 행복하다'-
이시영의 <은빛호각>을 읽으면서 내내 스미던 느낌은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경험들을 한 편의 시로 그림처럼 펼쳐 보이는 시인의 솜씨가 유유하다.
시란 모름지기 이렇게 그림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흑백으로 펼쳐지는 이 그림들 속에는 참으로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살아가는
시인의 묵은 기억들이 -은빛호각-소리처럼 길고도 선명하게 웃고 있다.
그의 시에는 사람을 향한 애정만큼의 꽃송이들이 봉긋봉긋 피어있다.
소설집 한권을 읽고 난 기분이 들만큼 수런수런,수많은 얘깃거리가
강물처럼 흘러간다. 어쩌면 칼날같았음직 한 일들도, 가슴이 에였음직한 일들도...
그 힘겨웠을 기억들마저도 이렇게 따뜻하게 풀어 내다니, 기억이 추억이 되면 이토록 따스해지는 것인가.
시인에게는 저세상마저도 편안하고 따스한 자연으로 보여지는 것인가-<히말라야>시
이시영시인에게 있어서나, 혹은 우리들에게 있어 삶이란
-새벽녘 추어탕집 펄펄 끓는 가마곁에서도 물을 튀기며 순하게 놀고 있는
미꾸라지들처럼-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죽음과 삶,기쁨과 슬픔,행복과 불행,그런것들이 한 데 섞여
둥둥 떠다니는 가운데, 아무것도 미리 알지 못한 채,그저 불어가고 불어오는
바람처럼,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길 모퉁이에선가
그 떠다니는 것들과 하나씩 입맞추며 가는 그런것이 삶이리라..
그런것이....
책을 덮으며 내게로 번져오는 긴 미소- 결코 실현되어 본 적 없는 긴 미소-
한 자락 머금는다. 또한, 여느 시집에나 있기 마련인 유명작가의 해설을
붙이지 않은 책에서 시인의 '겸손한 손길'과 '둥근공처럼 굽은 등'을 본다.
어느 깊고 추운 겨울날, 은빛호각 한 개 품에 안고 뜨신 방에
엎드려 펼쳐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