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도구(신미식 지음|프리스마|2012)

20세기형 인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 열어라_이슈북02(강만길, 손석춘 지음|알마2012)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는가(매튜 스튜어트 지음|석기용 옮|교양인|2011)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스캇 맥나이트 지음|박세혁 옮김|아바서원|2013)

단단한 진리(필립 얀시 지음|최종훈 옮김|포이에마|2012)























1. 삶의 도구  신미식의 사진집이다. 서문을 쓴 임종진은 이 책을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바로 우리의 근원에 대한 신미식의, 신미식이 전하는 사모곡(思母曲)"이라고 썼다. 신미식은 이 책에서 좀처럼 사람 혹은 풍경, 심지어 사물 전체를 담지 않는다. 전체가 아닌 한 부분, 한 부분을 주목하여 정성을 다해 몰입한다. 마치 조각을 맞추듯, 장면 하나하나는 무언가를 향해 서서히 다가선다. 지극한 몰입 끝에 기어이 눈시울은 애달픈 그리움을 맺는다. 설날, 집을 떠나기 전 사진기도 챙긴다. 그이 만큼 지독한 사진은 남기지 못해도 괜찮으니, 그 허락된 시간이 다하기 전에 그리움을 용기 내어 담고싶다. 신미식의 말처럼 '사진을 담는다는 것은 마음을 담는 것'이기에.  


"질퍽하게 파인 주름살과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펼쳐놓고는 결국, 신미식은 말하려 한다. 이미 떠나셨지만 떠나보낼 수 없는 보모님에 대한 애달픈 통곡이자 가슴 밑바닥에 옹골지게 서려 있던 그리움이요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인 것임을."(10면)


2. 20세기형 인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 열어라(이슈북02)  강만길과 손석춘의 대화. 인터뷰이는 강만길이고, 인터뷰어는 손석춘이다. 짧은 대화록이지만 그 무게는 가볍지 않다. 시인 고은은 원로 역사학자 강만길을 '두 세기에 걸친 나침반'이라고 극찬했다. 왜곡된 이 나라의 현대사에 그가 있어 얼마나 다행이지 모른다(<20세기 우리 역사>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은 마치, 언젠가 읽었던 그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의 압축된 결론을 읽는 느낌이다. 대화 내내 강만길은 화가 나 있는 것만 같다.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하는지, 대화록을 따라가며 그 분노의 자리에 놓인 나의 무지를 불현듯 발견한다. 부끄러워 낯이 달아오른다. 한편,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여러 비화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래 인용구가 적지 않지만, 고작 93면짜리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는 얇은 책이다.  

"우리 것이 되고, 우리 것이면서도 내 것이 되는 그런 체제, 어떤 생산물이 내 것이 되면서도 우리 것이 되고, 우리 것이 되면서도 내 것이 되는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야 21세기 이후의 인간 세상이 평화롭고 편안한 세상이 될 겁니다. 아직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공상'이라고 하겠죠. 하지만 앞서가는 생각이 '공상'이라는 말을 듣지 않은 적이 있었나요?"(19면)

"역사학과 경제학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경제학이 수치 중심의 학문이라면, 역사는 가치 중심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5면)

"(김구는)우익 중의 우익입니다. 그 김구도 분단 정부를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1948년 남북협상을 하러 평양에 갔습니다. 설령 분단이 되었다 하더라도 남쪽이 이승만 정부가 아니고 김구 정부가 섰더라면 아마 6.25는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이 없으니까요.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김구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32면)

"외교사학자들은 한반도가 대륙세력권에 들어가게 되면 일본을 겨눌 칼이 되고, 해양세력권에 들어가게 되면 대륙을 침략하는 다리가 된다고 합니다."(34면)

"현대 사회에 있어서 경제적 민주주의가 없으면 사회적 민주주의가 안 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된다고요. 그래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 사회적 민주주의가 같이 가야 합니다."(42면)

"김대중 씨는 대통령 되기 전부터 만났어요. 생각보다 상당히 의지가 굳은 사람이고 머리가 샤프해요. 그러면서도 눈물이 있어요."(58면)

"역사는 직선으로만 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그재그도 있을 수 있고, 어떨 때는 꽉 막힐 수도 있어. 역사가 직선으로만 갔으면 인간의 역사가 여기 있겠어요. 훨씬 더 갔지. 지그재그도 있는데 다만 지그재그에 대해서 왼쪽으로 갔던 곡선이 오른쪽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각이 넓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역사가 앞으로 나가죠. 극좌가 되고 극우가 되면 역사가 발전하지 못합니다. 멈춰버립니다. 각을 넓혀야 합니다."(73면)

"현실을 파괴함으로써 자기가 들어갈 구멍을 만드는 의욕을 가져야 해요. 그래야 젊은이들이지."(91면)

"원로 역사학자 강만길. '정치는 역사의 진행형'이라고 단언한 선생은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라고 참 쉽게 풀어주었다."(93면)


3.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는가  스피노자의 길과 라이프니츠의 길이 있다. 당대에 이단아로 정죄받았으나 결국 철학의 본령을 차지한 스피노자와 철학마저 정치적 처세의 수단으로 삼아 승승장구했으나 결국 그 무엇도 되지못한 라이프니츠. 이 책은 작가적 상상력으로 재탄생한 그들의 평전이다. 내가 유럽의 영화감독이었다면, 이 책을 원작 삼아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흥미진진한 한편의 드라마이면서도 철학적, 역사적 통찰이 가득한 책이다. 출간된 직후 사서 읽었는데, '반값'이란다. 억울하고도 반가운 마음에 메모를 남겨둔다. 

"실제로 17세기의 위대한 그 두 명의 철학자들은 아직도 극복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며, 아마도 그들은 근대적인 사유를 탄생시킨 쌍둥이 창시자들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피노자와 그의 철학 속에 기록된 모든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정의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반응 가운데 홀란트에서 돌아온 후에 라이프니츠가 오랜 세월 발전시킨 철학보다 더 강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오늘날에도, 헤이그에서 만났던 그 두 사람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리고 암묵적으로는 이미 선택하고 있는 두 개의 선택지를 각기 대표하고 있다."(프롤로그, 21면)















4.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이 책은 복음의 통전성에 대한 집요한 해명이다. 복음은 세상-공동체-개인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실현시킨다. 스캇 맥나이트는 역사적 예수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면서도 뛰어난 작가적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우리나라엔 그의 책이 많이 소개되지 않았는데 주목할 만한 학자다(IVP에서 번역된 <금식>을 추천한다). 이 책의 가치는 다음주에 짧은 리뷰를 써서 한 매체에 기고할 예정이므로, 제목과 표지에 대한 사소한 불만은 언젠가 적은 적이 있으므로, 여기선 이 정도만 하자.    

"종말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의 완벽한 결말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기 위해 종말을 알아야 한다."(83면)

"복음은 삼위일체적이며 상호 위격적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며, 이 하나님의 본질이 곧 공동체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에이콘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관계를 맺도록 지음 받았다.(91면)

"배제는 너무나도 교묘해서 미로슬라브 볼프가 정의한 것처럼, '모든 곳에 침투해 있는 소소한 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다시 말해 배제는 하찮은 죄로부터 구조적인 악에 이르기까지, 작은 거짓말에서 조국을 배반하는 행위까지, 가난한 이들에게 작은 것을 나눠 주기를 거부하는 개인의 모습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음식을 빼앗아 소수 특권층을 위한 대저택으로 바꾸어 놓는 독재자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171면)

"모든 비극에 대한 희망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희극이다."(178면)

"너무나 자주, 정말이지 너무나도 자주 교회는 무의식적으로 누가 내부자이고 누가 외부자인지를 나눈다. 그러나 포용의 은혜를 구현하는 참된 신앙 공동체는, 복음이 말 그대로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202면)

"세상에서 시작해 공동체와 개인으로 나아가는 것은 개인주의적이라기보다 에이콘적인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에이콘인 인간에서 시작해 복음의 의도를 그 인간을 회복하는 것으로 본다면, 통전적인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204면)




5. 단단한 진리  필립 얀시의 책이 출판사를 바꿔가며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이고 있는데, 우선 반갑다. 그의 몇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였으나, 그것으론 부족하다. 우리나라에서 얀시는 아직 충분히 주목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무식하게 나눠 '저자'와 '작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무식한 구분법에 의하면, 나에게 필립 얀시, 프레드릭 뷰크너, 유진 피터슨 등은 작가이다. 그렇다고 저자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콘텐츠로 승부하는 저자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를 뛰어난 서사와 문체로 전하는 작가도 있어야 한다. 대중은 작가에게 환호한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기독 출판계엔 작가가 거의 없거나 드물다. 아무튼.)    
  이 책은, 그의 에세이 13편이 실린 글모음집이다. '필립 얀시 입문서'로 제격이다. 저널리스트로서 수준 높은 그의 에세이를 만날 수 있다.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에서도 그의 유려한 글솜씨를 경험할 수 있지만, 그의 글쓰기는 서사적 구조에서 더욱 그 가치를 발한다는 면에서 이 책은 충분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얀시의 책에서 제일 맛있는 것은 글맛이다. 또한 일부 에세이는 그 시의성이나 적합성 면에서 우리나라와 사뭇 다른 맥락을 가진다(특히 9장 "복음주의자란 누구인가?").
  무엇보다 최종훈의 번역이다. 출판사들은, 최종훈 번역에는 반드시 "번역 후기"를 포함하길 바란라. 그는 믿을 만한 번역가이면서도, 뛰어난 글쟁이다. <기도_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길>에서처럼, 이 책에서도 최종훈의 번역 후기는 그 자체로 반짝반짝거린다. 최종훈의 글을 일부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이 책 역시 철저하게 '얀시 공식'을 따른다. 고통, 윤리, 도덕, 오늘날의 첨단 과학, 복음주의, 구호 활동, 예술 따위의 거대하고 사변적인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일관된 논리를 지켜간다. 하나님이 애초에 그리셨던 밑그림을 더듬어보고 거기에 오늘의 현실을 비교하며 어떻게 그 간극을 좁혀갈지 이야기하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잔뜩 불신만 키워놓고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독자들을 이끌고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 신학자들의 해석을 두루 섭렵한다. 동서양을 오가고 시대를 종횡무진 뛰어넘는다. 유대인 랍비의 해석과 소설가 프레드릭 뷰크너의 접근을 나란히 비교하고, C. S. 루이스의 회의와 도로시 세이어즈의 판단을 대조하며, 바흐와 멘델스존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역자로서는 곤란한 노릇이다."

"민감한 사안들을 다루지만 얀시의 손가락은 현실에 매몰된 현대인이나 교리의 한계에 갇힌 크리스천을 비난하는 데 사용되는 법이 없다. 같은 처지에서 동일한 고민을 품고 살았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은 뒤에도 여전히 불투명한 결론을 붙들고 씨름하는 동료 인간의 입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어렴풋이 보이는 목적지 방향을 가리켜 보이는 데 쓰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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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여성 평론가로 산다는 것(심영섭 지음|열린박물관2006)

삶은 홀수다(김별아 지음|한겨레출판|2012)

공동 소유_미심쩍은 초대교회의 이상(루크 T. 존슨 지음|박예일 옮대장|2013)

믿음_박영선 목사 설교선집 1(박영선 지음|조주석 엮음|복있는사람|2013)

리더는 무엇으로 사는가_영적 리더를 위한 내면 세계 건축법(고든 맥도널드 지음|김명희 옮김|IVP|2013)






0. 독서가에 대한 김영민의 충언을 다짐과 성찰로 되새기며, 이번 독서 노트도 쓴다. 


"따라서 책을 읽는 자는 반드시 여러 책을 읽는 자이며, 읽으면 읽을수록 책과 자신 사이에 개제하는 낯선 부조화에 시달리는 자이며, 책이라는 '세계개창성'과 그 타자성에 조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김영민, <당신들의 기독교>, 110-111면)


1. 영화 평론가 심영섭, 그 예사스럽지 않은 날카로움, 혹은 그 속에 숨기운 명민한 감수성을 마음껏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그는 임상심리학자이지만 영화 평론가로 밥벌이를 한다. '심영섭'이란 필명은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한 사람'이란 뜻이란다. 여성권한지수 78위인(아마 영화계에선 더 바닥일 것이다)견고한 '남성 아비투스'의 나라에서, 숱한 남성 감독을 제대로 까는, 그래서 욕먹는 여성 평론가이기도 하다. 평론, 혹은 비평, 하다못해 나같은 '듣보잡 서평'이라도 쓰려는 이들에겐, 적절한 귀감이 되는 책이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 된, 두 번째 순서로 앉혀진 짧은 글 하나 만으로도, 이 책은 매우 좋은 도전이자 위로가 된다. 


"여성 평론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편에서는 은근히 페미니즘적인 시각의 영화 평을 기대하기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페미니즘적인 영화 평만을 쓰는 편협한 영화 평론가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편협이라면 평론가들은 아직 더 편협해도 된다고 믿는다. 오히려 영화 평론가들의 문제 중 하나는 어떤 이론적 바탕과 인문학적 소양 위에서 글을 쓰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제는 알겠다. 이론을 가지고 영화에 대해 꿰어 맞추는 것이 가장 쉽다. 텍스트에 집중할 것. 그러나 나도 영화를 보며 꾸벅꾸벅 졸 때가 있다."(27면)


"중요한 것은 평론가라면 그것이 페미니즘이든 아니든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성찰이 깃든 전복력과 새로움을 발견하는 열린 시각이다. 더 나아가 '여성'이라면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어선 다원성 그리고 차이를 허용하는, 때로는 이방인, 무질서, 광기, 주변의 저급한 것들과의 화합을 꾀할 수 있는 파격과 너그러움이 깃들어 있으면 좋겠다. 나는 나를 남성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반대로 여성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29면)


"어쩌면 내게 20자 평에 관한 진실은 단 한가지였는지도 모른다. 목을 배려면 단칼에 벨 것. 20자 평을 하며 나는 내가 전생에 틀림없이 망나니였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로저 이버트처럼 평생 동안 두 엄지손가락을 가지고 '썸 업, 썸 다운.' 하면서 영화의 생사를 결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앞으로는 20자 평을 하고 싶지 않다. 아니 하지 않을 것이다. 망나니 역할은 이제 충분히 했다. 영화 평론가가 아닌 임상심리학자 노릇을 하던 시절에 분명히 나는 좋은 사람이었다."(47면)





2. 소설가 김별아의 산문집. 한겨레신문에 연재될 때, 챙겨 읽던 글들이다.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난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 하지만 챙겨 읽었던 글들을 굳이 사서 곁에 두는 이유는 자명하다. 난 그의 글이, 그의 고민을("잡설, 독설, 객설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무슨 말을 할까를 고민하기보다 무슨 말을 하지 말아야 할까를 고민했다."잘 지켜낸 지혜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덕분에 그의 소설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외로워서 그리운 게 아니라 그리워서 가만히 외로워져야 사랑이다."(17면)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덧붙여 한 가지 밝혀두자면,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파()'다. 그러니 경계할 것도, 안심할 것도 없다.(...) 인간이라는 아름답고도 끔찍하며, 위대하고도 초라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빈손이 필요하다. 오직 그러한 인간을 재료이자 과제로 삼는 작가라는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빈손이 절실하다. 빈손은 현실을 재단하지 않는다. 인간을 심판하지 않는다. 소유의 움켜잡음을 위해 헛손질을 하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자파'인 작가로 살기에 이렇게 텅 빈 채로 충만하다."(213-214면)


"그러하기에 세상의 중심은 권력자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고 힘든 사람, 어려운 이웃이어야 마땅하다. 타인의 아픔을 돌아보고 보살필 줄 알아야 내 아픔도 이해받고 존중받을 수 있다. 징검다리의 공감은 동정이라기보다 연민이다. 중증장애인을 자녀로 둔 엄마들의 분투기 <담장 허무는 엄마들>의 한 구절처럼, 연민이되 '그 고통만 안타깝게 여기는 연민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고통이 있다는 걸 아는 데서 나오는 연민'이다."(218면)

















3. 예전에 <소유와 분배>(1990)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책의 개정판이다. <누가 예수를 부인하는가?>, <초기 기독교 신앙 체험>(이상 CLC), <살아 있는 예수>(청림) 등을 통해 루크 티모디 존스를 알게 되었고 좋아하게 되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헌신하되, 역사적 예수에 대해 인지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을 보았다. 학문의 성실함은, 충분한 고증과 추론을 논리적으로 병행하여 다다를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담보해 내는 조건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성실한 신학자이다(특히 개정판 후기를 보면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개정판의 진수를 보는 느낌이다)

  이 책도 그러하다. 누가-행전 연구를 통해, 초대교회의 공동 소유 문제에 대한 성숙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무엇보다 날카로운 비평과 숙고를 견지하되,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부분은, 공동 소유의 문제에 대한 헬라적 시각과 공동체에 대한 히브리적 사고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결국 소유의 문제는 공동체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이런 책은, 오늘날 참 불편하다. 인문학적 성찰마저 상업-자본주의적 포지셔닝으로 변질된 시대에, 이런 책은 무지 안 팔릴 것이다. 그런 시대인 까닭에,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겐 이 책을 사는 것 자체가 소명일 수 있겠다.


"우리는 소유를 ‘문제’처럼 인식하지만, 그것들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위에서 내가 소유의 문제를 퍼즐이라고 말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소유와 그 사용을 마치 수학적 정리인양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측면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성향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16면)


"유토피아적 이상이나 구체적 사회윤리가 없다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아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것은 축복이다. 소유에 관한 성서증언들을 한 이데올로기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157면)


"인간 소유의 신비에 관한 신학적 묵상은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기억하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참된 신학은 회심과 찬양으로 이어져야 한다. 신앙 공동체에서 신학이 올바른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려면, 인간 존재의 신비를 문제나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지 않으며 하나님 말씀의 신비함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신학은 신비와 문제 사이,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과 견뎌야 하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이며 적절한 긴장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158면)


"공동 소유의 역사는 역설적이다. 공동 소유의 제도와 사상이 덜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에는 오히려 그 공동체는 오래가지 못했다. 선의, 우정, 구성원의 덕에 의지하는 공동체, 그리고 사유재산을 폐기하면 투장이 없어질 것이라 믿는 기대는 충돌하는 자아들과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는 장애에 부딪혀 사라지고 말았다."(174-175면) 
















4. 복있는사람이 <메시지>로 한참 호황을 누리기 시작할 때, 난 좀 우려했었다. 복있는사람의 콘텐츠가 <메시지>로 획일화 되는 것에 대해(또는 이질적 두 트랙처럼 보이는, <메시지>와 로이드 존스를 위시한 청교도 서적들로 양분되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와 맞물려 돋보이는(콘텐츠 뿐만 아니라, 디자인, 마케팅 측면에서도 돋보이는) 단행본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런 우려는, 사실 그만큼 복있는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선보인 박영선 목사 설교선집 시리즈는 다소 위안이 된다. 

  현재 교회 현장에서 사역하는 한국의 목회자 중에 '전집'을 만들어 볼 만한 설교자로, 거의 유일한 설교자가 박영선 목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엮은이인 조주석 국장과의 대담집인 <시간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복있는사람, 2011)에서 박영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분명히 제가 커 온 당대 한국교회의 보편적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배운 신앙은 확신과 모범의 길이었으나, 저는 고민하고 생각하는 길로 인도되었습니다. 거부하고 의심하는 것 역시 신앙에서 중요한 과정이며 내용임을 깨닫습니다."


박영선 목사의 설교 사역은 분명 한국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단 설교와는 확연히 다른 깊이와 결을 가졌다. 깊은 사색의 자리에서 움트는 거룩함! 이런 특별한 경험을 가진 이들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설교 속에서 마음껏 회의하고 방황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한때 그가 그 학교의 설교학 교수라는 것만으로, 합동신학대학원에 가고 싶었을 정도였다)욕심 내어 바라기는, 각기 다른 출판사로 흩어진 그의 저작이 언젠가 전집의 형태로 가지런히 선보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번엔 '선집'으로 만족하련다. 잘 만들었다. 일부 내용을 원래의 설교집과 비교하여 보았는데, 발췌만 한 것이 아니라(발췌도 세심히 잘했다) 잘 다듬기까지 했다. 이런 책은, 독자로서 참으로 고맙다. 





5. 고든 맥도널드의 '불후의 명작'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의 목회자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이번에는 리더십에 다분히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대상이 목회자라는 점(그런데 표지만 봐서는 목회 리더십이 아닌 보편적 리더십을 다루는 책처럼 보인다. 출판사 입장에선 마케팅이고, 독자 입장에선 함정이다!), 그리고 칼럼 모음집이라는 점에서 독자 대상과 본문의 밀도는 다소 아쉽다. 또한 교회 성장을 다루는 부분도 개인적으로 불만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들이 좋다. 나는 사실 리더십을 다루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좋다. 거의 비슷한, 원론에 가까운 격려와 조언이라 할지라도 누가 하냐에 따라 '선생'이 되기도 하고, '꼰대'가 되기도 한다. 그는 속깊은 사람이되 지극히 솔직한 사람이다. 그의 사려 깊음은, 아마 그 내면의 깊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 솔직함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조언들로 이어진다. 어떤 부분은 목회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리더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실제적인 도움이 되기도 한다. '좋아하는' 목회자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생각보다 그런 책은 많지 않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될 영혼을 형성시키는 작업은 그리스도인 리더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이는 부록도 아니고, 선택 사항도 아니고, 3순위에 있는 일도 아니다. 이러한 핵심적인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평생 리더십의 자리에 있지는 못하거나, 그가 이룬 업적도 하나님의 영광이나 하나님의 뜻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질 것이 거의 확실하다."(25-26면)


"나는 인생의 암울한 순간들을 모두 연결시켜 보면서,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내게 주실 메시지가 있었음을 본다. 이제서야 나는 순례자가 강을 건넜을 때 했던 말을 할 수 있다. '나는 바닥을 쳤지만, 그것이 타당합니다.'"(30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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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하는 정신_체념과 물러섬의 대사 몽테뉴(슈테판 츠바이크 지음|안인희 옮김|유유2012)

박맹호 자서전_책(박맹호 지음|민음사|2012)

2013 이상문학상 작품집_김애란 <침묵의 미래> 외(김애란 외 지음|문학사상|2013)

2013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_김숨 <그 밤의 경숙> 외(김숨 외 지음|현대문학|2012)

묻고 답하다(강영안, 양희송 지음|홍성사|2012)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창세기에서 배웠다(마르바 던 지음|김순현 옮김|IVP|2013)

복음과상황 2013년 2월호_박근혜 시대와 개신교의 역할






1. 내 나이 마흔. 이제 몽테뉴의 시대가 온 것일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직도 섣부른 희망일 뿐인가? 어찌 되었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위로받았고 격려받았다. 책으로 맛본 간만의 '힐링'이었다. 자유롭고도 흔들림 없는 그의 사색은, 뛰어난 전기 작가 츠바이크에 의해 단단한 성찰의 텍스트로 전해진다. "작은 장소에 묶여 있는 사람은 작은 근심에 빠진다." 한편, 나의 세상에 직면하되 스스로를 세상의 격동에서 지켜내고, 자유로운 인문주의자로 살고자 했던 몽테뉴의 삶과 사상은, 또다른 격동의 세월에 휘말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츠바이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작가 츠바이크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을 떠나 남아메리카로 망명을 가고, 그곳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츠바이크는 몽테뉴를 스승으로 삼되, 그토록 갈망하던 스승의 자유에 왜 이르지 못했을까? 그렇다면, 몽테뉴의 '위로하는 정신'은, 나를 구원할 것인가? 아마 츠바이크는 그것을 기대할 것이나, 두고 볼 일이다. 


"자신을 책으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이유에 대해 몽테뉴는 '그 다양한 내용을 읽는 것이 나의 생각하는 능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 판단력이 기억을 동원하여 일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자신을 자극해서 거기에 대답하도록, 자신의 의견을 말하도록 이끌고, 그래서 몽테뉴는 책에 메모하고, 줄을 긋고, 마지막에는 책을 다 읽은 날짜와 그 책이 자기에게 준 인상을 적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비판도 아니었고 문필 작업도 아니었으며, 그냥 연필을 손에 잡고 하는 대화였다."(93-94면)

"몽테뉴가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110면)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 살기 시작한다."(102면)

"세상일에 신경 쓰지 마라. 네 안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을 구원하라. 다른 사람들이 파괴하는 동안 건설하고, 이 광기 한가운데서 너 자신을 위해 분별을 지키도록 노력해라. 너 자신을 잠가라. 너 자신의 세계를 세워라."(127면)


2. 박맹호 자서전은 기실 민음사의 이야기이며, 한국 출판사의 현대사다. 솔직히 출판계 혹은 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 재밌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 또한 그들에게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나, 그 어둔 그늘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다소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사료로서의 가치, 그 사료에서 파생되는 여러 에피소드는 새겨 볼 만한 대목이 제법 있다(이 부분엔 대해선, 앞 부분의 정은숙의 추천사가 정리를 잘 해놓았다)

  나의 이십 대까지만 해도 민음사는 최고의 출판사였다.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콘텐츠는 물론, 판형과 디자인에서도 발군이었다. 민음사의 텍스트는 늘 신뢰할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특히 민음사의 고집스런 디자인 감각은, 이제 좀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으며, '회장님 시대'는 이 책으로 그만 접는 것이 어떨까 생각했다. 무엇보다 민음사를 위해서.     

















3. 이상문학상과 현대문학상 작품집을 읽었다. 새해에 놓치지 말아야 할 즐거움이다. 김애란의 빛나는 성취가 질주한다. 아직 절정에 다다르지 않았을, 그럼에도 소설이란 장르마저 허물어뜨리는 그의 미학적 성취가 그저 경이롭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선 김애란을 열외로 하면, 개인적으론 편혜영의 작품에 깊은 애정이 갔다. 

  그리고 소설가 김숨의 발견. 갈팡지팡하는 위태로운 존재, 소설 속 '경숙'에 깊은 연민을 가진다. 그 연민은 오늘 우리, 그리고 나를 향한 작가의 아득한 위로로 느껴진다. 혼란스럽게 시시각각 변하는 경숙의 시선 배후에 흐르는 일관된 위태로움, 불안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존재가 아슬하다. 경숙으로 인해 나도 위태롭다는 사실을 직면한다. 작가에게 새삼 고맙고, 이런 작가를 알게해준 현대문학상도 고맙다.  

  사족 몇 가지. 이상문학상 작품집, 참 잘 만든다. 수상 작품 및 작가에 대한 정성과 자부심이 돋보인다. 1쇄를 1월 18일에 찍었는데, 내가 가진 건 벌써 5쇄다. 김애란의 힘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집의 힘이기도 하다. 반면, 현대문학상 작품집은 90년대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보는 것 같아 무척 아쉽다. 작품의 수준이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4. 일반 출판계에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은, 기독 출판사의 책이 홍성사엔 있다. 물론 그들의 책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간혹 그렇게 빛나는 책들을, 꾸준히 만들어 내는 내공을 칭찬해주고 싶다. 이 책이 그러하다. 비록, 왜 4년이나 걸렸을까 하는 의문이 있기도 하지만(시의성이 가장 중요한 대담집이 4년만에 나오다니!), 잘 만든 좋은 책이다. 

  강영안은 개혁주의 신학에 뿌리박은 인문주의자다. 가끔 그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깊고도 단단한 신학적,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대중 언어로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하고는 했다. 그런 그가, 탁월한 대중 기획자인 양희송을 만나 빛나는 책을 만들었다.    




5. 마르바 던을 좋아한다. 피터슨 만큼의 깊이를 가졌으되, 피터슨 만큼의 매력적인 언어는 갖지 못한 까닭에 그의 책이 피터슨 만큼 팔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허나 피터슨도 나의 기대 만큼 많이 팔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피터슨과 비교하여 아쉬울 뿐, 피터슨에 비견할 만한 작가라는 점은 그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마르바 던 최고의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상당히 수준 있는 통찰을 제시하는 수작이다. 창세기 1-3장을 통해, 인간 본연의 정체성, 세상의 본질, 악과 정의 문제, 관계의 문제 등을 두루 살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출판사가 책에 대한 과도한 욕심을 품은 것은 아닌가 한다. 제목과 표지, 내지 디자인 등에서 조금 오버했다는 느낌이다. 만약, 시즌을 여는 '에이스'로 이 책을 밀려고 했던 것이라면, 판단 착오가 아닐까 싶다. 난 모름지기 책은, 그 텍스트 수준을 정확히 반영하는 '옷'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번역서의 경우, 저자의 진심이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며칠 전에 썼던 인상 비평. 


"실제로 보니까 예쁘더라. 하지만 실제로 보면, 가격이 너무 비싸 보이더라. (딜레마다. 실제로 봐야 예쁜데, 실제로 보면 무지 비싸 보인다.) 더듬더듬 읽었을 뿐이지만, 잘 읽힌다. 특히 경어체, 좋다! 그런데 제목은 던한테 양해를 구했는지 궁금하다("이 책의 제목을 '내가 기독교 신앙을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창세기 1-3장에서 배웠다'로 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리하면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지 못하고 우리에게 맞출 것 같았습니다.", 207면). 결국 저자의 바램을 거스르는 제목 아닌가?" 


6. 나는 개념과 범위에 있어, "복음주의"란 바운더리 만큼 모호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여 "복음주의"란 단어를 이제 그만 버릴 때가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그저 순전한 기독교, 순전한 복음이면 충분하다. 복음은, 오롯이 그 복음이 처한 상황 속에서 구현되는 것으로, 그것으로 그 순전함을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복음과상황"의 가야 할 길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독립언론 "복음과상황"의 건재는 매번 경이롭다. 1월호를 읽으며, 우리에게 이만열 같은 어르신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감사했다. 김은석 기자의 유작(?) 기사가 마음을 흔들었다. 기자의 향후 행보를 위해 기도한다. 아쉬운 점도 있다. 디자인, 아쉽다. 표지는 시의성을 주목하되 복상의 메시지가 직유적이되, 좀 더 세련되게 앉혀졌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표지는 호감이 가야 한다! 젊은 감각의 발칙한 기사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런 아쉬움을 토로하기 전에, 나부터 더 잘 써야겠다는 다짐이 먼저다. 쓰다보니 염치가 없어, 급히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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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기다모리 가죠 지음|박석규 옮김|양서각|1987)

교회 3.0_본질과 사명을 되찾는 교회의 재탄생(닐 콜 지음|안정임 옮김|스텝스톤|2012)

하나님은 복으로 장사하지 않으신다(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 지음|최요한 옮김|홍성사2012)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존 러스킨 지음|김석희 옮김|열린책들|2009)

청춘을 읽는다_강상중의 청춘 독서노트(강상중 지음|이목 옮김|돌베개|2009)

다카페 일기 3_행복이란 분명 이런 것(모리 유지 지음|권남희 옮김|북스코프|2012)






1. 독서 노트의 규칙에 대한 사족


출판사를 그만 두고 나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신간을 접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증정 받는 책도, 신간을 직접 접하는 경우도 줄었다(신간 정보는 여전히 온라인을 통해 많이 입수한다. 로쟈 같은 서평가, 알라딘 박태근 MD 등이 글, 주요 매체에서 소개하는 시간을 우선 접한다. 그리고 주요 출판사와 각 온라인 서점의 주간 신간을 '직접' 살펴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MD를 믿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 분야 MD들의 선택은 사뭇 절망적이다. 그냥 매일 올라오는 신간 목록을 살피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가장 아쉬운 것은 실물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매번 서점에 나가기도 그렇고, 도서관에 가서도 최신간은 만나기 쉽지 않은 까닭이다)


때문에, 독서 노트 방식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직접 구입하거나 빌려 읽은 책이 제일 먼저, 그다음 각 출판사에서 리뷰 용으로 보내주는 '소수' 신간을('증정용' 책도 좋은 책만 소개한다는 것이 나의 철칙!), 그리고 그간 이미 읽고 소유하던 책 중에 최근 다시 리뷰한 '오래된 책'을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어쩌면, 그것이 좀 더 고급 정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란 확신으로 위안을 삼는다)


2.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책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그 목록에 이 책을 포함시킬 것이다. 로이드 존스에 한참 빠져있던 1992년 봄, 당시 나의 지도 목사님이 선물하신 책이다. 근본주의 교회의 청교도적 전통에 길들여진 나에게 기다모리 가죠의 신학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일본에서 발발했던 전쟁의 참혹한 비극을 성찰했던 기다모리는, 신학의 본질에서도 그 현실의 리얼리티를 찾으려 한다. 그는 루터의 신학을 따라,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투쟁의 절정이 곧 구원이었다고 말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아픔을 통하여 우리의 아픔을 해결해주신다고 보았다. 어떤 이들은 기다모리의 신학이 서구 신학이 간과했던 부분을 보완하는 측면은 있으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우위에 두는 것은 오류에 가깝다고 비판한다(심지어, 하나님의 아픔을 강조했던 초대교회의 수난설이 이단으로 정죄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간혹 시대의 비극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에 대해, 적어도 난 이해되지 않는 신비의 영역이 있다. 온갖 불의와 비극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을 무엇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난감하다. 지금껏, 나에게 가장 유력한 해석의 틀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이다. 기다리모의 신학은 다른 무엇보다 실존적이다. 최근 이 책을 자주 꺼내어 읽는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는 지금 이 땅의 현실, 그리고 나의 현실에 대한 물음 때문이다. 물음에 대한 응답은 "이해되지 않는 신비의 영역을 그대도 두라. 누구보다 그분이 아프시다."이며, 나의 적용점은, 그리하여 그 아픔에 동참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이미 오래 전에 절판이다. 이 책보단 못하지만, 비슷한 책으로 <아픔의 신학>(신준호 지음/한들)이 있다. 기다모리가 주로 신론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조직신학적인 완성도를 높이려고 했다. 





3. <교회 3.0>. 이 책의 부제는 "본질과 사명을 되찾는 교회의 재탄생"이다. 거듭남의 산물이 교회이어야 하고, 그것이 결국 본질이고 사명일 텐데 제목은 왜 "교회 3.0"인가? 이 대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여태 거들떠보지 않았다(하긴 그런 면에서 "교회 2.0"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언제나 "교회 0.0"으로의 회귀이어야 한다. 그런데 난 다음주 교회 2.0 워크숍에 간다. 흠!). 저자는 교회 1.0을 '단순하고 가족적이지만 닫혀 있는 초대교회', 교회 2.0을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조직화/제도화된 교회', 교회 3.0은 '본질이 아니면 무엇이든 해체할 수 있는 유기적 교회'로 정의한다(이런 분류도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초대교회의 닫힌 문은, 한편 철저한 제자도의 실현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회 3.0의 속성은 이미 교회 1.0 즉 초대교회의 것이기도 했다)이 책의 전제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마음이 들지 않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여러 매력적인 유익이 있다. 아니 앞서 말한 몇 가지만 빼면 버릴 것이 없는 책이다. 저자의 핵심 주장은 결국 "유기적 공동체의 실현"에 있다. 특히 3부의 "유기적 교회의 실제적 문제"는 매우 유익했다. 무엇보다 좋은 질문과 고민거리를 풍성하게 던져주는 좋은 책이다.


4. 유진 피터슨이 조너선 윌슨하트그로브를 믿으라 했다. 그래서 읽었고 흡족하다. 피터슨에 이어, 박삼종 님의 추천사면 이 책이 얼마나 좋은 책인지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과유불급!(내가 무지 좋아하는 박기호 신부님의 추천사도 있지만, 이번만은 박삼종 님의 승!)


"정사와 권세들은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꺼린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들을 만나면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다. 정사와 권세는 그럴듯한 환상을 들이밀어 사람들을 조종하고 지배한다. 우리에게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이 빈곤하다면 제국이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는 증거다. 현재 한국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선물의 경제’라는 예언자적 상상력이다결혼, 출산, 육아, 교육, 의료, 먹을거리, 거주, 의료복지 등을 하나님 나라 선물의 경제에 기초해 자본의 욕망과 질서에서 놓음 받은 주체적인 벗-동무들의 연대다. 저자는 《하나님은 복으로 장사하지 않는다》에서 ‘하나님 나라 선물의 경제’를 말하고 있다. 이 경제는 경제학의 근본 전제인 희소성의 법칙을 부정함으로써 모든 경제 제도를 돌려세운다. 그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꿈꾸는 불온한 예수 혁명주의자들의 우정의 공동체에 이 책을 권한다."_박삼종(평화의마을공동체 대표사역자)


5. "이 책을 읽고 변호사 간디는 마하트마 간디가 되었다. 버나드 쇼는 가장 혁명적인 인물로 마르크스 대신에 이 책의 저자를 지목했고, 르 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세대 전체가 '그의 훈육 아래 놓여 있었다'고 고백했다. 윌리엄 모리스는 그의 책을 만들며 그의 사상이 구현된 세계를 그리워했고, 최초로 의회에 진출한 영국 노동당 의원들은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책으로 이 책을 꼽았다." 존 러스킨의 책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나라에선 찬밥이다. 우리나라의 수준을 말해준다. 러스킨의 생애와 사상을 조망한 옮긴이의 친절한 해설이 유익하다. 러스킨은 기존 경제학이 '너무도 우발적이고 교란적인 요소'여서 논의에서 배제한 '애정'이야말로 경제학 최대의 변수라고 역설한다. '생명'을 가치의 유일한 척도로 놓는 그의 경제론에서는 정직, 도덕, 정의 등 인간의 정신적 가치들이 더 중시된다. 무엇보다 경제학 책이 이러 좋은 문장들로 쓰여도 되는 것인지, 읽는 재미가 가득하다. 느린걸음에서 2007년도에 출간되었으나, 열린책들에서 2009년도에 다시 출간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잘 팔리지 않는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이 '명저'를 만드시 손에 넣길 바란다


6. <하나님은 복으로 장사하지 않는다>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사실 "복음과상황"에 쓰려고 읽었는데, 아쉽게도 그러하지 못했다. 



















7. 강상중은 나의 선생이다. <고민하는 힘>과 지난 번에 소개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모두 좋은 책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바로 이 책, <청춘을 읽는다>이다. 선생 강상중이 청춘을 견뎌내며 투쟁했던 사유의 흔적들인 까닭이다. 나에게도 청년 시절 끙끙대며 읽었던 책들이 있고, 당시 투쟁하듯 정리해 나갔단 사유의 노트가 있다. 강상중이 무엇보다 부러운 것은, 그의 청춘 노트는 장황한 독서 편력의 지적 위용을 자랑하는데 있는 것이 아닌, 그의 성장사와 더불어 한 시대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에 있다. 로쟈 이현우의 해제가 부록으로 실렸다(!). 


8. 맥락상 다소 생뚱 맞은 책으로 마무리한다. 난 종종 '이런 책'에 더 오래 머문다'머문다.'는 나에게 있어 최고의 독서를 표현할 때 쓰는 표현이다. 하루하루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일상이 벌써 10년의 세월이 되었고, 세 번째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나는 RSS 기능을 통해, 그의 블로그 사진을 구독하지만 책으로 엮어나온 사진을 보는 감흥은 또다른 결의 즐거움이 된다. 모리풍과 다짱 부부는 우리 부부와 동갑이다. 마치 친구같은 책이다. 책에 머물며 친구 집에서, 친구의 사소한 일상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맛본다. 정말이지 "행복은, 분명 이런 것"이다.    


















(ⓒ다카페 일기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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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공부_내 삶의 기초를 다지는 인문학 공부법(윌리엄 암스트롱 지음|윤지산 외 옮김|유유2012년)

책 홀림길에서_헌책 안에서 새로 살다(최종규 지음|텍스트|2009년)

훔쳐가는 노래_창비시선 349(진은영 지음|창비|2012년)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김승희 지음, 김점선 그림|마음산책|2007년)

살아야 하는 이유(강상중 지음|송태욱 옮김|사계절|2012년)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수잔 브라이슨 지음|여성주의 번역모임 '고픈' 옮김|인향|2003년)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최장집 지음|폴리테이아|2012년)

회심의 변질_초대교회의 회심을 돌아보다(알렌 크라이더 지음|박삼종 외 옮김|대장간|2012년)

당신들의 기독교_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김영민 지음|글항아리|2012년)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크레이그 블룸버그|IVP|2012년)

불멸의 지휘자(안동림 지음|웅진지식하우스|2009년)




















1. <단단한 공부>는 독서법에 대한 자료를 모으던 중 눈길이 갔던 책이다. 성공에 이르는 쉬운 공부법을 말해야 잘 팔리는 세상에, 도리어 이 책은 공부엔 왕도가 없다고 선언한다(21면). 공부는 단단해야 한단다. "공부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공부가 불쾌하고 부담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공부를 '들판에 있는 짐승'과 차별화하는 최고의 재능을 이끌어 내기 위한 건설적이고 헌신적인 힘으로 여기는 것이다."(서문, 19면) 따라서 공부법은 어린아이나 청소년, 대학생들만의 것이 아니다. 평생 인간다운 존재가 되기 위한 열정과 헌신이어야 한다. 인문학의 어원이 '인간다움(후마니타스)'이라 할 때, 이 책은 제대로된 '인문학 공부법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공부하기 위한 사소하고 섬세한 도움도 받을 수 있으며(특히 4장의 독서법과 8장의 글 쓰는 법은 매우 유용하다.), 무엇보다 공부에 대한 용기를 얻게 된다는데 큰 유익이 있다. 공부를 해야만 할 것 같고, 공부를 기꺼이 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2. 최종규의 책은 모름지기 헌책방에서 사야한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이 책은 지난 10일 신촌의 "숨어있는 책"에서 샀다.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대표 기자는 최종규를 이렇게 말한다. "아스팔트를 달리면서도 그 아래에 있는 흙을 생각한다는 그는 '지독한' 사람이다. 너무 지족해서 너무 멋진 사람." 최종규는 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책은 헌책방을 다니며 만난 91권의 책에 대한 연서이다. 그러나 책에 관한 책이라고 부르기엔, 뭔가 부족하다. 그는 "책은 종이 안팎에 두루 있다"고 적는다. 책은 그에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책 읽기는 사람 읽기이며, 삶 읽기이다. "사랑하는 만큼 읽기를 하면서, 아끼는 대로 쓰기를 이어갈 것"이란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내내, 조바심 내며 사는 나의 가슴은 고즈넉한 위로를 받는다. 새삼 그가 고맙다. 


3. 진은영 시인의 <훔쳐가는 노래>는 "시사인"이 선정한 시 부분 올해의 책이다(추천위원 부문). 함돈균 교수는 선정의 변을 이렇게 말한다. "요약컨대 이 시집은 정치도 문학도, 삶도 예술도, 행동도 사유도, 시민과 시인의 그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실험의 산물이다."("시사인 행복한 책꽂이", 41면) 그리고 심보선은 시집의 뒷표지에 이렇게 썼다. "만약 가난한 시민들과 슬픈 시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있다면, 그들이 진은영의 단어들을 작은 돌처럼 주머니 안에 넣고 다닌다면, 가끔 그것들을 꺼내 양식으로 삼을 수 있다면, 장담컨대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하루에 한 편씩만 읊조릴 각오, 이 시집을 대하는 나의 자세이다



















4. 지난 12월 19일 이후 김승희의 책을 찾아 내 서가를 샅샅이 살폈는데 찾지 못했다. 그러다 잠시 잊었는데,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만나 다시 가져왔다. 아마 이 책은 나의 서가에 두 권이 되었을 것이다(찾지 못한 책을 찾는다면). 시인 김승희의 수필집이다. 희망이 필요한 사람에게 힘내라고 말하고 싶을 때, 긴요할 것이다. 한 권은 나를 위해 남겨두고, 다른 한 권은 언젠가 긴 절망에 빠진 그이를 위해 준비해 놓겠다. "그래도라는 섬에서/그래도 부등켜안고/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5. 강상중의 책은 오래 전 사두었다가 이제서야 갈무리했다. <고민하는 힘>과 비슷한 느낌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입사할 때부터 떠날 생각을 했고, 떠날 각오를 갖고 투쟁하듯 일했는데, 그럼에도 막상 떠난 후 몰려드는 피로감, 허무함, 좌절감은 어찌해야 하는지 몰랐다. 강상중은 윌리엄 제임스를 인용하며, '건전한 마음'으로 보통의 일생을 끝내는 것보단,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사는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121면). 강상중의 텍스트를 읽는 내내 고개 끄덕이며 공감했지만, 그것과 만나는 나의 삶의 해법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그렇다.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난 그것에 쉬이 동의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텍스트는 여타 다른 위로의 책과는 결이 다르다. 깊고 곧고 단단하다. 


6. 민주주의 논거의 중심엔 언제나 최장집이 있다. 이 책은, 그 논거의 면면들을 사려 깊게 들여다 본다. 그래서 아프고 속상하다.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글들 중심으로 엮었다. 책의 완성도는 많이 아쉽다(그럼에도 난 그의 사인본. 그걸로 됐다!). 


7. 수잔 브라이슨의 책은 지난 달 CBS 신동주 PD님의 추천으로 읽었다. 마침 헌책방에서 이 책을 다시 발견하고 한 권 더 사둔다. 선물할 거다. 다음은 페이스북에 썼던 글. 


"수잔 브라이슨의 책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를 단숨에 읽었다.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했던 끔찍한 성폭력의 '트라우마'를 극복해 나가는 저자의 지난한 과정을 마음 조리며 읽어갔다. 이 책은 무엇보다 '이야기'와 '관계'로 규정되는 '나'의 존재론에 대해 또다른 성찰과 통찰을 갖게한다. 이제 난, 누군가의 고백을 들으며, '이제 그 트라우마에서 좀 벗어나렴'이란 말, 쉽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단순한 사실은 절망스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희망이기도 하다. 절대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기 때문이다." 


8. 서평 쓰기 위해 읽었던 책은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읽고나니 서평을 쓰고 싶었던 책은 <회심의 변질>과 <당신들의 기독교>. 크레이그 블룸버그의 책엔 찬사와 아쉬움이 두루 남는다. 그의 책을 제대로 읽되 그 한계를 정확히 인지할 때, 우리에겐 희망이 있을 것이다. 알렌 크라이더와 김영민의 책은, 절망이란 단어를 너무 쉽게 말하는 우리의 감수성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우리는 아직 충분히 절망하지 않았으며 제대로된 희망도 아직 갖지 못했다. 이 책들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서평 씉 잡지들이 나온 다음에. 


9. 안동림의 책은 헌책방에서 발견하여 일단 사둔다. 즉 사치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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