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는가 스피노자의 길과 라이프니츠의 길이 있다. 당대에 이단아로 정죄받았으나 결국 철학의 본령을 차지한 스피노자와 철학마저 정치적 처세의 수단으로 삼아 승승장구했으나 결국 그 무엇도 되지못한 라이프니츠. 이 책은 작가적 상상력으로 재탄생한 그들의 평전이다. 내가 유럽의 영화감독이었다면, 이 책을 원작 삼아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흥미진진한 한편의 드라마이면서도 철학적, 역사적 통찰이 가득한 책이다. 출간된 직후 사서 읽었는데, '반값'이란다. 억울하고도 반가운 마음에 메모를 남겨둔다.
"실제로 17세기의 위대한 그 두 명의 철학자들은 아직도 극복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며, 아마도 그들은 근대적인 사유를 탄생시킨 쌍둥이 창시자들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피노자와 그의 철학 속에 기록된 모든 것들에 대한 반응으로 정의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반응 가운데 홀란트에서 돌아온 후에 라이프니츠가 오랜 세월 발전시킨 철학보다 더 강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오늘날에도, 헤이그에서 만났던 그 두 사람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리고 암묵적으로는 이미 선택하고 있는 두 개의 선택지를 각기 대표하고 있다."(프롤로그, 21면)
4.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이 책은 복음의 통전성에 대한 집요한 해명이다. 복음은 세상-공동체-개인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실현시킨다. 스캇 맥나이트는 역사적 예수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면서도 뛰어난 작가적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우리나라엔 그의 책이 많이 소개되지 않았는데 주목할 만한 학자다(IVP에서 번역된 <금식>을 추천한다). 이 책의 가치는 다음주에 짧은 리뷰를 써서 한 매체에 기고할 예정이므로, 제목과 표지에 대한 사소한 불만은 언젠가 적은 적이 있으므로, 여기선 이 정도만 하자.
"종말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의 완벽한 결말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기 위해 종말을 알아야 한다."(83면)
"복음은 삼위일체적이며 상호 위격적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며, 이 하나님의 본질이 곧 공동체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에이콘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관계를 맺도록 지음 받았다.(91면)
"배제는 너무나도 교묘해서 미로슬라브 볼프가 정의한 것처럼, '모든 곳에 침투해 있는 소소한 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다시 말해 배제는 하찮은 죄로부터 구조적인 악에 이르기까지, 작은 거짓말에서 조국을 배반하는 행위까지, 가난한 이들에게 작은 것을 나눠 주기를 거부하는 개인의 모습부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음식을 빼앗아 소수 특권층을 위한 대저택으로 바꾸어 놓는 독재자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171면)
"모든 비극에 대한 희망은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희극이다."(178면)
"너무나 자주, 정말이지 너무나도 자주 교회는 무의식적으로 누가 내부자이고 누가 외부자인지를 나눈다. 그러나 포용의 은혜를 구현하는 참된 신앙 공동체는, 복음이 말 그대로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202면)
"세상에서 시작해 공동체와 개인으로 나아가는 것은 개인주의적이라기보다 에이콘적인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에이콘인 인간에서 시작해 복음의 의도를 그 인간을 회복하는 것으로 본다면, 통전적인 관점에서 복음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204면)
5. 단단한 진리 필립 얀시의 책이 출판사를 바꿔가며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이고 있는데, 우선 반갑다. 그의 몇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였으나, 그것으론 부족하다. 우리나라에서 얀시는 아직 충분히 주목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무식하게 나눠 '저자'와 '작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무식한 구분법에 의하면, 나에게 필립 얀시, 프레드릭 뷰크너, 유진 피터슨 등은 작가이다. 그렇다고 저자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콘텐츠로 승부하는 저자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를 뛰어난 서사와 문체로 전하는 작가도 있어야 한다. 대중은 작가에게 환호한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기독 출판계엔 작가가 거의 없거나 드물다. 아무튼.)
이 책은, 그의 에세이 13편이 실린 글모음집이다. '필립 얀시 입문서'로 제격이다. 저널리스트로서 수준 높은 그의 에세이를 만날 수 있다.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에서도 그의 유려한 글솜씨를 경험할 수 있지만, 그의 글쓰기는 서사적 구조에서 더욱 그 가치를 발한다는 면에서 이 책은 충분하지 못하다. 무엇보다 얀시의 책에서 제일 맛있는 것은 글맛이다. 또한 일부 에세이는 그 시의성이나 적합성 면에서 우리나라와 사뭇 다른 맥락을 가진다(특히 9장 "복음주의자란 누구인가?").
무엇보다 최종훈의 번역이다. 출판사들은, 최종훈 번역에는 반드시 "번역 후기"를 포함하길 바란라. 그는 믿을 만한 번역가이면서도, 뛰어난 글쟁이다. <기도_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길>에서처럼, 이 책에서도 최종훈의 번역 후기는 그 자체로 반짝반짝거린다. 최종훈의 글을 일부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이 책 역시 철저하게 '얀시 공식'을 따른다. 고통, 윤리, 도덕, 오늘날의 첨단 과학, 복음주의, 구호 활동, 예술 따위의 거대하고 사변적인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일관된 논리를 지켜간다. 하나님이 애초에 그리셨던 밑그림을 더듬어보고 거기에 오늘의 현실을 비교하며 어떻게 그 간극을 좁혀갈지 이야기하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잔뜩 불신만 키워놓고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는 무책임한 행태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독자들을 이끌고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 신학자들의 해석을 두루 섭렵한다. 동서양을 오가고 시대를 종횡무진 뛰어넘는다. 유대인 랍비의 해석과 소설가 프레드릭 뷰크너의 접근을 나란히 비교하고, C. S. 루이스의 회의와 도로시 세이어즈의 판단을 대조하며, 바흐와 멘델스존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역자로서는 곤란한 노릇이다."
"민감한 사안들을 다루지만 얀시의 손가락은 현실에 매몰된 현대인이나 교리의 한계에 갇힌 크리스천을 비난하는 데 사용되는 법이 없다. 같은 처지에서 동일한 고민을 품고 살았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은 뒤에도 여전히 불투명한 결론을 붙들고 씨름하는 동료 인간의 입장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어렴풋이 보이는 목적지 방향을 가리켜 보이는 데 쓰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