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 Dear 그림책
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 에런 프리시 글, 서애경 옮김 / 사계절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모자>를 통해 본 아동 성폭력 문제"  

_서천석(2013년 6월 11일 저녁 7시 30분, 정독도서관)






다음은 강연을 들으면서 페이스북에 남겼던 단문들입니다.


_"너의 이야기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어!"라는 믿음을 아이에게 갖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_아이들이 모여있고, 할머니 인형이 <빨간모자>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실 속에 어른은 존재하지 않는다. 


_인노첸티는 <빨간모자>의 배경인 '숲'을 도시로 묘사한다. 모든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는 곳, 도시의 일상성이다. 남성/남근 중심 문화, 성은 욕구 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소비 문화에 편입, 아이들 역시 자신도 모르게(혹은 사랑 받기 위해) 자신을 성적 대상화, 모두 모여 살지만 모두가 소외된 사회...가 도시의 속성이다. 


_인노첸티의 <빨간모자>는 성폭력의 과정을 세밀히 묘사하지 않는다. 성폭력의 대부분은 아이들 스스로 막아낼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피해자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강요한다. 인노첸티는 현상을 묘사하지 않고 진실을 드러낸다. 진실은, 성폭력의 모든 책임은 악당에게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세부 묘사는 혐오 자극을 통해 두려움을 유발한다. 인노첸티는 아이들을 성적 대상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_그림형제의 <빨간모자>는 결말을 해피앤딩으로 바꾼다. 하지만 인노첸티는 비극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비극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빨간모자> 이야기를 듣던 아이들은 눈물을 흘린다(주위 인형들까지). 화자인 할머니 인형은 "눈물은 비가 오듯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_비극을 당하면 슬픔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인노첸티는 이야기가 다르게 끝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_성폭력을 당한 아이가 그 사실을 드러내도, 아이에 대한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 불안이 아닌 안정성을 갖고 낙관적으로 접근하는 어른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된다. 


_지진이 일어나도 땅이 갈라져 죽는 경우는 드물다. 옆에 있던 건물이 무너져 깔려 죽을 가능성이 더 많다. 어른은 '건물' 같은 존재이어야 한다


_피해 아동의 부모가 아이의 성폭력 피해 경험이 아이의 인생 전체에 미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 경험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_평소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아이에게 주는 것이 필요. "네가 싫으면 아무도 너를 만질 수 없어!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사촌, 아빠, 엄마라 할지라도!"


_싫다는 것을 말할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도 싫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다음 타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_아이들은 부모와 유치원, 학교 등에서 각기 다른 교육 철학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당장은 혼란에 빠질 수 있지만, 아이는 결국 자신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권위 못지 않게 아이의 선택까지도 존중하는 것이다. 


_아동 성폭력에 대한 부모의 즉각적 대응 수칙

(1) 평정심을 유지할 것

(2)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을 경계할 것

(3) 전적으로 가해자의 책임임을 분명히 할 것

(4) 내가 너를 위해 행동할 것을 약속할 것

(5) 뭐든 물어봐도 좋다고 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대답할 것

(6) 아이의 증상은 있을 수 있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창피하게 여기지 말 것

(7) 정보를 수집하되 꼬치꼬치 묻지 않는다.

(8) 증거를 확보하고 의료진을 만난다(아이를 씻기지 말로 바로 병원으로).


_아동 성폭력의 예방 교육

(1) 가능한 한 일찍

(2) 사람보다는 상황에 초점을 두고 교육(수영복 입는 부분은 아주 소중하니 씻는 것을 도와줄 때가 아니면 누가 만져서는 안 된다."

(3) 부모와 한 집에서 자야 한다. 

(4) 명절에는 남녀를 분리해서 엄마와 함께 잔다. 

(5) 아이들만 집에 두는 것을 되도록 피한다. 

(6) 양성 평등 교육 및 부모의 부부 관계가 중요하다. 


_성폭력 관련 서천석 선생님의 추천 도서(독서 대상: 초등 저학년)

<빨간모자>(로베르토 인노첸티, 사계절)

<슬픈 란돌린>(허수경, 카틀린 마이어, 문학동네)

<비밀>(허은, 문학동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5-10-21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폭력 예방서로 놓고 토론 해볼 까..합니다.^^
좋은주제 고맙습니다.

Soli 2015-10-21 08:45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고맙습니다.^^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 순례의 영성과 보행의 신학 IVP 영성의 보화 7
찰스 포스터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CTK) 2013년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link)

★원고가 길어서 잡지에는 조금 덜어냈습니다. 블로그엔 전문을 싣습니다. 



순례, ‘공중의 새를 보며’ 걷는 하루하루의 일생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다>(찰스 포스터 지음윤종석 옮김IVP 펴냄2013년 4월)






먼 훗날, 아니 흐늘거리던 저녁노을 끝자락 감은빛 하늘이 곧 펼쳐질 지금 이 순간 내 생을 마친다면, 주께서 내가 이루거나 이루지 못한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걷던 길가에서 흘린 땀방울과 눈물 한 자락을 더 칭찬하고 위로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여, 무언가를 이룬 그때가 아니라,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걷는 그 순간에 나의 최후를 맞길 바란다. 진정한 삶의 의미란, 그저 목표에 도달하는 것 혹은 무언가를 성취하는 그것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야 비로소 믿음과 불신, 확신과 의심, 영혼과 육체, 내면과 외부세계, 천국과 세상 사이에서 바특이 존재하는 순례자의 영성을 우리는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영성의 보화’ 시리즈는 오랜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영성 훈련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오늘날의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를 위한 적용점을 제시하는 기획물이다. 기도, 안식, 십일조, 금식, 절기, 성찬 등의 주제에 이어 이 책은 이 시리즈의 마지막으로 ‘순례’를 다룬다(하지만 한국에선 ‘절기 준수’를 다루는 시리즈의 일곱 번째 책 <The Liturgical Year>가 빠지고 마지막 주제인 이 책이 일곱 번째로 출간되었다. 순서가 바뀌어 출간되는 것은 괜찮지만, 시리즈 중 한 권을 누락한다면 독자로서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시리즈 편집자인 필리스 티클은 ‘순례’라는 주제가 일곱 주제 중에서 가장 조심스럽고도 위험한 주제라고 경고한다. 그 이유는 “여태껏 알던 진리들은 순례 도중에 아예 죽거나 아니면 오히려 시퍼렇게 되살아나 단단한 인식과 거룩한 애정이 되어 삶의 모든 부분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순례는 우리의 모든 확신을 ‘완전히 불확실하게’ 만든다. 


“예수는 뭔가에 사로잡히신 사람, 단 하나의 메시지밖에 없는 사람이시다.” 그분은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 다니시며 숱한 민중을 만나 천국을 설파하셨지만, 핵심은 단순했다. “나를 따르라”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모든 확신을 불확실한 것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순례는, 삶을 지탱하던 온갖 환상을 극복하며 “공중의 새를 보며” 걷는 하루하루의 일생이다. 그것은 낭만이 아니라, 나의 실존에 닿고자 숱한 불확실성을 감내하는 것이다.  


한편 순례의 전통은 여타의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종교적 행위다. 그런 면에서 순례는 확실히 종교적이다. 다만 기독교 전통에서의 차별점은 두 가지다. 첫째,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여정 자체이지 도착이 아니다. 둘째,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은 훨씬 더 재미있게 순례를 즐긴다. 무엇보다 순례의 유익한 점은, 순례를 통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분리하고 육적인 것들을 폄훼하는, ‘최강의 이단’ 영지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제대로 하기만 하면 순례야말로 영지주의를 물리치는 가장 잘 알려진 해독제 중 하나”이며, “순례자들이 영지주의를 짓밟는다면 그것이 곧 기독교의 순례”가 될 것이다.  


어떤 책은 완벽한 답변으로 단 하나의 의심의 여지도 봉쇄하지만, 어떤 책은 다소 허술한 비약을 일삼지만 마음을 충동하여 끝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한다. 난, 답변을 주는 책보다 질문을 주는 책이, 안주하기 보다는 무언가를 향해 추동하는 책이 ‘옳다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인 동시에 확실히 위험한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전한 복음 - 우리가 잃어버린 기독교의 심장
매트 챈들러 & 제라드 윌슨 지음, 장혜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한국판(CTK) 2013년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link)



다시 물어야 할 질문, “복음이란 무엇인가?”
<완전한 복음>(매트 챈들러, 제라드 윌슨 지음|장혜영 옮김새물결플러스 펴냄2013)


미국 댈러스에 위치한 빌리지교회(The Village Church)의 대표 목사인 매트 챈들러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한다. “만일 여러분이 생각하는 교회가 뷔페식당 같은 곳이라면, 다른 곳으로 가서 드십시오.”(110쪽) 그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취향에 맞춘 복음이 아닌, 철저하게 ‘선포되는 복음’이다. 복음은 그 자체로 완전하기 때문에, 다른 여타의 가치나 가능성을 배제한다. ‘도덕적이고 심리치료적인 이신론’이나 ‘번영 신학’ 따위는 결코 복음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에 기록된 ‘있는 그대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이 책의 목표는 복음의 규명과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챈들러는 ‘땅에서 바라본 복음’과 ‘하늘에서 바라본 복음’이란 두 가지 지평에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복음의 의미를 추척하고 복원한다. 땅의 시각은 복음의 개인적․인격적 측면을 다루고(1부), 하늘의 시각은 복음의 보편적․우주적 측면을 다룬다(2부). 로마서 8장 22-23절은 이러한 복음의 두 가지 관점을 충족시킨다. 즉 복음은 ‘타락한 모든 피조물이 경험하는 갈망의 충족’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유일하게 창조된 인류가 지닌 갈망의 충족’이다. 저자는 이 두 관점의 균형을 강조하되 어느 한쪽으로 쏠릴 때의 위험성을 경고한다(3부). 결국 “완전한 복음”(The Explicit Gospel)의 핵심은 축소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온전한 복음에 있으며, 복음을 추상적인 언어로 추정하는 것이 아닌 분명하게(explicit) 선포하고 드러내는 삶의 자리에 있다.

미국 복음주의를 이끄는 차세대 설교자답게, 챈들러의 메시지는 시종일관 간결하되 강단 있게 전달된다(공저자인 작가이자 목사인 제라드 윌슨의 공로인지도 모른다). 100여 명 남짓의 교인이었던 빌리지교회는 2002년 챈들러가 부임한 후 수년 만에 성도 1만 명의 멀티사이트 교회로 성장하였고, 챈들러는 2009년 뇌종양 3기 진단을 받았으나 이듬해 완치하였다. 현재 그는 더욱 열정적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죽음에 직면했던 경험 때문일까. 복음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사뭇 비장하다.


칼빈주의 신학에 충실한 논증은 과도한 확신에 휩싸여 서둘러 전개되는 것 같고(무엇보다 우리는 의심할 자유가 있지 않은가! 이 부분에서 같은 칼빈주의자인 제임스 K. A. 스미스의 사려 깊은 논증이 그립다), 일부 냉소적인 단정과 현실을 살아가는 ‘복음적 삶’에 대한 관찰이 다소 피상적이라는 점은 아쉽다. 복음은 레토릭 없이도 충분히 완벽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숱한 레토릭을 붙여도 부족한 것이 삶의 온갖 양태인 까닭이다. 어찌 되었건, 우리 삶과 교회의 현실이 위태로울 때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질문해야 한다는 것과 ‘복음’에 대해 이 정도로 좋은 책이 주어져있다는 것 또한 ‘기쁜 소식’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늘 그러하듯, 문제는 ‘완전한 복음’을 대하는 ‘불완전한 우리 자신’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희망이자 아쉬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서의 에로티시즘
차정식 지음 / 꽃자리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복음과상황(2013년 6월호)_“독서선집”



황홀한 에로티시즘의 계절이 왔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차정식 지음│꽃자리│2013)



성서를 읽으며 가장 난감했던 것은 어김없이 아가서였다. 노골적이고 관능적인 언어들은 과감했다. 텍스트에 당황해서 펴든 주석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알레고리, 훗날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에 대한 예표로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해설했다. 텍스트에서 한껏 자극받은 충만한 설렘은, 그만 한풀 꺾이고 만다. 그런데 요즘, 신학적 인문학의 통전적 맥락에서 생동하고 약진하는 언어로 나를 흥분시키는 신학자 차정식은, 그런 주석들을 ‘아가에 대한 산만한 말들’이란 표현으로 제압한다. 최근 출간된 그의 <성서의 에로티시즘>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외람되고 위태롭다. 성서를 둘러싼 전통의 금기와 세속적 욕망의 은밀함은, 이 책의 도처에서 탄로나거나 새로운 통찰로 대체된다. 저자의 육감적 언어는 황홀하며, 간혹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탐한다. 저자의 도발은, 가히 그 자체로 에로티시즘적 탐사라고 할 만하다.


저자는 히브리 서사와 헬라적 신화 전승에서의 에로스 개념의 차이부터 살핀다. 먼저 플라톤이 기록한 에로스 신화는 '태초에 자웅동체로 존재했던 인간을 제우스신이 반으로 갈라놓았다'. 절반으로 갈라진 인간의 한쪽은 남성으로, 다른 한쪽은 여성으로 분립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인간은 상실한 반쪽을 갈구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헬라적 맥락에서 에로스의 정점은 곧 결핍의 극복, 충만의 완성'이다.


이에 반해 성서는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흙을 취해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그 자체로 온전한 사람 '아담'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처하는 아담을 보시고, 그를 돕는 짝 '하와'를 지어주었다. '아담이 결핍된 존재라서가 아니라 홀몸이라는 이유가 또 다른 인간 창조의 사유'였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은 물론, 세상의 모든 것보다 소중한 존재로 서로를 마음껏 탐했을 것이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예찬과 감탄의 언어에 묻어나는 에로스의 향연은, 다분히 존재론적이다. 사랑하는 둘은 한 몸을 이룬다. 남자와 여자는 '낯선 타자 속에서 익숙한 자신을 발견하고 익숙한 타사 속의 나를 낯설게' 수용한다.

  

유대계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애무'의 개념 속에 조형한 대로,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성적인 교감을 통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나아가 서로의 몸을 더듬고 느끼며 뭔가를 탐색하는 교호 작용을 통해, 거기서 토해내는 신음과 탄식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육체가 영원하지 않고 결국 죽음을 향해 퇴락해간다는 감추어진 진리를 서서히 예감한다. 그것을 신비로 느끼며 '타자화 된 나'를 발견하는 여정이 곧 '애무'인 것이다.(23쪽)


거머쥘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의 몸짓인 '애무'는, 그 절정의 순간 성기의 합일을 도모한다. 하지만 그 절정은 곧 '공허한 욕망의 허구렁'을 직면한다. 결코 정복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에로스의 숙고가 뒤따른다. 에로스의 욕망을 온갖 금기에서 해방시키되, 타자를 향한 갈망과 자아에 대한 겸손이라는 에로티시즘의 인문학적 성찰을 다지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목표일 것이다.


왜곡된 에로스의 통념 너머


이 책은 성서에 기록된 에로스 서사를 뒤따르며, 왜곡된 통념을 깨뜨린다. 근친상간, 천박한 매음, 경계를 넘는 탐욕적 에로스 등으로 대표되는 천박한 포르노그래피와 굴절된 욕망의 에로티시즘을 극복할 대상으로 산정한다. 


또한 저자는 전통적 해석사에서 오랜 통념으로 자리잡은 금기에도 도전한다. 천박한 포르노그래피적 에로티시즘이 있는 것이지, 에로티시즘 그 자체로 천박한 것이 아니다. 허락되지 않은 존재를 탐하는 굴절된 욕망의 에로티시즘이 있는 것이지, 욕망 그 자체는 우리 존재의 태고적 갈망에 가깝다. 저자는 이 책을 기술하는 언어의 방식부터, 에로티시즘적 미학의 절정에 도달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금욕의 대상이었던 에로티시즘적 언어를 해방시키고, 금기의 영역에 도전하여 충만한 해석의 지평을 연다.  


에로티시즘은 다분히 욕체적인 합일을 추구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룻과 보아스의 곡진한 서사는, 남녀간의 뜨겁고 충만한 에로티시즘을 전제하고 있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당대의 관습을 아우르되 시대의 소명까지 조망하는 데까지 전진한다. 늙은 다윗의 몸종으로 침상을 지켰던 아비삭의 에로틱한 육체는, 끝내 경계의 탐욕을 견지하며 격조있는 침묵으로 '동정녀의 존재 미학'을 사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로티시즘의 절정은 예수와 '값비싼 향유(香油)'를 바친 한 여인과의 서사에서 발견된다. 예수는 여인의 에로티시즘적 갈망과 헌신을 향유(享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할 것을 선언한다. 예수와 여인의 합일은, 사회정의에 대한 피상적 통념이나 엄숙하고 상투적인 에로티시즘을 극복하고, 진정한 에로티시즘의 정점을 보여준다.


에로스의 핵심은 무엇보다 합일의 정념을 지향한다. 에로티시즘은 그 합일을 훼방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데 이르는 모든 부정적 스캔들을 혁파하는 해체의 에너지다.(250쪽)


저자 차정식은 성서적 본질과 인류의 실존적 현상의 간극에서 바특한 탐구를 수행한다. 본질에 근거하지 아니한 전통과 통념들은 그 앞에서 처참하다. 아가페와 에로스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은 결국 허물어지고 합치의 지경에 이른다.


'그 매개는 대체로 몸'이나, 성서의 에로티시즘은 더 크고 더 깊은 사유까지 탐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저자로 인해, 성서의 황홀한 에로티시즘을 열망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표지는 태초의 에로티시즘을 형상화한 듯 하다. 서로의 존재를 마음껏 탐하고 충만한 합일에 이르렀던 아담과 하와의 에로스 서사일 것이다. 그 에로티시즘은 가장 아름다운 봄날의 화사함과 닮았다. 이제, 우리도 에로티시즘을 품고 열망하며 실행할 충만한 계절에 이르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큐티진 2013년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주제는 '물질에 관한 추천도서'였고 독자 대상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가장 큰 비중으로 양낙흥 교수의 <깨끗한 부자 가난한 성자>를 추천했습니다. 저는 사실, IVP에 있을 때부터 이 책에 대한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물론 이 책은 좋은 책입니다. 특히 이 책은 2012년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국내부분 우수상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세계를 사는 그리스도인'이 첫 번째로 읽어야 할 책으론 '적당'할 듯 싶었습니다. 다만 저의 사적 불만을, 다른 두 권의 책으로 만회하고자 했습니다. 자끄 엘륄과 김찬호의 책입니다. 서평에선 적은 비중으로 소개했지만, 저의 '사심'은 이 책들에 좀 더 있답니다.


물질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이 사는 법

깨끗한 부자 가난한 성자 (양낙흥 지음|IVP 펴냄|2012년 6월)
하나님이냐 돈이냐 (자끄 엘륄 지음|양명수 옮김|대장간 펴냄|개정2판, 2010년 5월)
돈의 인문학 (김찬호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2011년 1월)


요즘 나의 고민은 욕망의 문제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이며 더 소비할 것인가에 대한 욕망도 있지만,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바둥대는 욕망도 있다. 옳지 않은 방법인 것을 알면서도 더 가지려는 욕망이 있고, 살아남기 위한 욕망 앞에서 잠시 모른 척하는 가치가 있다. 지금 내 문제는 후자의 경우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상관없이, 그 욕망에 우리의 삶이 압도되는 순간, 우리 존재에 존엄을 부여하던 가치의 몰락을 경험한다. 가치가 몰락할 때 우리 존재는 비루하다.

욕망의 대척점에 가치가 있다. 가치란 우리 존재의 쓸모를 결정짓는 그 무엇이며, 삶의 목표가 되는 그 어떤 의미로 정의된다. 성서는 가치와 욕망의 문제를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재물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한다. 성서는 '부(富), 돈, 재물'이란 뜻을 가진 맘몬을 ‘우상’으로 정의했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를 수용하는 선한 욕망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간혹 그런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현실 속에서 가치와 욕망의 문제는 혼재되어 있다. 특히 우리의 여린 마음은, 그것을 쉬이 구별하기 힘들다(구별하지 '못하는' 것인지, 구별하지 '않는' 것인지조차 구별하기 힘들다!).

이때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이 있다. 2012년 출간된 양낙흥 교수의 <깨끗한 부자 가난한 성자>(IVP)를 첫 번째로 권하고 싶다. 2000년대 들어 한국교회를 뜨겁게 달궜던 ‘청부론-청빈론’ 논쟁이 있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훌쩍 지났다. 두 논쟁 모두, 저마다의 이름은 퇴색했으나 그 명분과 논점은 여전히 타협하지 않고, 그 진영에 머물러 있다. '깨끗한 부자'로 표현되는 청부론은, 부의 윤리적 획득과 이웃을 위한 선행을 강조한다. 반면 청빈론은 자발적 영성적 가난을 추구하며 단순한 삶과 나눔을 강조한다.


이 책은 청부론과 청빈론 모두 좋은 동기에서 시작한 담론이며 성경적 요소가 ‘일부’ 있으나, 심각한 위험성 또한 내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청부론은 번영신학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자칫 번영신학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 청빈론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부를 일체 부인하는 극단적 금욕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저자는 번영신학이 한국교회의 몰락을 야기한 주된 원인이라고 강고한 어조로 비판하되, 금욕적 청빈론이 아닌 향유하는 청빈적 삶을 강조한다(번영신학의 위험성에 대해선 행크 해네그래프의 <바벨탑에 갇힌 복음>을 보라).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의 텍스트를 인용하여 '누림은 그리스도인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는 축제 혹은 잔치의 순간이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것은 때로 하나님의 선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예수님은 부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초청에 기꺼이 응하시고 그들의 집에서 잔치를 즐기셨다. 물론 누림의 권리보다 우선되는 것은 절제의 미덕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해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권면했다.

이 책의 부제는 '성경에서 찾은 자족, 향유, 나눔의 원리'다. 대체로 유익하고 일독할 만한 '좋은 책'이다. 허나 한 가지 아쉬운 점과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고, 감히 비판해본다. 아쉬운 점은 이 책의 주된 텍스트는 성경 외에 주로 개혁주의적 칼빈주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다. 아마 숱한 반론은 그 논거에서 시작할 것이다. 
  부족한 점은, 좀 더 거시적 안목에서 물질 세계를 성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학자는 목회적 상황을, 목회자는 성도가 처한 현실적 정황을 보다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결국 기독교인의 실존은 교회를 거점으로 하되, 현실에 거한다. 교회가 아닌 현실에서 그 실존의 고뇌는 갈음된다. 결국 세상이 문제다!

다음 두 권의 책을 더불어 읽기를 권한다. 하나는 자끄 엘륄의 <하나님이냐 돈이냐>(대장간)다. 엘륄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의 핵심에 가난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돈(맘몬)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선, 그 권세의 속성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금욕의 삶으로 도피하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어 그것을 지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세상의 공고하고 폭력적인 체제’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거저 주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찬호 교수의 <돈의 인문학>(문학과지성사)을 권한다. '돈은 개인과 사회를 묶어주는 사회 시스템'이다. 돈은 '외부 세계에 있는 객관적인 제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마음과 존재에 심층적으로 얽혀 있는 에너지'다. 현대에 이르러 돈의 권력은 점점 막강해진다. 이 책은, 돈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묻고, 성찰할 것을 제안한다. 인문학, 즉 인간다움의 가치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함의로 주어져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돈의 세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 


궁금하다면, 이 책 다음으론 당신의 욕망을 읽으시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