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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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한 캠퍼스 선교단체로부터 독서 강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고심 끝에 거절하였지요. 그러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습니다. 이 글은 김예슬 선언_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느린걸음, 2010)에 대한 서평이기도 하지만, 만약 제가 강의 요청에 응했다면 그곳에서 전했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나의 청년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오마이뉴스에 8번째로 채택된 기사이며, "대학에 입학할 그대,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란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진리를 너의 존재로, 정의를 너의 삶으로
대학에 입학할 그대,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십수 년 전 성경책 한 모퉁이에 적어 두었던 한 문장이 있다. '신앙, 혹은 신학은 저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신앙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발견이었고, 정의와 평화를 향한 삶의 시작은 시대와 세상 속에 공고하게 자리잡은 위선과 불의와의 싸움과 다름 아니었다. 저항하지 아니하고는 나의 신앙을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소명 이전에 생존에 대한 갈망이었던 까닭이다. 살아 남기 위한 절박함이었다. 

나를 좌절시킨 김예슬, 그의 선언

나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한 학기에 제법 많은 독서 강의를 다니고 있었다. 독법은 책을 정복하기 위한 병법 비슷한 것이었고, 때로 성공을 위한 어떤 전제였다. 그런 기대감으로 나를 불렀던 이들에게 내가 가장 먼저 선사할 것은 좌절이었다. 그 기대감을 좌절시켜야 비로소 책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목표는 그것이었다. 2010년 3월 11일, 조치원에 있는 한 캠퍼스에 저녁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을 급하게 끝내고 그날 있을 강의를 준비했다. 그리고 길을 떠나기 직전, 인터넷을 열었을 때 문득 이 기사를 보았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다니던 김예슬 씨가 학벌만능주의를 비판하며 자발적 퇴교를 선언한 것이다. 감동적인 명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붙였다는 대자보의 명문을 보며 아슬하고 위태로운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치원으로 가던 기차 안에서, 난 그 대자보, "김예슬 선언"을 수없이 읽었다. 결국 그날 강의는, 준비했던 강의안을 물리치고 이 대자보로 갈음하고야 말았다. 성공과 처세를 위한 책 읽기의 환상을 깨뜨려 책에 기어코 닿을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이 나의 목표였다면 김예슬은 더 깊은 근본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바로 삶이라는 것, 그것도 '인문 삶'이어야 한다는 것. 나는 그의 선언에 좌절했고, 그날 나는 나의 좌절을 이야기해야 했다. 

정말 인문학인가? 나는 인문이 아니라 인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이는 머리와 가슴보다 더 멀지 않은가. 아무리 사랑을 전공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사랑을 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심리을 전공해서 고통 받는 사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슬픔은 더 큰 슬픔을 가진 자만이 자비의 마음으로 안을 수 있고 상처는 더 큰 상처를 입은 자만이 그것을 승화시켜 치유할 수 있는 것일진데, 학문과 권위와 자기강화를 갑옷처럼 두른 대학에서 어디까지 가능한 것일까?(86면)  “우리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만들어 지는 것만이 아니다. 스스로 겪고 만나고 헤매고 상처받고 저항하고 사랑한 만큼 만들어진다.”(88면)

솔직히 김예슬에 대한 나의 기대는 절반의 희망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어떤 의심 비슷한 것이었다. 김예슬의 대자보가 저녁 아홉 시 뉴스에 등장하며 여러 이슈를 가져왔고, 찬반 논쟁도 뒤따랐다.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며 반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명문대 학생이 아니라, 지방대 학생이라면 이렇게 이슈가 될 것인지에 대해 냉소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의 의심은, '기껏 대학교 3학년짜리의 진심'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에 대한, 솔직히 '꼰대' 같은 기우였다. 젊은 치기가 앞날 유망한 한 청년의 삶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고, 혹은 그가 몇 년 후 총선에서 진보 정치의 기수로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다소 삐딱한 기대감을 갖기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김예슬의 책이 출간되었다. 아주 작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김예슬의 사유와 결기를 담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책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깊고 넓었다. 책을 읽고서야, 그에 대해 가졌던 의심은 거듭 좌절하였고, 그 좌절이 나는 너무 기뻤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대학 거부 선언은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기나긴 싸움의 시작일 뿐임을. 나는 꼭 해내야 하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야 함을. 그리고 또한 알고 있다.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그 싸움은 말도 주장도 아닌 내가 살아낸 만큼의 삶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나는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수많은 고뇌와 눈물 어린 시간 속에서 결단한 나의 첫 걸음을, 새로운 사람의 길 하나 만들어 내겠다는 나의 떨리는 걸음을, 나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21면)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

이 작은책은 김예슬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명문대 입학이란 관문을 통과한 직후, '진리는 학점에 팔아' 넘기고 '정의는 이익에 팔아' 넘긴채,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의 민낯을 만나며, '스펙에 매달리자니 젊음이 서럽고 다른 걸 하자니 뒤쳐질까 불안하고 또다시 반복되는 행복하지 않은 이 나날들'을 고통스럽게 보낸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대학, 그 대학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욕망과 모든 인간다움을 멸시하는 탐욕을 '적'들로, '거짓 희망'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는 충분히 래디컬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 진보는 이러한 근원적인 가치투쟁에서 매일 매일 패배한 듯이 보였다. 그 결과가 '탐욕의 포퓰리즘'을 들고 나온 이명박 정부 집권으로 귀결된 것이리라. 내가 접해온 진보는 충분히 래디컬하지 못하기에 쓸데없이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민망하게 투박하고, 어이 없이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 경쟁에 매달린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실상 물질적이고 권력정치적이고 비생태적이고 엘리트적이고 남성중심적이고 삶의 내용물에서 보수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다."(71면)

김예슬의 결기는 래디컬적 소망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연장선에서 만나는 다양한 현실적 층위의 실천들을 결행한다. 래디컬하다는 것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사유이며, 그 사유는 인간다움에 대한 오랜 갈망일 것이다. 진리는 그 근원과 다름 아니고, 정의는 그 실천적 삶을 잉태하는 파토스와 다름 아니다. 살아내지 못한 진리는, 더 이상 그 자격이 없다. 그리하여 김예슬은 대학이 아닌, 광장에 섰다. 

내 한 줌 목숨보다 소중한 딸에게

놀라운 결단이고 지체없는 실천이었지만, 대학을 거부하고 그만둔 그에게도 마음 한켠 걸리는 것이 있었다. 가난했지만 오직 자녀를 위해 헌신하였던, 모든 희망을 자신에게 걸었던 부모였다. 하여 그에겐 '명박산성'보다 넘기 힘든 것이 '부모산성'이었다고 고백한다. 부모는 졸업만 해달라고 매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부모를 넘어섰다. 그 힘든 마음을 이렇게 썼다. 부모를 위한 진심이었을 것이다. 

"제발 자녀를 자유롭게 놓아 주십시오. 당신의 몸을 빌어 왔지만 그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신성하고 고유한 존재이지 당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아이를 위해 '좋은 부모'가 되려하지 말고 당신의 '좋은 삶'을 사십시오."(100면)

나에게는 일곱 살 딸과 네 살된 아들이 있다. 자칫 자식은 나의 오랜 꿈을 위한 존재로 치환된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나의 자식이 이루길, 그리하여 가난한 나처럼 살지말고 세상을 다스리며 사는 자리에 거하길 바란다. 내가 그런 헛된 욕망으로 아이들을 '소유'하려 할 때, 김예슬의 충언은 값진 이정표가 된다. 하여 이 책의 면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 한 줌 목숨보다 소중한 딸 예지가 언젠가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김예슬은 다행히 분노에 치우쳐 삶을 만만히 보고 있지 않다. 앞서 나는 그의 치기 어린 열정이, 자칫 너무 큰 결정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고 하였다. 대학에 가서 학생들에게 김예슬을 소개할 때, 자칫 그들이 김예슬처럼 '무모한 결행'을 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난감해 하곤 했다. 그런데 다행히 김예슬은 무엇보다 무모한 로맨티스트가 아닐 뿐만 아니라, 몽상가는 더욱 아니었다. 그는 '가슴 뛰는 삶의 모델이 나에게는 아름답지 않다'고 일갈한다. 그 흔한 롤모델을 찾으려 하지도 않고, 롤모델에 의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또한 어떻게 꿈이 직업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며 자신이 선택한, 자신이 가야할 길의 힘겨움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 '대학 거부 선언을 하고 당당히 대학 문을 나섰지만, 고졸자 신분으로 돌아온 나 역시 막막하다'면서도 김예슬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생각할 틈도, 혼란을 겪을 틈도 없이 거짓 희망의 북소리에 맞춰 앞만 보고 진군하는 것이 훨씬 괴로운 것임을. 그리하여 지금 내가 혼란스러운 것은 '다른 길을 찾으라'는 고통스런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야 낫는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이 고통과 상처를 통해 분명 다른 희망의 길로 걸어갈 수 있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든다. 그렇기에 나는 젊음이라는 빛나는 무기 하나 믿고 위험한 길을 나서는 것이다. 거짓과 더불어 제 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친 듯이 사는 쪽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115면)


진리를 너의 존재로, 정의를 너의 삶으로

대학에 입학할 나의 후배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에, 김예슬처럼 대학을 그만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이처럼 세상과 사람에 대한 근원적 소망을 뜨겁게 품어, 진리를 너의 존재로 정의를 너의 삶으로 실행하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을 그만두건, 계속 다녀 빛나는 졸업장을 따건 상관없이, 대학에 물든 거짓 희망을 거부하며 살라고 당부하고 싶다. 대학에 다니더라도 광장에 서길 바란다. 대학에 선 그대에게, 부디 김예슬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의 말대로, '살아있다는 것은 저항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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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아닌 것이 없다 - 사물과 나눈 이야기
이현주 지음 / 샨티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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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현주 목사는 우리나라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성가이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은 그의 동화이다. 이 책은 이레에서 2001년에 출간된 <물物과 나눈 이야기>의 개정판이다. 이레에서 붙인 제목처럼, 돌, 쓰레기통, 나무 젖가락, 안경, 잠자리, 손거울, 단소, 빈 의자, 송곳, 도기 등의 사물과 나눈 우화집이다(사물을 의인화하여 대화한다고 어설픈 신학적 잣대를 들이댈까봐 겁난다). 

  

화자인 사람은 어떤 사물을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재단하고 정의하여 개념화한다. 개념화된 사물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소유하고 멋대로 다룬다. 그러나 사물들은, 도리어 인간을 부끄럽게 하여 세상 사는 지혜를 가르친다. 세상 사는 이치에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역할을 한다. 생물학적 정의로 생명을 가져다 붙이지 말라. 생명은 그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호흡할 것이다. 생명은 무릇 그런 것이다. 이 책은 이현주의 동화나 우화가 늘 그러하듯,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풍자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읊는다.  


"고맙구먼. 먼저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 주시니... 산다는 게 무엇인가? 나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사람 발에 밟혀도 보고, 자네는 밤길에 돌을 밟아 넘어져도 보고... 그러는 게 사는 것 아니겠나? 자네가 넘어져 상처를 입는 것도 그게 다 자네가 살아있어서 겪는 일일게. 그러니, 그래도 굳이 '너 때문에 사는 맛 한번 봤다. 고마워.' 눈 한번 뜨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세상이 거기 있다네."(15면, '너 때문에'/돌)


"사물을 볼 때마다 마음을 모아서 주의 깊게 보아라. 그렇게 주의 깊게 볼 때 너는 네가 보는 사물과 함께 깨어나게 된다. 그런 일을 되풀이해라. 습관이 되도록 반복해라."(20면, '깨끗하지 않은 것이 없다'/쓰레기통)


"그래도 나는 '갈 데까지' 갑니다. 그러니 슬플 이유가 없어요."

"어디가 너의 '갈 데까지'냐?"

"당신도 나와 함께 그리로 가고 있으니, 나한테 묻지 마셔요." 

(38면, '끝은 본디 없는 것이다'/아기 도토리) 


"타고난 목소리보다 크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참말은 골목 밖에서 들리지 않고, 고운 노래는 언덕을 넘지 않는 법. 제발 너도 나를 믿지 마라."(58면, '고운 노래는 언덕을 넘지 않는 법'/마이크)


"자네 몸에서 나는 냄새가 무슨 냄새든 어차피 냄새를 풍기게 되어 있는 것이 자네의 숙명일진대, 역겹고 썩은 내가 아니라 향긋한 향내이기를 바라겠네."(119면,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떨어진 꽃)


"자네는 꼭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딱한 종자(種子)로구먼!"(150면, 돌아가는 몸짓/감꽃)


"이현주는 우리의 그런 고민을 대신해 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 눈을 맑게 씻어준다. 평화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끊임없이 고민했다. 먼지 하나 티끌 하나도 모두가 성스러운 목숨들이다. 정말 눈물겨운 생각들이 구슬처럼 꿰어져 있다."(214면, 권정생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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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기적 같은 일 - 바닷가 새 터를 만나고 사람의 마음으로 집을 짓고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송성영 지음 / 오마이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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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연재되었던 글을 엮은 책이다. 송성영은 글쓰는 농부다. 충남 공주에 살던 지은이가 고속철도가 생기면서 결국 그곳을 떠나 전남 고흥에 거하는 과정을 소박한 글쓰기로 잘 그려 놓았다. 적게 벌고 적게 쓰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저자의 철학은, 현실에서 만만찮은 벽에 부딪치고는 한다. 하지만 낙천적인 그는 결국 자신의 꿈을 소신껏 개척한다. 

  

이 책은 제목처럼 기적 같은 일로 가득하다. 전라도 땅 끝 고흥 바닷가에 우여곡절 끝에 원하는 땅을 찾고, 말도 안 되는 비용으로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또 동네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기증한 책들로 도서관은 가득 채워졌다. 정말, 모두가 기적 같은 일이다. 

  

 속에 소개된 여러 이야기들이 다 그렇지만, 가장 감동 깊은 것은 가출한 저자의 친구 아들과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는 장면이다. 소위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오만은, 그 스스로 고립될 때가 많다. 그는 무소의 뿔처럼 걷되, 이웃과 사람들과 연대하는 길을 택했다. 저자는 가식없는 정직으로 소통하는 법을 안다. 그것이 몹시 부럽다. 진리에 다다른 진심은 기어코 기적을 이루어 낸다.  


저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우파니샤드>의 구절을 읊조려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37면)


부조리한 세상을 등지고 시골에서 혼자서만 잘 살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과 부대껴 살면서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224면)


돼지 같은 세상, 그래도 자유를 꿈꿔라 아들들아.(246면)


세상 살이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한쪽에서 필요 이상으로 누리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만큼 고통당하게 됩니다.(3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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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티타
김서령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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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요 변곡점마다 친구가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어느 때부터인가 친구가 아닌 직업이나 어떤 사건이 그 변곡점을 차지할 때부터 난 슬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친구를,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였다. 소설 속 소연과 미유가 연주했던 '티타티타'(젓가락 행진곡)의 선율은, 마치 내게도 그 언젠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 같다. '우리'에서 '나'로 변해가고, '나'는 '우리'를 그리워하지만, 못내 그리움을 극복하지 못한채 나의 영역만 지키고 있다. 속상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저마다 슬픔과 상처들을 안고 살아간다. 외다리 아빠를 버리고 미혼모로 소연을 키웠던 엄마, 그런 언니와 조카 때문에 삶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사는 이모 연희, 자식들을 위해 바람 피는 남편을 참고 살아가는 미유의 엄마, 아버지의 높은 기대감에 늘 좌절하며 살아야 했던 언니 은유. 등장 인물들은 하나같이 평범하나 그들의 상처는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도 그러하다. 우린 지극히 평범하나 우리의 상처는 다른 무엇과 비교하기 힘들 만큼 아프다. 작가는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응원하듯 소설을 쓴다. 작가의 문장은 마음의 언어를 읽어내는 데 탁월하다. 작가의 서사는 시각적 감성을 담보하되 시간의 속성을 한껏 활용한다. 배우고픈 글쓰기다. 


김서령의 단편들을 주로 읽었는데, 장편 소설은 처음이었다. 같은 '1974년'생이란 이유만으로, 순전히 그 이유만으로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무언가 동지의식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설은 마치 나의 친구처럼 우정을 말해주었다. 이 소설도 그러하다. 숱한 소설을 읽으나, 추억이 되는 소설은 흔치 않을게다. 요즘 작가의 페이스북 담벼락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데, 곧 그의 에세이가 나온단다. 반가운 소식이다. 



의심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지옥도 같이 시작되는 법이니까.(123면)


어떻게 하면 삶을 견딜 수 있죠. 나는 자클린의 말을 빌려 묻는다. 소리 내지 않았기에 아무도 나에게 대답해주지 않았다.(241면)


언젠가 우리는 땅속 지하철에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밖에 뭐가 보여?" "온통 검은 세상." "정말?" "아니……아무것도 보이지 않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검은 세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말끄러미 무언가를 찾고 있는 우리 모습만 도리어 비치는 것이 아니었던가. 아무것도 없는 땅속에서 땅 밖의 세상을 감지하지 못한 채로 한동안 가두어지는 것. 땅 밖의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동안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몸이 꾸물꾸물해지는 불안함.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쯤 우리도 다 알아, 라고 말할 수 없는 유일한 주눅.(285면)


나는 처음 와보는 대학병원의 로비에서 나의 한 시절과 작별하는 중이다. 한 장의 인생이 악보처럼 지나갔으니, 이제 다른 인생이 또 시작될 것이다. 나도 엄마처럼, 연희 이모처럼 또 다른 어른들처럼 훌쩍 키가 자랄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이쯤은.(2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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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앙드레 드 리쇼 지음, 이재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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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결핍은 욕망으로 발현된다. 그리고 욕망은 사랑과 더불어 위태롭게 존재한다. 재채기만 해도 소문 날 것 같은 한적한 마을에 남편을 잃고 정착한 테레즈와 아들 조르제의 비극적 이야기다. 사회적 테제는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지만, 끝내 그 억압을 떨쳐내는 욕망이 더러 있다. 그런 욕망은 종종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테레즈의 욕망이 그러했다. 홀로 외롭던 테레즈의 사랑은 정당하였으나 아들 조르제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아들의 욕망은 어머니의 욕망을 끝내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일까. 욕망과 사랑의 동거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위태로운 질문은 그저 고통스럽다. 


어떤 사랑이든 자기 마음을 인정하느라 보내는 최초의 시간은 축복받은 시간이다. 특히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존재들에게는.(84면)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비극 아래, 엇갈린 욕망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면서 어머니와 아들은 불의의 사고로 파국을 맞이한다. 소설은 주로 밤에 진행된다. 어둠의 음울함은 강력한 메타포로 이 소설을 지배한다. 알베르 까뮈는 이 소설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고통>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단단하게 묶여 있던 매듭을 풀어주었고 속박에서 나를 놓아주았다. 


까뮈의 <이방인>은, 이 소설에 빚진 바가 있을 것이다. 조르제는 <이방인>의 청년 뫼르소의 어떤 고독과 닮아 있다. 허나 뫼르소는 그 고독을 의연하게 물리친다. 소설을 읽는 내내, 뫼르소가 생각났다. 그리고 유년 시절 나의 고독과 욕망도 생각났다. 그러나 나는 뫼르소처럼 의연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프다. 어머니의 욕망을 끝내 허락하지 않는 나의 욕망, 그래서 이 소설은 나에겐 슬픔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문체로 그려낸 슬픔이 못내 원망스럽다. 조만간 까뮈를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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