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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속죄의 저편 - 정복당한 사람의 극복을 위한 시도
장 아메리 지음, 안미현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복음과상황 11월호_“독서선집”
●복음과상황(link)에는 원고가 넘쳐 본문을 조금 들어냈습니다. 블로그엔 전문을 싣습니다.
불의한 역사의 전복을 위한 시도
<죄와 속죄의 저편>(장 아메리 지음│안미현 옮김│길 펴냄│2012년)
장 아메리의 본명은 한스 차임 마이어다.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한 유대인으로,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벨기에로 이민갔다. 이후 반나치즘을 위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943년 7월 체포되었고,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등의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 1945년 종전과 함께 석방되었다.
벨기에에서 체포된 유대인 2만5000여 명 중 겨우 615명이 살아 남았으며, 아메리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한 사람 때문에, 엄혹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 냈지만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었다. 바로 그의 아내였다.
1955년, 그는 자신의 이름 마이어의 철자를 뒤집어 장 아메리란 이름으로 바꿨다. 이처럼 이름을 바꾼 것은 세상이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도록 강요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일례였다고 한다(199쪽, 옮긴이 해제 참조). 결국 그는 1978년 “자유죽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감히 견줄 수 없는 고통을 가진 사람
고통을 사변적으로 해석하거나 위로하는 것만큼 위태로운 것도 없다. 또한 그 고통에 대한 기억을 충분히 극복하지 않은 채 수행하는 용서만큼 헛헛한 것도 없다. 아메리에 의하면, 잘못된 과거에 대한 나태하고 값싼 용서는 그 자체로 부도덕한 것이다. 이러한 아메리의 비타협적 사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한 고통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등에서 극심한 고문을 당했던 저자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집필한 다섯 편의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저자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솔직하다고 장담해도” 좋다고 서문에서 밝히지만, 독자들은 텍스트를 따라 읽으며 ‘충분한’ 불편함에 직면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고통이라 부를 수 없다. 감히, 아메리의 고통에 견줄 수 없는 까닭이다.
그의 정신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완전히 홀로’ 고립되고 죄절했다. 합리적이고 분석적 사고는 곧바로 “자기파괴라는 비극적 변증법”으로 추락했다. 수용소에선 친위대의 논리가 매시간 현실로 입증되었고, 그들은 수많은 죽음을 양산했다. 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불가능했고 언어는 그 가치를 상실했으며, 감정은 육신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했다. 지식인의 사유는 더욱 고통스런 절망으로 추락했다.
모국어를 낯설어 하며, 유대적 전통을 따르지도 않고, 히브리의 신을 믿지도 않는 그는, 나치스에 의해 ‘유대인’으로 강제된 정체성으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웠다. 인종적 통념은 그 자체로 폭력이었으며,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사건”인 동시에 “근원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 자체가 아니라,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공포였다. 특히 생물학적 육체가 허물어질 때, 정신은 그 공포 앞에 처참히 무너졌다.
내 몸의 경계는 내 자아의 경계이기도 하다. 피부는 외부 세계에 대해 나를 보호한다. 내가 신뢰를 가지려면 내 피부의 표면에서 내가 느끼고자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첫 번째 구타와 함께 세상에 대한 이 같은 신뢰가 무너진다. 내가 세상에서 신체적으로는 반대하지만, 경계로서의 내 피부의 표면에 접촉하지 않는 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은 그 첫 번째 구타로 내게 자신의 육체성을 강요한다. 그는 내게 접촉함으로써 나를 파멸시킨다. 그것은 강간, 곧 두 당사자 중 한 사람의 동의가 없는 성행위와 같은 것이다.(71쪽)
22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에세이를 쓰면서도, 아메리는 그 경험을 “한 인간이 내면에 간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규정한다. “병리적이고 객관적인 흔적을 입증할 수 없다 하더라도 고문은 그 속에서 소멸되지 않은 채 타오”른다. 고문의 경험은 소멸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절멸의 수치심”으로 세상을 낯설어 한다.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첫 번째 구타에서, 그러나 전체 범위에서는 결국 고문 속에서 무너진 세계에 관한 신뢰는 다시 얻어지지 않는다. 이웃을 적대자로 경험했다는 것은 고문당한 사람 속에 경악으로 굳어진 채 남아 있다. 그 누구도 그것을 넘어 희망의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91쪽)
값싼 용서 너머 원한의 수사가 필요한 시대
1945년 종전 이후, 나치 전범에 대한 재판은 1950년에 시작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력화되었다. 1963년부터 1965년에 걸쳐 아우슈비츠 재판이 열렸지만, 대부분의 전범들은 명령에 따른 복종이었다는 이유로 무죄로 판결되거나 최소한의 처벌만 받았다. 그리고 아메리는 1966년 “여전히 낯설게 남아 있는 것 속으로 힘들게 더듬어 나가는 긴” 작업을 거쳐 이 에세이들을 썼다. 저자로 하여금 20여 년간의 긴 침묵을 깨고 이 고통스런 작업을 수행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네 번째 에세이 <원한>에서, 우리는 그 이해의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아메리는 ‘나태하고 값싼 용서’와 타협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말고, 보다 나은 공동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평화의 합창에 화음을 맞출 수가 없다”. 심지어 “사회적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용서와 망각은 부도덕”한 것이라고 일갈한다.
나는 내 가해자와 공범이 되기를 원치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자신을 부정하고 그 부정 속에서 내게 자신들을 맞출 것을 요구한다. 나는 내면화 과정에서 그들과 나 사이에 놓여 있는 시체 더미를 치울 수 없고, 정반대로 역사적 실천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을 현실화함으로써, 더 분명히 말하면 그것을 해결을 통해서만 화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142쪽)
‘나태하고 값싼 용서’는 정의를 거스른다. 역사는 그 병리적 양태로 반복하고, 또다른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며 절멸의 수치심을 양산한다. 그로 인해 우리의 역사도 비틀거리며 지금까지 왔다. 가해자의 후손은 그렇게 다시 권력을 거머쥐고 세상을 호령한다. 아메리처럼 “자유죽음”마저 선택할 수 없는 무고한 이들의 상흔은 오늘만큼 더 깊어진 채 비극의 서사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