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없이 살기 - 아직도 불안한 부모를 위한 노워리 프로젝트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노워리 상담넷 엮음 / 비아북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교육 걱정없는 세상, 아직도 불안하다면 이 책을!
[서평] <학원 없이 살기_아직도 불안한 부모를 위한 노워리 프로젝트>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노워리 상담넷 지음│비아북 펴냄│2013년 4월)


우리 첫째 아이는 일곱 살, 둘때 아이는 네 살이다. 흔히 말하는 '미운 네살, 죽이고 싶은 일곱 살'이다. 특히 첫째는 딸인데 사사건건 엄마와 대립한다. 유치원에선 '바른생활 아이'로 통하는데, 집에서는 세침떼기와 왈가닥스런 극단을 수없이 오간다. 끊임없이 묻고 의심한다. 엄마가 뭐라 그러면 딸은 "아닌데, 선생님은 그렇게 얘기 안 했는데?"라며 엄마의 신경을 돋군다. 엄마의 권위는 유치원 선생님의 권위에 무시당학 일쑤다. 엄마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어느 날 아내가 집안에 우체통을 달았다. 그리고 딸을 불러, 우리 이제 편지로 종종 대화하자고 초청했다. 엄마에게 편지를 쓰면, 아침 우체통엔 엄마의 답장이 담겨 있다. 엄마가 여행가던 날도 그랬다. 엄마의 편지를 읽은 딸은, 엄마가 돌아오는 날에 맞춰 답장을 썼다. 그 뒤로, 둘은 속깊은 대화까지 나누기 시작했다.


부모력의 핵심은 아이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설 '행복한공부연구소'의 박재원 소장은 부모력의 핵심은 아이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기성세대는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성장하고 내면화하였기 때문에, 자녀와 수평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 유독 힘들다고 진단한다. 한국의 부모들은 유난히 '화'라는 감정을, 특히 자녀들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표출했던 사회적 습관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박재원 소장은 그런 부모들에게 글로 써서 마음을 전하는 '메모 소통법'을 권한다. 아이와 마주하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부정적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란다.

화를 참거나 아이 이야기를 경청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부모로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야 합니다. 가장 쉽고 효과도 탁월한 방법은 바로 메모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하는 것입니다.(<학원 없이 살기>, 49쪽)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중받는다'는 느낌이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이해하고 믿어줄 때 학습동기를 갖게 된다. 그리고 학습동기는 자기주도학습의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 거기서부터 아이와 부모가 다같이 행복한 교육의 가능성이 열린다.

No Worry, Be Happy!

2008년, 입시와 사교육 고통 없는 세상을 만드는 대중운동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하 '사교육걱정')이 출범했다. 학부모, 교사, 학생간의 연대를 통해, 무익한 사교육 경쟁의 위선과 과장을 폭로하고, 무한 경쟁이 아닌 적성과 소질에 따라 자신의 존엄을 지켜나가는 건강한 사회 실현을 목표로, 선행교육금지법 제정 등의 당찬 운동을 펼치고 있다.

'사교육걱정'은 학원권력과도 맞짱 뜨며 선전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옆집 엄마에게 흔들리지 않는 내공을 기르도록 돕는 '등대지기학교'와 우리나라 최초의 사교육 관련 온라인 상담소인 '노워리 상담넷'을 운영하며 생산적인 대안 운동에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10년 출간된 <아깝다 학원비>를 통해 학부모와 교사들에게 의미 있는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다면, 이번에 '사교육걱정 노워리 상담넷'이 펴낸 <학원 없이 살기>(2013.4)는 그 실천편이다.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는 학습법, 영어, 수학, 독서와 글쓰기, 생활 및 심리, 학교 생활에 이르는 각론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친절하고 세심하게 설명한다.

우리나라의 입시 환경은 변화무쌍하다.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학벌사회는 명문대 입학을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고, 이는 우리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 혹은 최소한의 생존 조건인 양 왜곡한다. 끊임없이 '당신의 자녀가 뒤쳐지지 않는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불안 마케팅을 감행하여, 사교육 시장의 팽창을 도모한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핏기 없는 얼굴로 학원가를 전전긍긍한다.

이 책은 '조작된 불안감'의 거짓을 폭로한다. 학원권력의 위선을 파헤치는 것은 어쩌면 쉬울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부모를 향해, 그 거짓에 숨어 버리는 부모의 욕망을 파헤친다. 잘못된 정보들로 인해 부모의 진심이 변질되어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사교육이라는 산업에 즐비합니다. 그들의 논리가 바로 '역전은 없다. 성적 부진은 좌절이다. 학벌이 필수다'라는 주장입니다. 정말 그들의 주장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결국 그들 편에 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부모 마음이 절실하더라도 사교육 논리에 휘말리게 되면 아이를 위한 부모가 아니라 사교육을 위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124쪽)

성적은 좋지 못하지만 자존감이 높은 아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반대로 성적은 우수하지만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극심한 우울에 빠지는 아이들이 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적에만 매달린 아이들의 자존감은 위태롭다. '아이의 자존감은 성적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이 책은 도전한다.

한 사교육 업체는 초등학생에게 고액의 수강료를 받으며 고등학교 수학을 가르치다 적발되었다. 해당 연령을 넘어선 학습은 대개 그 과정에서 '아이다움'을 앗아간다. 세상을 보는 아이의 시선은 경이로 가득해야 하지만, 선행학습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더 이상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질문하지 않는다. 결국 지나친 선행학습은 '수동적인 학습자, 지식의 암기자'를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학습법을 제시한다. 학습동기를 찾게 해주기 위한 소통법, 예습과 복습의 주기와 시간,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단계별 학습의 핵심 등에 대해 구체적인 상담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또한 영어나 수학 등의 교과목에 대한 조언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고학년 때 중학교 수학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스토리텔링 수학은 무엇인지, 평상시보다 학교 시험에서 점수가 나오는 5가지 원인과 대안은 무엇인지, 영어 유치원엔 왜 보내면 안 되는지, 초등학교 저학년을 위한 바람직한 영어 노출법은 무엇인지, 예체능 사교육의 문제는 무엇인지, 사고력 수학의 맹점과 바람직한 접근은 무엇인지 등을 다룬다.

이 책을 읽는 세 가지 독법

부모력의 핵심은 공감하는 능력이라고 했는데, 이 책은 이 땅의 부모에게 깊이 공감하고 배려한다.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책을 읽는 내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공감하는 부모'가 될 수 있을 거란 단단한 희망에 이른다.

당장 열매를 따려는 어리석은 부모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불안해할 이유도 사라집니다. 뿌리는 부모의 공감력만큼 강해집니다. 공감력을 발휘하는 데는 경제력도, 정보력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되곤 하지요. 공감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가 아이의 희망이자 대안입니다.(174쪽)

이 책의 미덕은 또한 쉽고 자상하며 친절하다는 점에 있다. 심지어 만화로 그려진 서문은 이 책의 독법 세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전체적으로 살펴보며 공감하는 사례 읽기. 둘째, 마음이 불안하거나 고민이 생겼을 때 관련 사례 읽기. 셋째,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해당 사례 읽기. 나는 이제 기껏 첫 번째 읽기만 수행하며 '공감'만 했을 뿐이다. 내 곁에 이 책을 둘 수 있다는 점은 큰 행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도 이런 것, 해본다. 눈여겨본 신간 목록이다. 4월 4주차지만, 처음인고로 4월에 나온 신간 몽땅 살펴보았다. 

기준은 내 마음에 든 책. 당연히 지극히 주관적인 인상비평이니 시비 걸지 마시라. 




2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그대, 강정-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북멘토 편집부 엮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3년 4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13년 04월 24일에 저장
절판

애달픈 사랑은 연인의 마음을 직시하여 그 심연의 상처를 한없이 어루만지다가, 곱디고운 위로의 말을 살며시 포갠다. 강정을 `그대`라고 부르는 43인의 작가와 7인의 사진가의 연서를 담았다.
산둥 수용소-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3년 04월 24일에 저장

아우슈비츠의 빅터 프랑클이나 프리모 레비가 극심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노력했다면, 길키는 노골적으로 드러난 인간의 욕망들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산둥 수용소의 이야기, 1966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이나, 2013년 한국을 사는 우리의 `감춰진 실존`을 향해서도 이 책은 뚜벅뚜벅 나아온다. 우리는 무엇으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고 실현할 것인가. 이 책은 그것을 엄중히 묻고 있다.
도쿄 산책자- 강상중의 도시 인문 에세이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3년 4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3년 04월 23일에 저장

고민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제시한 그가 다시 묻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13년 04월 23일에 저장

˝드디어 선보이는 작가 공선옥의 1980년, 광주˝


2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대, 강정 -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북멘토 편집부 엮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3년 4월
평점 :
절판


큰일이다, 그대에게 마음을 뺏겼다

[서평] <그대, 강정_작가, 제주와 연애하다>

(43인 작가 쓰고 7인 사진가 찍다|북멘토|2013)




애달픈 사랑은 연인의 마음을 직시하여 그 심연의 상처를 한없이 어루만지다가, 곱디고운 위로의 말을 살며시 포갠다. 강정을 '그대'라고 부르는 43인의 작가와 7인의 사진가의 연서를 담았다. 책의 제목은 <그대, 강정>이다. 


강정은 예로부터 평화롭고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제주민들은 '일강정', '이번내'(화순), '삼도원'(대정읍 신도)이라 하여, 강정을 살기 좋은 첫 번째 마을로 꼽았다. 귤나무가 자라는 예쁜 마당을 가진 집들 사이 돌담을 따라 10여분 걸어 닿는 해안엔, 1.2km에 이르는 거대한 통바위인 구럼비라 불리는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바위 곳곳엔 용천수가 솟아나와 하루 일과에 지친 해녀의 몸을 씻기고, 붉은말말똥게, 맹꽁이 등 뭇 생명들을 품는다.


물이 귀한 제주도에서 유독 강정천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 서귀포 식수 공급량의 70퍼센트를 공급하고, 계절마다 은어가 찾아오고 천연기념물 제327호인 원앙이 한가로이 거닌다. 강정천을 따라 한라산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청록빛 연못 냇길이소가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다. 맞은편 섭섬과 문섬, 밤섬의 풍광을 두른 강정 바닷가에선 운만 맞으면 파도 위로 뛰노는 돌고래도 볼 수 있었다.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가 건설되기 전까진, 그랬다.


민주주의적 절차를 무시하고 해군기지 건설이 결정, 강행되고, 6년간 이어온 투쟁이다. 주민과 활동가에게 5억 원이 넘는 벌금을 부과되었고, 연인원 670여 명이 연행, 구금되었다. 구속 수감된 사람이 20여 명에 이른다. 작년 봄이 시작되던 3월 7일, 해군은 구럼비 발파를 시작했고, 강정 마을 주민과 활동가들의 투쟁은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났다. 사이렌이 울리면 대치와 고착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대나무 장대에 달린 노란 깃발은 오늘도 강정을 지키고 있으며, 중덕 삼거리에 위태롭게 선 망루는 저 멀리 발파된, 지금도 발파되고 있는 구럼비를 아득한 시선으로 염원하고 있다.


제주의 슬픈 운명에 안부를 묻다



이 책은, 다시 만개하던 봄의 계절, 2013년 4월 3일 출간되었다. 작가들은 제주의 운명을 가슴에 품어 무애의 필치에 꾹꾹 눌러 새겼다. 제주의 상처는 오래되어 깊고 깊다. '일본제국주의가 다녀간 자리에 미국제국주의가 자릴' 잡고 제주를 침탈하고 살육했다. 제주민의 1/3이 희생된 4·3 항쟁의 상흔은 아직도 처연한데, '제주도 군사기지 프로젝트'란 이름의 야만은 기어코 강정을 짓밟고 세화, 성산, 대정, 산방산을 차례대로 군사기지화 하려고 한다.


이 험한 세월에 시인 김근은, 제발 '그대, 강정'이 무사하길 기원한다.


당신, 무사한가요. 저는 묻고 또 물을 것입니다. 봄이 이제 막 도착하는 그곳에서 구럼비 검은 바위들과 함께 우뚝우뚝 힘을 내고 있을 당신께 언제까지고 무사한가요, 물을 겁니다. 당신과 내가 무사할 날을 위해서. 무사히 돌찔레 한 송이 이 봄에도 피워 내기 위해서. 우리 모두 무사하기 위해서, 평화롭기 위해서. 당신, 무사한가요.(30쪽)


작가들은 또한 스스로 '육지 것'이 되어 마치 죄인처럼 사죄하고 용서를 구한다. 시인 박형준은 '한때 마음속에 이상으로 남겨 두고 싶은 섬',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낭만의 섬'으로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동경의 장소였던 제주가 '우리 현대사의 가장 아픈 상처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시인 김희정은 기껏 육지에서 강정 소식만 애닯게 듣고 안타까워 할 뿐인 자신의 '비겁하고 용기 없는 일상'을 원망한다.


시인 전영관은 스러져가는 강정의 슬픔을 목도하며 '사랑한다, 미안하다'고 읊조리듯 고백한다. 그리고 생채기난 연인의 몸둥아리를 보듬어, 이젠 '그대'와 함께할 것을 다짐한다.


다할 것 없어 아름다운 그대의 안위를 보호하겠다. 사랑은 사람의 일이고 사람의 바깥에서 번지는 눈물이지만 어깨 겯고 체온을 나누듯 함께여야만 한다. 그대의 허리가 부러지고 인대가 끊어지고 늑골 사이마다 거친 발자국이 찍혀도 끝장은 아니다. 눈물로 염장된 내력이라서 누대를 두고도 지속될 그대이기 때문이다. 그대, 강정, 제주.(183쪽)


희망은 기적을 모색한다


대추리와 매향리, 용산참사, 두리반과 마리, 재능교육,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 두물머리와 내성천, 영주댐을 둘러 강정까지, 시인 송기역은 '가느다란 빛을 만드는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 되새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평화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운다.


지구별 어디에도 외부인이란 없습니다.(109쪽)


그 빛을 따라 걸었던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신부를, 시인 김은경은 이렇게 추억한다.


신부님은 늘 비 내리는 한가운데에 계셨지요. 빗속에 선 사람에게 우산 하나 내미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음으로써 기꺼이 고통을 함께 하셨지요. 지금 이 비는 생명을 살리고, 숨을 틔우는 비가 아니라 폭력과 살육을 부르는 공포의 비입니다. 그 무지막지한 빗줄기에 구럼비 바위가 폭파되었고 아름다운 올레길이, 붉은발말똥게와 연산호 군락지도 파괴되고 있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심정은 비바람에 갈가리 찢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그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방패막이를 하고 계십니다.(50쪽)


그리고 시인 김선우는 문정현 신부에게서 움튼 작은 기적을 주목한다. 문정현 신부는 지난해 4월 초, 강정 마을 방파제 7미터 아래로 추락했다. 모두가 불길한 비극을 예감했지만, 노 신부는 입원 13일 만에 일어나 다시 강정으로 돌아왔다. 사고 당일, 포구에서 기도할 때 쓰던 깔개가 바람에 날려 방파제 밑에 '먼저' 떨어져 있었고, 그 깔개가 노구의 사제를 받아내었던 까닭이다. 시인은 그것을 '기적'이라 부른다.


칠십 노구의 사제를 받아 낸 그 기도용 깔개에 대해 생각합니다. 고마워해야 할 것들은 대개 이렇게 바닥에 있는 것들이더군요. 어쩌면 기적은 멀리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42쪽)


시인의 희망은 결코 멈출 생각이 없다. 기어코 또 다른 기적을 모색한다.


이 땅의 작가들은 강정 마을을 책으로 포위하려고 합니다. 무기와 군함이 아니라 책으로! 전쟁이 아니라 평화로! 군대가 아니라 문화예술의 축제로! 강정 마을 전체를 평화의 도서관으로, 평화의 책마을로 만들려는 꿈이 시작되고 있는 여기가, 또 한 번 기적의 자리입니다. 맨 밑바닥에 무릎을 모은 기도용 깔개 위로 강정의 노을이 지고 또 태어납니다. 어서 오세요, 당신도 함께해 주세요.(44쪽)


기적을 향한 희망의 연대, 그 시작



작가는 무릇 시대를 앓는 사람이다. 숱한 연민은 애끓는 고통으로 자승자박하여 마침내 숭고한 아름다움에 이른다. 그렇게 잉태된 문학은, 시대의 슬픔을 치유한다. 작가의 영민한 시선은, 폐허의 참상을 딛고 극복할 희망을 탐색하고 통찰하고 선동한다. 412명의 작가가 동참한 강정 평화책마을의 베이스캠프인 <평화책방>이 지난 4월 6일 문을 열었다. 기적은 그렇게 현실이 되어간다.

이 책의 인세와 출판사 수익금 일부는 '제주 팸플릿 작가'의 팸플릿 제작비와 강정 평화활동에 쓰인다고 한다. 이 책은 기적을 향한 희망의 연대, 그 시작일 뿐이다. 작가들은 평화책마을로 해군기지를 에워싸고, 주민들과 활동가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작가들의 번뜩이는 문장은 나 같이 먼곳에서 그저 마음 조리며 강정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마음까지 추동할 것이다.

책의 갈피마다 자리잡은 사진 작가들의 작품은, 강정과 구럼비, 그리고 '그곳' 사람들의 얼굴을 가식 없이 담아낸다. 그들과 수줍게 눈 맞추며, 나의 마음은 어찌 할지 모를 난처함으로 그만 마음을 뺏기고 만다. 연애의 감성이 가슴을 북돋는다. 큰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서평]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_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송태욱 옮김|자음과모음|2012)

밤은 '열정적 고독'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다. 고독은 반드시 가슴 속 깊은 열망에 닿아야 한다. 고독을 담보한 혁명은, 허튼 교만을 전복시키는 처절한 성찰이자 진리에 대한 곧은 결기다. 책 읽기는 열정적 고독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부제는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다.

책 읽기는 곧 혁명의 역사다

일본의 니체로 주목받는 철학계의 신성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제목부터 섬뜩하고 도발적이다. 파울 첼란의 시에서 차용한 것으로, 언뜻 느껴지는 첫 인상과 달리 이 제목의 본의는 '전진'에 있다. 손의 절연은, 더 이상 지금까지의 세상에 안주할 수 없다는 굳은 결의의 은유다.


폭력적 혁명 이전에 텍스트가 있었으며, 혁명의 근본은 읽기에서 비롯되었다.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읽기가 곧 혁명이 된 역사적 사례로 루터와 무함마드, 그리고 12세기의 '해석자 혁명'을 제시한다.

농민의 아들이었던 루터는 성서를 읽고 또 읽으며 그것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세상의 지배 권력에 맞선 새로운 변혁의 중심이 되었다. 동굴에서 기도하던 무함마드에게 나타난 대천사는 읽으라고 명령하고, 문맹이었던 그는 기어코 읽음으로 <코란>은 탄생하였다.

12세기 '해석자 혁명'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발견되고, 600년 가까이 묻혀있던 로마법을 교회법으로 새롭게 고쳐 쓰는 과정을 통해, 그라티우스 교령집이 완성되었다. 중세 해석자들은 세례, 교육, 혼인, 성범죄, 고아와 과부의 사회적 약자 보호 등에 대한 '삶의 규칙'을 세웠다. 이를 기반으로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교회가 세워지고, 이는 곧 근대 과학의 기틀이 되고 근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읽기가 혁명이 될 수 있는 이유

그는 읽으라는 말을 듣고 읽었고, 쓰라는 말을 듣고 썼으며, 그리고 시를 읊은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본문 139쪽)

저자에 따르면 문학은 곧 혁명의 근원이다. 여기에서 문학은 어떤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의미있는 텍스트를 읽고, 글을 쓰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이 문학이며, 혁명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해석하며 고쳐 읽는다는 것이며,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다시 쓴다는 것이다.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의미이고, 그것은 곧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이처럼 혁명은 읽고 쓰고 변혁시키는 것이다.

읽기가 혁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읽음으로써 독자는 더 이상 이전의 삶에 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이제껏 내 삶의 허위에 격렬히 도전한다.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읽고 있는 자신과 세계가 동시에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며, '책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를 묻고 시험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책 읽기가 혁명이 되지는 않는다. 치열한 책 읽기가 꺾을 첫 번째 대상은 언제나 내 자신이다. 저자는 '책을 읽고 말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과감히 그것에 굴복시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학문에 종사하는 숱한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로만 배설하는 '교양인'으로 전락했지만, 저자는 니체를 통해 그 모순을 극복한다. 텍스트로 하여금 내 무지를 드러내어 먼저 내 삶을 변혁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의 책을 읽었다기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본문 34쪽)

책 읽는 시간은 늘 시작이다


독서 인구는 점점 줄고 있으며 노령화 되고 있다는 최근의 통계는 이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한국방송(KBS)과 한국어진흥원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도서 40권을 출제 범위로 선정하여 시험과 경쟁을 통해 독서왕을 선정하겠다는 <KBS 어린이 독서왕>이란 '무식한'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란다. 설마 그럴리야 있겠냐마는, 어떤 상업적 이권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면 어찌 이런 프로그램인지 가능한 지 모르겠다. 나는 종종 우리나라의 국어교육이 없었다면 좀더 훌륭한 문학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했다. 이런 서글픔이 압도하는 요즘, 4월 23일은 무려 "책의 날"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단호한 문장으로 '문학의 종말'을 촉발하는 이들에게 일갈한다. 문학이 끝났다는 주장은 도스또옙스키, 톨스토이 등의 위대한 이름에 대한 모욕이라고. 문학은 스스로 혁명가로 자처하되, 텍스트의 한 행이라도 놓치지 않고 치열하게 읽고 다시 쓰며 삶을 바꿔가는 독자들에게로 그 당위를 계승한다.

당연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예술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왜 쓸까요? 왜 계속 쓰는 걸까요? 계속 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리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본문 251쪽)

그리고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며 책 읽는 벗을 위로한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라고. 그러니 '용기를 잃으면 안 된다고,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고 말이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밤에 시작한 책은, 어느덧 닷새 째 밤에 이르렀다. 초초했던 저자의 고독은 어느새 새로운 희망을 가늠한다. 책 읽는 시간은, 늘 그렇게 시작이다.

자, 마지막 밤도 깊은 것 같습니다. 이제 별들도 반짝이고 여름이 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밤은 없습니다. 밤은 늘 시작입니다.(본문 27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신경숙 짧은 소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를 향했던 그리움을, 이제 '타자'에게 허락하자고
[서평] 신경숙의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신경숙은 어느날 무심히 올려본 말간 밤하늘에 둥그렇게 뜬 달을 보았다. 어떤 날은 보름달이고, 어떤 날은 초생달이고, 어떤 날은 구름에 뒤처져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달이 보기에 '나'는 티끌 같은 존재이겠으나, 달은 '나'를 콕 집어 말을 건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따뜻하고 명량한 '달의 말'처럼, 작가는 독자에게 편지 같은 짧은 소설을 쓰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내게, 당신이란 존재는 언젠가 내가 읽었던 아픈 책을 같이 읽은 사람이다. 그 사람을 나는 당신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이미 읽은 어떤 책은 앞으로 내가 읽을 것이다. 달에게 먼저 전해진 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이 가능하면 당신을 한번쯤 웃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봄날 방을 구하러 다니거나 이력서를 고쳐쓸 때, 나 혼자구나 생각되거나 뜻밖의 일들이 당신의 마음을 휘저어놓을 때, 무엇보다 나는 왜 이럴까 싶은 자책이나 겨우 여기까지? 인가 싶은 체념이 당신의 한순간에 밀려들 때, 이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달빛처럼 스며들어 당신을 반짝이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본문 210쪽, 작가의 말)

<외딴방>, 그리고 나의 이야기

1979년 4월 3일, 아버지는 암으로 소천(召天)하셨다. 그즈음 집에는 친척들의 발걸음이 잦았고 어머니는 종종 소리 내어 우는 누나를 달래곤 하셨다. 난 아버지의 냄새가, 가래 끓는 소리로 탁하게 갈라진 낮은 목소리가 싫었다. 담배 냄새 절은 삼촌들이 얼굴을 부벼대는 것도 싫었다. 

집앞 골목에서 세발 자전거를 타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들었다. 난 뭔지 모를 해방감에 잠시 기뻤던 것 같다. '아, 무서운 아버지께 불려가 그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는구나', '저 친척들도 이제 우리집을 떠나겠구나' 생각했다. 주정하던 삼촌들 몰래 실실 웃기도 했던 것 같다. 훗날 지독한 가난을 만날 때마다, 거친 노동에 지친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밤새 들을 때마다, 그때 내가 버릇없이 웃었기 때문일 거라고, 그래서 우리집이 벌받는 것이라고 자책했다.

아무튼 난, '두려움'이란 것을 그때 처음 만났다. 어머니의 곡소리,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고 힘겨워 하던 두 살 터울 형의 슬픈 얼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낯선 두려움이다. 비포장 도로를 두어 시간 달려 장지에 도달하기까지, 난 몇 번 토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기까지 그렇게 멀미를 했다. 가슴이 파도처럼 일렁일 때마다 그 막막한 슬픔을 생각했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차를 타면 언제나 잠을 서둘러 청했다.

오늘 추도예배를 드리러 천안을 오가며,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정 넘어 도착하여 곤히 잠든 딸 예지를 안아 옮기면서 그때의 시간들을 복기한다. 스치듯 재연되는 회색빛 골목, 우리집 담장 밑으로 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난 아침마다 일어나 그 민들레에게 말을 건네곤 했다. 마치 내 딸 예지가 그러는 것처럼. 그런데, 아버지의 시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그 민들레는 잊기로 했다. 잊기로 했던 그때의 다짐이 생각났다. 그것은 마치,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사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 역시,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첫째딸 예지보다 한 살 어린 나이에 겪은, 내 나이 여섯 살 때의 일이다.

고달팠던 청소년 시절을 지나 스무 살 언저리에 입대한 군대에서 저녁마다, 신경숙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도 그의 소설 <외딴방>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가을에 입대하여 이듬해 여름이 시작될 즈음, 필사를 마쳤다. 열여섯에서 스물까지 문학을 꿈꾸며 독한 가난과 속절없는 패배를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던 <외딴방>의 주인공 '나'는, 작가 신경숙이 아닌 독자인 나의 현현(顯現)으로서 유효했다. 작가는 내게, 절망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자 소명이라고 다독였다.

신경숙은 "그리움이란 멀리있는 너를 찾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너를 찾는 일이다. 너를, 너와의 추억을 샅샅이 끄집어내 내 가슴을 찢는 일이다"라고 썼다. 꿈을 품는다는 것은, 가슴을 찢는 그리움 같은 것이다. 어떤 꿈은 필사적이다.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 고통을 잊기 위해, 살기 위해 품는 꿈이 있는 법이다. 어떤 꿈은 위태롭게도, 숱한 절망과 동거한다. 통쾌한 승리는 사실, 이 세상에서 거의 만나기 힘든 로또복권의 행운에 가깝다. 

스물여섯 편의 반짝이는 위로


나는 신경숙을 통해, 내 오랜 꿈, 혹은 오랜 절망과 마주했던 것 같다. 드문드문 발표되는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걷던 길을 멈추고 서성이다 결국 주저 앉곤 했다. 그것은 마치 고해성사와도 비슷했다. 가슴속 깊이 숨겨 놓았던 내 자신을 꺼내 놓는 일이었다. 아버지 추도예배를 다녀온 날, 늦은 밤부터 신경숙의 신작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 단편은, 이전 소설과는 좀 다르다. 고독한 나를 토닥토닥 다독인다. 그것도 살갑게. 

걷다보면 지금보다는 지난 일들이 투명하게 되비쳐오는 때가 잦아 나도 모르게 깊은숨을 쉬곤 하지. 바람은 거울인지도 모르겠어. 어떻게 그걸 이겨내고 이 시간으로 오게 되었을까 싶은 일도 그냥 담담하게 떠오르곤 해.(본문 189쪽) 

스물여섯 단편들은 각기 다른 소재로 반짝인다. 간혹 똑같은 주인공이 그 뒷이야기를 이어가기도 하지만, 스물여섯의 서사는 어쩌면 모두 어떤 식으로든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그 평범한 일상스러움 때문일까. 어떤 이야기라도, 내가 그 틈에 끼어 화자가 되고 '고양이 남자'나 'N'이나 'P'의 친구가 되는 일 즈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인 양 자연스럽다. 

타자에 대한 시선은 내내 그 따뜻함을 유지한 채 말을 건넨다. 철없는 젊은 목사와 성깔있는 스님 간의 싸움 와중에도,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길고양이들에게도, 고양이들의 먹이를 앗아가는 까치들에게도, '재수생 선'에게도, 시골에서 아침마다 전화하시던 엄마에게도, 심지어 담벼락을 넘다 걸린 도둑님에게 건넨 시선마저도, 그 온기는 여전히 따습다.

신경숙은 자신과 지금껏 동행했던 독자를 '당신'이라 부르며, 이젠 오래도록 외롭던 그들의 슬픔을 달래고 있는 듯 보인다. 아득한 먼 옛날 들었던 '너 참 예쁘다'란 칭찬을 문득 추억하게 만들고, 사랑하는 누나를 가로챈 동기 녀석의 질투를 이해하게 만들고, 밥벌이에 쫓겨 소홀했던 늙은 어머니의 외로움에 다가서는 법을 슬며시 알려 준다. 

그런가 하면, 평생 돈과 명예를 위해 쉴틈없이 달렸던 한 노인에게 다가온 아득한 회한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묻게 만든다. 지금 잘 살고 있냐고, 정말 그러하냐고 묻는다. 그리고 화가가 되고 싶은 '재수생 선'에게 고흐의 말을 빌어 이렇게 당부한다.  

네가 미래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네가 고통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한 것들은 저절로 너의 행복을 넘어서 타인에게도 선하고 쓸모 있는 것이 될 거야. 그걸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미래에 네가 그리는 그림이 너의 행복을 넘어서 타인에게도 선하게, 쓸모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본문 31쪽)

이제 타자에게 나의 그리움을 허락하자고

아버지의 기일을 맞이할 때면, 늘 오랜 죄책에 시달리며 절망을 떠올리곤 했다. 투쟁하듯 일 속에 매몰되었던 삼십 대를 지나고, 불현듯 주어진 공백 같은 시간들을 마주하며 당혹해 하고 있다. 어떤 선배가 "인생의 숙명이 죽음이듯이, 직장인의 숙명은 퇴사"라고 하였다. 숙명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막다른 곳에 이른 숙명은 새로운 운명을 모색한다. 꿈은 절망과 동거한다. 다시, 또 그렇게.

그즈음, 신경숙은 나에게 타자의 이야기를 건넨다. 그리고 난 '재수생 선'처럼, 그의 이야기를 가슴에 새긴다. 심각한 표정으로 인생의 고단함과 세상의 거대한 음모를 슬쩍슬쩍 내비치던 나의 서사들이, 그 앞에서 허물어진다. 어떤 담론에 압도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의 너른 품속에서 공격과 방어의 패턴을 잃고 일탈한 까닭이다. 무너진 나는, 그저 그 품에서 위로받고, 또다른 타자에게 시선을 향한다.  

타자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뜻밖에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해.(본문 20쪽)

이름도 없이, 물질적인 풍요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이, 그러나 열 손가락을 움직여 끊임없이 물질을 만들어내야 했던 그들을 이제야 내 친구들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나의 내부에 퍼뜨린 사회적 의지를 잊지 않으리. 나의 본질을 낳아준 어머니와 같이, 익명의 그들이 나의 내부의 한켠을 낳아주었음을... 그래서 나 또한 나의 말을 통하여 그들의 의젓한 자리를 세상에 새로이 낳아주어야 함을...(<외딴방>, 419쪽)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껏 신경숙의 소설과는 사뭇 다른 곡조이나, 결국 작가는 같은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나'를 향했던 그리움을, 이제 '타자'에게 허락하자고. 그것이 나의 인생을, 우리의 세상을 반짝이게 할 것이라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