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자유다(수전 손택 지음|홍한별 옮김|이후2007)

움베르트 에코의 문학 강의(움베르트 에코 지음|김운찬|열린책들2005)

독서의 알레고리(폴 드 만 지음|이창남 옮김|문학과지성사|2010)

소설과 소설가(오르한 파묵 지음|이난아 옮김|민음사|2012)







1. 언젠가 했던 이야기다. 스물아홉에 신학교를 그만 두었고, 서른아홉에 출판사를 그만 두었다. 신학을 공부하는 기쁨은 인생 최고의 희열에 가까웠으나, 신학이 거하는 자리는 자못 절망스러웠던 까닭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나의 세상과 삶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던 그즈음, 난 신학교를 떠나기로 결정했고 출판사에 들어갔다. 사유의 체계가 되어주었던 책들, 그리고 선생들을 찾아나선 것이다. 특히 그곳은 '문서운동'이란 이름으로 나의 의지를 한껏 발휘할 수 있었고 삼십 대의 전부를 그곳에서 보냈다. 하지만 작년에 결국 그곳도 떠나야 했다. 떠난 이유는 여기에 미처 다 적을 수 없으나,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책 읽기에 대한 좌절 때문이었다. 책 읽는 것, 책 읽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회의가 책을 만드는 나에겐, 스물아홉에 경험했던 그 절망과 비슷하였던 까닭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다시 숱한 밤을 책을 읽으며 지낸다. 글을 쓰고 있다. 그 글은, 책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오늘 독서 노트는 그 물음의 과정을 일부 기록한 것이다. 아직 나의 물음은 답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런 책들이 어떤 희망의 단초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2. 문학은 자유다  수전 손택은 소설가이자 에세이 작가, 예술 평론가이다. 또한 그녀는 '열렬한 실천가'였다. 한국에 방문하여 구속 문인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하였고, 전쟁 중인 사라예보에서 연극 <고독를 기다리며>를 공연하였으며, '9.11' 이후 미국 정부의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저항하였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거짓 이미지와 뒤틀린 진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사상의 자유를 굳건히 수호해 왔다'는 찬사를 받으며 독일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으로, 탄탄한 논리를 담보하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단호한 문장 속에 담아내는 그녀의 글쓰기를 무척 좋아한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이 책의 제호이면서 수록된 에세이 중 하나인 "문학은 자유다"는 <타인의 고통>의 부록으로 이미 읽었고, 여러 글모음집이어서 굳이 소장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내가 옮겨놓은 문장만 해도, 원고지 80매 가까이 된다. 결국엔 이 책도 구입해야 했다. 소장할 만한 책이다. 특히 소설가, 번역가, 독자를 비롯한 문학을 희망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손택의 입문서로 <타인의 고통>을, 그녀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책으로 이 책 <문학은 자유다>를 추천하고 싶다. 


손택은 2004년 12월, 생을 마감했다. 이 책은 2007년 발간되었고 서문을 그녀의 아들인 데이비드 리프가 썼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여러 문학 평론을 모았다. 세 번째 실린 에세이 "도스또옙스끼를 사랑하다"는 나의 통념에 거세게 도전하는 질문을 던지는 오래 간직하고픈 아름다운 글이다.   


도스또옙스키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사랑하는 유대인은) 도스또옙스키가 유대인을 증오했다는 사실을 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 속에서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그렇게 민감한 사람, 능멸당하고 상처 받은 사람을 열렬히 옹호했던 사람"이 증오에 가득차 유대인을 혐오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유대인들이 도스또옙스키에게 특히 끌리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도스또옙스키를 사랑하다, 61-62면)


이 대목에서 난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레 미제라블>에 대한 서경식 선생의 칼럼이 생각났다. 


으음,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초인처럼 완강하고 성인처럼 선량한 주인공의 활약과 가난한 매춘부의 유복자로 빛나듯 사랑스런 코제트의 행복한 연애 등 요컨대 전체적으로 ‘판타지’ 같은 얘기다. 원작자인 위고 자신이 사회변혁보다 종교적 자선의식 경향이 강하고, 강고한 애국주의자이며 공화주의자였다. 원래 엥겔스는 이런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완전히 빠져 있는 사실이 있는데,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는 그때 시작됐다. 자유주의 혁명과 식민지주의는 그들에게 모순 없이 양립하고 있었다. 근대의 양면성이며 기만성이다.


2부 "미국의 야만성"은 손택의 여러 정치 비평을 담았으며, 저항하며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손택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다소 다른 글과의 맥락에 상관없어 보이는 에세이 "사진에 관한 짧은 요약"이 실려 있는데, 마치 나를 위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책인 <타인의 고통><사진에 대하여>의 '코다'라고 할 만하다.   


사진은 첫째로, 보는 방식이다. 보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사진에 관한 짧은 요약, 173면)


3부 "투쟁하는 독자"는 예루살렘상, 오스카 로메로상, 독일 서적출판조합 평화상 등의 수상 연설과 나딘 고디머 등에서의 강연 원고를 담았다. 그녀의 문학이 세상을 향하여 발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 연설들을 읽으며 짐작할 수 있다. 그녀 스스로 빛나는 작가였지만, 그보다 먼저 투쟁하는 독자로서 존재했던 손택의 정체성이 잘 담겨 있다.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고, 읽으면서도 자주 멈춰야 했다. 특히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은 통째로 외우고픈 무모한 욕심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문학은 자의식이고, 회의고, 양심의 거리낌이고, 깐깐함입니다. 또한 노래고, 자발성이고, 환희입니다.(203면) 


문학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열망들에 뿌리박은 실천이기 때문입니다.(203면)


작가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일은 의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과 그릇된 정보의 공모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문학은 단순하게 만들려는 목소리에 반대하는 뉘앙스와 모순의 집입니다. 작가가 할 일은 정신적 약탈자의 말을 믿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작가가 할 일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러 가지 다른 주장과 파편과 경험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206면)


롤랑 바르트가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말하는 사람은 쓰는 사람과 다르고,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와 다르다."(207-208면)


문학은 정신적 여행입니다. 과거로, 그리고 다른 나라로의 여행. 또한 문학은 더 나은 기준에 바탕한 현실의 비판입니다.(239면)


문학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경건함에 질문을 던지고 반대 진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268면)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독서와 내성內省의 가치가 끈질기게 위협받는 요즈음, 더더욱 문학은 자유입니다.(274면)


3부의 두 번째 에세이는 문학 번역에 대한 글이다. 꼭 '문학'으로 한정 짓지 않아도 상관없다. 번역에 관한 히에로니무스와 슐라이어마허의 견해가 있다. 달리 말하면, 정확성과 충실성의 역할에 대한 오랜 논쟁이다. 손택도 그러하지만, 나도 슐라이어마허의 편에 서련다. 번역에 관한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있지만, 번역가로 입문하려는 이들에게(혹은 번역에 관심있는 나같은 독자들에게도) 이 짧은 에세이는 매우 유익할 것이다. 


"번역의 목표를 원작자가 번역 대상 언어로 글을 쓴 것처럼 만드는 것에 두는 것은 이룰 수 없는 목표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무효다."(슐라이어마허, 228면)


독서 노트를 쓰는 지금, 한국에선 박근혜가 대통령에 취임하느라 소란스럽다. 종일, 거듭 밀려오는 허무와 무기력에 허덕이고 있다. 독서 노트를 쓰며, 다시 손택의 사유에 몸과 정신을 일으킨다. 우리에게, 나에게 '손택의 길'은 다시 맞이해야 할 소명이자 운명일 것이다.  


저항해 보았자 부당함을 막을 수 없다고 해서, 진심으로 깊이 숙고하여 자기가 속한 사회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행동하는 걸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252면)


우리가 열렬히 지지해야 할 이 힘든 싸움을 넘어, 정치적 저항에 있어서는 인과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고 복잡하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모든 투쟁, 모든 저항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투쟁은 전 세계에 파장을 미칩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저기에서. 지금이 아니라면, 곧. 이곳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253면)






2. 움베르트 에코의 문학 강의  사실 난 에코의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뭐랄까, 종종 텍스트에 대한 진지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끼는 까닭이다. 패러디로 치닫는 서사와 언어적 유희는 불편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어떤 면에서 그 불편함은 나의 결핍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을 했다. 강의라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에코의 발랄함은 더욱 돋보인다. 작품을 비틀과 뒤집고 패러디한다. 물론 슬쩍 자신의 서사나 문장을 끼어놓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번엔 위로가 되더라. 문학이 "우리에게 죽는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고 말하는 그의 선언이, 마치 문학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처럼 들렸다. 그런데 그 역설이 유쾌하고 따뜻하였다. 에코의 소설을 다시 읽으면, 그간 나의 편견은 무너질까. 궁금하다. 


문학은 언어의 형성에 기여함으로써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창조합니다. 앞서 단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호메로스 없는 그리스 문명, 루터의 <성서>, 번역이 없는 독일의 정체성, 푸슈킨 없는 러시아어, 건국 신화의 서사시들이 없는 인도의 문명은 어땠을까 상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13면)


세상은 단지 하나의 읽기를 허용하는 <닫힌> 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행성 간의 인력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맞거나 틀리거나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그에 비해 책의 우주는 마치 열린 세계처럼 보입니다.(14면)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죽는 방법까지 가르쳐 줍니다.(29면)  


기억은 우리 각자가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일기이다.-와일드, <진지함의 중요성>(88면)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질문하곤 한다. 만약 내일 우주의 파국이 온 세상을 파괴하고, 따라서 내일 누구도 오늘 내가 쓰는 것일 읽지 못하게 될지라도, 나는 오늘 글을 쓸 것인가? 첫 순간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만약 누구도 나의 글을 읽지 못할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쓸 것인가? 두 번째 대답은 <예>이다. 왜냐하면 은하들의 파국 속에서도 어떤 별이 살아남아서 미래에 누군가 나의 기호들을 해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묵시록의 전야에도 글쓰기는 여전히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이다.(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 465면)

불행하고도 절망적인 사람, 미래의 <독자>에게 말을 건넬 줄 모르는 사람이다.(465면) 





3. 독서의 알레고리  쉽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을 읽느라 며칠을 끙끙 앓았다. 드 만은 현대 문학 이론가이자 해체주의 철학가다. '낭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드 만은 1966년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만난 자크 데리다와 1970-80년대 해체주의 이론 논쟁을 주도하였고, 신비평 이후 문학, 미학, 언어, 수사학 영역의 새로운 연구 방향을 개척'하였다. 


드 만은 "너무 빨리 읽거나 너무 느리게 읽으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는 파스칼의 충고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이 책은, 독서는 늘 알레고리적 상황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알레고리는 '기호와 지시 대상 사이의 어떤 필연적 관계보다는 임의적이고 관습적인 관계'에 근거한다. 결국 알레고리는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드 만이 말하고 싶은 것은 독서의 불가능이며, 우리는 늘 오독한다는 전제이다. 책은 그 테스트가 가진 본래의 의도와 늘 다르게 이해된다. 1부 '수사학'에서는 릴케, 니체, 프루스트를, 2부 '루소'에서는 루소의 저작들을 통해 독서라는 행위의 내적 모순에 주목하여, '스스로 소외된 기호'인 알레고리적 독서를 입증해 나간다. 


독서의 실패에 대한 드 만의 논증은 근대적 믿음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지적 욕망은 텍스트를 온전히 정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독의 패러다임은 지적 욕망을 부추긴다. 정복된 텍스트는 욕망의 도구로 전락한다. 가장 성스러워야 할 텍스트일 수록, 지적 탐욕의 대상이 된다. 그 단적인 예가 오늘의 한국교회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과연 독서라는 행위는, 무엇으로 그 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가. 독서의 행위에 모든 해석학을 해체하겠다는 드 만의 논증에 감탄하며 기꺼이 굴복하면서도, 그 길을 도대체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난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드 만의 지적대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나는 나의 오랜 알레고리에 머물고야 만다. 


동일하게 강력한 미학적인 감응적 독서와 수사적인 의식적 독서 사이의 분열은 그 텍스트가 구성한 내부와 외부, 시간과 공간, 매체와 내용, 부분과 전체, 움직임과 정지, 자아와 이해, 저자와 독자, 메타포와 메토니미 사이의 유사 종합을 무화한다. 그것은 일종의 모순어법과 같이 기능한다. 하지만 이것이 재현적인 호환 불가능성보다는 논리적인 호환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한, 사실상 일종의 아포리아다. 이는 적어도 두 가지 상호배타적인 독서가 불가결하게 발생한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그리고 주체의 층위뿐만 아니라 형상화의 층위에서도 참된 이해의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106면)


“이후에야 비로소, 나는 이해했다”라는 표현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독자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은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전체 소설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은 전통적으로 이 ‘이후’를 문학적이고 미적인 소명이 완수되는 순간으로 해석해왔다. 그 순간 경험에서 글쓰기로 화자 마르셀과 저자 프루스트의 합치 속에 이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알레고리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저자에게는 독서 불가능한 형상인 화자 마르셀과 저자 프루스트 사이의 매개할 수 없는 차이는 화자 마르셀이 이 ‘이후’를 자신의 과거 속에 자리매김하여 완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화자인 마르셀은 저자 프루스트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할 때만큼 그 저자와 많이 동떨어지게 되는 때는 없는 것이다. “죽기 전에 진리를 만난 사람은 행복하다. 설사 죽음이 가까울지라도 진리의 시간을 알리는 괘종이 죽음의 시간 이전에 울린 사람은 행복하다.” 저자로서 프루스트는 죽음의 시간처럼 진리의 시간이 결코 제때에 도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엄밀히 진리가 스스로와 합치하지 못하는 무능함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의미가 사라지는 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그 자체의 의미가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114-115면) 

 




4. 소설과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주목할 만한 매혹적인 작가다. 화가를 꿈꾸었으나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대학에선 건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만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스물세 살 때였다. 그리고 7년 뒤, 첫 소설이 세상에 나오고, 그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하며 빛나는 성취를 질주한다. 


파묵은 화가와 소설가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설은 오로지 이성으로 쓰고, 그림은 오로지 재능으로 그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다분히 회화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는 물론, 그곳의 배경은 세밀한 그림처럼 묘사된다. 이 책은 파묵의 문학 여정 및 소설 이론에 대한 회고이다. 


소설은 두 번째 삶입니다.(11면)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우선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12면)


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제공하지 못하는 속도로, 전체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일반적인 생각과 특별한 사건 사이를 오갑니다.(18면)


이 책은 소설가와 독자에게 동시에 적용된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독자(소설가)는 소박한 독자와 성찰적인 독자로 나뉜다. 소박한 독자는 소설을 어떤 회화 작품을 감상하듯 감성적으로 읽는다. 성찰적 독자는 분석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까지 다다른다. 파묵의 결론은 조금 식상하나 지당하다. 즉 소박한 읽기와 성찰적 읽기가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 책의 마지막 6장이 그것을 말한다. 중심부는 삶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압축된 공간이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작가적 상상력의 어떤 신비로운 지점이다. 소설가는 이 지점에서 시작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독자는 중심부를 찾기 위해 읽기에 집중한다. 특히 독자는 그 중심부에 닿기 위하여 소설의 캐릭터, 플롯, 시간, 단어, 그림, 사물을 충분히 만끽해야 한다. 감성적 읽기가 결여된 소설은 제대로 그 중심부에 닿을 수 없고, 마찬가지로 성찰적 읽기가 없이도 불가능할 것이다. 


어떤 작가는 소설을 쓸 때 자신이 사용하는 기교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에서 하는 온갖 작업과 계산도 잊고, 소설 예술이 제공한 기어, 핸드 브레이크, 버튼 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더욱이 이중에 새로 발명된 것도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저절로 씁니다. 소설 쓰기에(그리고 독서에도) 인위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러한 유의 독자와 작가를 ‘소박한 사람’이라고 부릅시다. 이것과는 정반대되는 감성, 그러니까 소설을 읽거나 쓸 때 텍스트의 인위성과 현실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소설을 쓸 때 사용되는 방법과 소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특별하게 관심을 두는 독자와 작가를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부르지요. 소설 창작은 소박한 동시에 성찰적인 일입니다.(20면)


내게 소설 창작이란 중요한 것에 대해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중요한 것처럼 언급하는 예술입니다. 이 원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하여 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모든 문장에서, 모든 문단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이해하기 위해 중심부를 찾고 상상해야만 할 것입니다.(163면)


조금 미안하고 난데 없는 결론이지만, 파묵은 강연보단 소설을 읽어야 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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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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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한 캠퍼스 선교단체로부터 독서 강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고심 끝에 거절하였지요. 그러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습니다. 이 글은 김예슬 선언_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 2010)에 대한 서평이기도 하지만, 만약 제가 강의 요청에 응했다면 그곳에서 전했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나의 청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오마이뉴스에 8번째로 채택된 기사이며, "대학에 입학할 그대,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진리를 너의 존재로, 정의를 너의 삶으로
대학에 입학할 그대,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십수 년 전 성경책 한 모퉁이에 적어 두었던 한 문장이 있다. '신앙, 혹은 신학은 저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신앙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발견이었고, 정의와 평화를 향한 삶의 시작은 시대와 세상 속에 공고하게 자리잡은 위선과 불의와의 싸움과 다름 아니었다. 저항하지 아니하고는 나의 신앙을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소명 이전에 생존에 대한 갈망이었던 까닭이다. 살아 남기 위한 절박함이었다. 

나를 좌절시킨 김예슬, 그의 선언

나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한 학기에 제법 많은 독서 강의를 다니고 있었다. 독법은 책을 정복하기 위한 병법 비슷한 것이었고, 때로 성공을 위한 어떤 전제였다. 그런 기대감으로 나를 불렀던 이들에게 내가 가장 먼저 선사할 것은 좌절이었다. 그 기대감을 좌절시켜야 비로소 책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목표는 그것이었다. 2010년 3월 11일, 조치원에 있는 한 캠퍼스에 저녁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을 급하게 끝내고 그날 있을 강의를 준비했다. 그리고 길을 떠나기 직전, 인터넷을 열었을 때 문득 이 기사를 보았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다니던 김예슬 씨가 학벌만능주의를 비판하며 자발적 퇴교를 선언한 것이다. 감동적인 명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붙였다는 대자보의 명문을 보며 아슬하고 위태로운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치원으로 가던 기차 안에서, 난 그 대자보, "김예슬 선언"을 수없이 읽었다. 결국 그날 강의는, 준비했던 강의안을 물리치고 이 대자보로 갈음하고야 말았다. 성공과 처세를 위한 책 읽기의 환상을 깨뜨려 책에 기어코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이 나의 목표였다면 김예슬은 더 깊은 근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로 삶이라는 것, 그것도 '인문 삶'이어야 한다는 것. 나는 그의 선언에 좌절했고, 그날 나는 나의 좌절을 이야기해야 했다. 

정말 인문학인가? 나는 인문이 아니라 인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이는 머리와 가슴보다 더 멀지 않은가. 아무리 사랑을 전공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사랑을 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심리을 전공해서 고통 받는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슬픔은 더 큰 슬픔을 가진 자만이 자비의 마음으로 안을 수 있고 상처는 더 큰 상처를 입은 자만이 그것을 승화시켜 치유할 수 있는 것일진데, 학문과 권위와 자기강화를 갑옷처럼 두른 대학에서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86면)  “우리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만들어 지는 것만이 아니다. 스스로 겪고 만나고 헤매고 상처받고 저항하고 사랑한 만큼 만들어진다.”(88면)

솔직히 김예슬에 대한 나의 기대는 절반의 희망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어떤 의심 비슷한 것이었다. 김예슬의 대자보가 저녁 아홉 시 뉴스에 등장하며 여러 이슈를 가져왔고, 찬반 논쟁도 뒤따랐다.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며 반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명문대 학생이 아니라, 지방대 학생이라면 이렇게 이슈가 될 것인지에 대해 냉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의 의심은, '기껏 대학교 3학년짜리의 진심'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에 대한, 솔직히 '꼰대' 같은 기우였다. 젊은 치기가 앞날 유망한 한 청년의 삶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고, 혹은 그가 몇 년 후 총선에서 진보 정치의 기수로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다소 삐딱한 기대감을 갖기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김예슬의 책이 출간되었다. 아주 작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김예슬의 사유와 결기를 담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책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깊고 넓었다. 책을 읽고서야, 그에 대해 가졌던 의심은 거듭 좌절하였고, 그 좌절이 나는 너무 기뻤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대학 거부 선언은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기나긴 싸움의 시작일 뿐임을. 나는 꼭 해내야 하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야 함을. 그리고 또한 알고 있다.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그 싸움은 말도 주장도 아닌 내가 살아낸 만큼의 삶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수많은 고뇌와 눈물 어린 시간 속에서 결단한 나의 첫 걸음을, 새로운 사람의 길 하나 만들어 내겠다는 나의 떨리는 걸음을, 나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21면)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

이 작은책은 김예슬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명문대 입학이란 관문을 통과한 직후, '진리는 학점에 팔아' 넘기고 '정의는 이익에 팔아' 넘긴채,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의 민낯을 만나며, '스펙에 매달리자니 젊음이 서럽고 다른 걸 하자니 뒤쳐질까 불안하고 또다시 반복되는 행복하지 않은 이 나날들'을 고통스럽게 보낸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대학, 그 대학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모든 인간다움을 멸시하는 탐욕을 '적'들로, '거짓 희망'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 진보는 이러한 근원적인 가치투쟁에서 매일 매일 패배한 듯이 보였다. 그 결과가 '탐욕의 포퓰리즘'을 들고 나온 이명박 정부 집권으로 귀결된 것이리라. 내가 접해온 진보는 충분히 래디컬하지 못하기에 쓸데없이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민망하게 투박하고, 어이 없이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 경쟁에 매달린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실상 물질적이고 권력정치적이고 비생태적이고 엘리트적이고 남성중심적이고 삶의 내용물에서 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다."(71면)

김예슬의 결기는 래디컬적 소망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연장선에서 만나는 다양한 현실적 층위의 실천들을 결행한다. 래디컬하다는 것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사유이며, 그 사유는 인간다움에 대한 오랜 갈망일 것이다. 진리는 그 근원과 다름 아니고, 정의는 그 실천적 삶을 잉태하는 파토스와 다름 아니다. 살아내지 못한 진리는, 더 이상 그 자격이 없다. 그리하여 김예슬은 대학이 아닌, 광장에 섰다. 

내 한 줌 목숨보다 소중한 딸에게

놀라운 결단이고 지체없는 실천이었지만, 대학을 거부하고 그만둔 그에게도 마음 한켠 걸리는 것이 있었다. 가난했지만 오직 자녀를 위해 헌신하였던, 모든 희망을 자신에게 걸었던 부모였다. 하여 그에겐 '명박산성'보다 넘기 힘든 것이 '부모산성'이었다고 고백한다. 부모는 졸업만 해달라고 매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부모를 넘어섰다. 그 힘든 마음을 이렇게 썼다. 부모를 위한 진심이었을 것이다. 

"제발 자녀를 자유롭게 놓아 주십시오. 당신의 몸을 빌어 왔지만 그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신성하고 고유한 존재이지 당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아이를 위해 '좋은 부모'가 되려하지 말고 당신의 '좋은 삶'을 사십시오."(100면)

나에게는 일곱 살 딸과 네 살된 아들이 있다. 자칫 자식은 나의 오랜 꿈을 위한 존재로 치환된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나의 자식이 이루길, 그리하여 가난한 나처럼 살지말고 세상을 다스리며 사는 자리에 거하길 바란다. 내가 그런 헛된 욕망으로 아이들을 '소유'하려 할 때, 김예슬의 충언은 값진 이정표가 된다. 하여 이 책의 면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 한 줌 목숨보다 소중한 딸 예지가 언젠가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김예슬은 다행히 분노에 치우쳐 삶을 만만히 보고 있지 않다. 앞서 나는 그의 치기 어린 열정이, 자칫 너무 큰 결정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고 하였다. 대학에 가서 학생들에게 김예슬을 소개할 때, 자칫 그들이 김예슬처럼 '무모한 결행'을 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난감해 하곤 했다. 그런데 다행히 김예슬은 무엇보다 무모한 로맨티스트가 아닐 뿐만 아니라, 몽상가는 더욱 아니었다. 그는 '가슴 뛰는 삶의 모델이 나에게는 아름답지 않다'고 일갈한다. 그 흔한 롤모델을 찾으려 하지도 않고, 롤모델에 의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또한 어떻게 꿈이 직업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며 자신이 선택한, 자신이 가야할 길의 힘겨움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 '대학 거부 선언을 하고 당당히 대학 문을 나섰지만, 고졸자 신분으로 돌아온 나 역시 막막하다'면서도 김예슬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생각할 틈도, 혼란을 겪을 틈도 없이 거짓 희망의 북소리에 맞춰 앞만 보고 진군하는 것이 훨씬 괴로운 것임을. 그리하여 지금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다른 길을 찾으라'는 고통스런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야 낫는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이 고통과 상처를 통해 분명 다른 희망의 길로 걸어갈 수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든다. 그렇기에 나는 젊음이라는 빛나는 무기 하나 믿고 위험한 길을 나서는 것이다. 거짓과 더불어 제 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친 듯이 사는 쪽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115면)


진리를 너의 존재로, 정의를 너의 삶으로

대학에 입학할 나의 후배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에, 김예슬처럼 대학을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이처럼 세상과 사람에 대한 근원적 소망을 뜨겁게 품어, 진리를 너의 존재로 정의를 너의 삶으로 실행하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을 그만두건, 계속 다녀 빛나는 졸업장을 따건 상관없이, 대학에 물든 거짓 희망을 거부하며 살라고 당부하고 싶다. 대학에 다니더라도 광장에 서길 바란다. 대학에 선 그대에게, 부디 김예슬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말대로, '살아있다는 것은 저항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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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아닌 것이 없다 - 사물과 나눈 이야기
이현주 지음 / 샨티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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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목사는 우리나라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성가이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은 그의 동화이다. 이 책은 이레에서 2001년에 출간된 <물物과 나눈 이야기>의 개정판이다. 이레에서 붙인 제목처럼, 돌, 쓰레기통, 나무 젖가락, 안경, 잠자리, 손거울, 단소, 빈 의자, 송곳, 도기 등의 사물과 나눈 우화집이다(사물을 의인화하여 대화한다고 어설픈 신학적 잣대를 들이댈까봐 겁난다). 

  

화자인 사람은 어떤 사물을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재단하고 정의하여 개념화한다. 개념화된 사물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소유하고 멋대로 다룬다. 그러나 사물들은, 도리어 인간을 부끄럽게 하여 세상 사는 지혜를 가르친다. 세상 사는 이치에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역할을 한다. 생물학적 정의로 생명을 가져다 붙이지 말라. 생명은 그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호흡할 것이다. 생명은 무릇 그런 것이다. 이 책은 이현주의 동화나 우화가 늘 그러하듯,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풍자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읊는다.  


"고맙구먼. 먼저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 주시니... 산다는 게 무엇인가? 나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사람 발에 밟혀도 보고, 자네는 밤길에 돌을 밟아 넘어져도 보고... 그러는 게 사는 것 아니겠나? 자네가 넘어져 상처를 입는 것도 그게 다 자네가 살아있어서 겪는 일일게. 그러니, 그래도 굳이 '너 때문에 사는 맛 한번 봤다. 고마워.' 눈 한번 뜨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세상이 거기 있다네."(15면, '너 때문에'/돌)


"사물을 볼 때마다 마음을 모아서 주의 깊게 보아라. 그렇게 주의 깊게 볼 때 너는 네가 보는 사물과 함께 깨어나게 된다. 그런 일을 되풀이해라. 습관이 되도록 반복해라."(20면, '깨끗하지 않은 것이 없다'/쓰레기통)


"그래도 나는 '갈 데까지' 갑니다. 그러니 슬플 이유가 없어요."

"어디가 너의 '갈 데까지'냐?"

"당신도 나와 함께 그리로 가고 있으니, 나한테 묻지 마셔요." 

(38면, '끝은 본디 없는 것이다'/아기 도토리) 


"타고난 목소리보다 크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참말은 골목 밖에서 들리지 않고, 고운 노래는 언덕을 넘지 않는 법. 제발 너도 나를 믿지 마라."(58면, '고운 노래는 언덕을 넘지 않는 법'/마이크)


"자네 몸에서 나는 냄새가 무슨 냄새든 어차피 냄새를 풍기게 되어 있는 것이 자네의 숙명일진대, 역겹고 썩은 내가 아니라 향긋한 향내이기를 바라겠네."(119면,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떨어진 꽃)


"자네는 꼭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딱한 종자(種子)로구먼!"(150면, 돌아가는 몸짓/감꽃)


"이현주는 우리의 그런 고민을 대신해 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 눈을 맑게 씻어준다. 평화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고민했다. 먼지 하나 티끌 하나도 모두가 성스러운 목숨들이다. 정말 눈물겨운 생각들이 구슬처럼 꿰어져 있다."(214면, 권정생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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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기적 같은 일 - 바닷가 새 터를 만나고 사람의 마음으로 집을 짓고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송성영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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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연재되었던 글을 엮은 책이다. 송성영은 글쓰는 농부다. 충남 공주에 살던 지은이가 고속철도가 생기면서 결국 그곳을 떠나 전남 고흥에 거하는 과정을 소박한 글쓰기로 잘 그려 놓았다. 적게 벌고 적게 쓰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저자의 철학은, 현실에서 만만찮은 벽에 부딪치고는 한다. 하지만 낙천적인 그는 결국 자신의 꿈을 소신껏 개척한다. 

  

이 책은 제목처럼 기적 같은 일로 가득하다. 전라도 땅 끝 고흥 바닷가에 우여곡절 끝에 원하는 땅을 찾고, 말도 안 되는 비용으로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또 동네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기증한 책들로 도서관은 가득 채워졌다. 정말, 모두가 기적 같은 일이다. 

  

 속에 소개된 여러 이야기들이 다 그렇지만, 가장 감동 깊은 것은 가출한 저자의 친구 아들과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다. 소위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오만은, 그 스스로 고립될 때가 많다. 그는 무소의 뿔처럼 걷되, 이웃과 사람들과 연대하는 길을 택했다. 저자는 가식없는 정직으로 소통하는 법을 안다. 그것이 몹시 부럽다. 진리에 다다른 진심은 기어코 기적을 이루어 낸다.  


저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우파니샤드>의 구절을 읊조려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37면)


부조리한 세상을 등지고 시골에서 혼자서만 잘 살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부대껴 살면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224면)


돼지 같은 세상, 그래도 자유를 꿈꿔라 아들들아.(246면)


세상 살이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한쪽에서 필요 이상으로 누리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만큼 고통당하게 됩니다.(3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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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티타
김서령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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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요 변곡점마다 친구가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어느 때부터인가 친구가 아닌 직업이나 어떤 사건이 그 변곡점을 차지할 때부터 난 슬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친구를,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였다. 소설 속 소연과 미유가 연주했던 '티타티타'(젓가락 행진곡)의 선율은, 마치 내게도 그 언젠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 같다. '우리'에서 '나'로 변해가고, '나'는 '우리'를 그리워하지만, 못내 그리움을 극복하지 못한채 나의 영역만 지키고 있다. 속상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 슬픔과 상처들을 안고 살아간다. 외다리 아빠를 버리고 미혼모로 소연을 키웠던 엄마, 그런 언니와 조카 때문에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사는 이모 연희, 자식들을 위해 바람 피는 남편을 참고 살아가는 미유의 엄마, 아버지의 높은 기대감에 늘 좌절하며 살아야 했던 언니 은유. 등장 인물들은 하나같이 평범하나 그들의 상처는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도 그러하다. 우린 지극히 평범하나 우리의 상처는 다른 무엇과 비교하기 힘들 만큼 아프다. 작가는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응원하듯 소설을 쓴다. 작가의 문장은 마음의 언어를 읽어내는 데 탁월하다. 작가의 서사는 시각적 감성을 담보하되 시간의 속성을 한껏 활용한다. 배우고픈 글쓰기다. 


김서령의 단편들을 주로 읽었는데, 장편 소설은 처음이었다. 같은 '1974년'생이란 이유만으로, 순전히 그 이유만으로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무언가 동지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설은 마치 나의 친구처럼 우정을 말해주었다. 이 소설도 그러하다. 숱한 소설을 읽으나, 추억이 되는 소설은 흔치 않을게다. 요즘 작가의 페이스북 담벼락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데, 곧 그의 에세이가 나온단다. 반가운 소식이다. 



의심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지옥도 같이 시작되는 법이니까.(123면)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나는 자클린의 말을 빌려 묻는다. 소리 내지 않았기에 아무도 나에게 대답해주지 않았다.(241면)


언젠가 우리는 땅속 지하철에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밖에 뭐가 보여?" "온통 검은 세상." "정말?" "아니……아무것도 보이지 않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검은 세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말끄러미 무언가를 찾고 있는 우리 모습만 도리어 비치는 것이 아니었던가. 아무것도 없는 땅속에서 땅 밖의 세상을 감지하지 못한 채로 한동안 가두어지는 것. 땅 밖의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동안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몸이 꾸물꾸물해지는 불안함.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쯤 우리도 다 알아, 라고 말할 수 없는 유일한 주눅.(285면)


나는 처음 와보는 대학병원의 로비에서 나의 한 시절과 작별하는 중이다. 한 장의 인생이 악보처럼 지나갔으니, 이제 다른 인생이 또 시작될 것이다. 나도 엄마처럼, 연희 이모처럼 또 다른 어른들처럼 훌쩍 키가 자랄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이쯤은.(2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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