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1+2집 17종세트 (17disc)
스크린에듀케이션(DVD)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기적은 결코 빨리 오지 않는다

빨간머리 앤의 희망이 되어준 사람들




오직 가진 것이라고는 상상력뿐인 한 소녀


자신의 존재를 깨닫기 전부터 이미 고아였던 아이, 부모를 잃은 상실의 아픔을 타고난 아이, 너무 어린 나이에 삶의 고독과 고단함을 알아버린 아이… 그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스쳐 지나는 보잘것없는 사물과 풍경 하나하나에 이름을 부여하고 상상을 덧붙여 온갖 희망을 재잘거린다. 그 재잘거림에 어떤 사람들은 좀 모자란 아이로 여기기도 하고, 또 어떤 어른은 고아라서 그런다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고아인 그 아이는, 못생기고 주근깨투성인 데다가 머리마저 사나워 보이는 빨간색이었다. 빨간머리 앤의 이야기다. 


한적한 시골 마을 에이번리에 살던 독신 남매 매튜와 마릴라는 노동일을 도울 남자아이가 필요했다. 하지만 착오로 앤 셜리라는 여자아이가 오고, 마릴라는 돌려보내려고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한다. 앤이 살게 된 초록지붕 집은, 그 아이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적이었을 것이다. 앤은 사과나무 가로수 길에게 기쁨의 하얀 길이라는 이름을, 밸리 아저씨의 집 앞 호수를 지나치며 반짝이는 호수라는 이름을, 창 밖으로 하얀 꽃잎으로 흩날리는 벚꽃 나무에겐 눈의 여왕이란 이름을, 창가를 지키는 화분에겐 포니라는 이름을 선사한다. 이름을 갖게 된 풍경들은 의미가 부여된 어떤 존재들로 회복된다. 하루하루 버티기 힘든 지난한 일상의 찰나가 기쁨의 일상으로 변주된다. 앤의 상상력은 버려진 자신의 존재를 추스리는 힘겨운 희망이었고, 가까스로 주어진 첫 번째 기적을 살아내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영화 "빨간머리 앤"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앤의 희망이 되어준 사람들


사실 앤의 희망은 힘겹고 실낱 같은 것이었다. 홀로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앤에게는 마릴라 아주머니가 있었다. 앤과는 달리 섣부른 희망은 입에 담지 않는다. 그녀에게도 사랑하던 연인이 있었다. 그녀의 첫사랑은 훗날 앤의 라이벌이자 연인이 되는 길버트의 아버지였다. 첫사랑을 잃은 마릴라는, 평생 홀로 살아간다. 고요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자기에게 주어진 숙명을 바르게 곧게 살아간다. 정직과 원칙에 집착하는 그녀의 태도는 아마도 그 숙명에 대한 성실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애초 남자아이를 원했으나 여자아이가 집에 왔을 때, 그 착오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허나, 그 여자아이가 인정사정 없이 매몰찬 가정으로 끌려가는 것도 끝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앤은 그녀의 아이가 된다. 


열한 번째 에피소드 사라진 브로치 편은 앤과 마릴라의 관계에 하나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을 다룬다. 아무도 없는 마릴라의 방에 브로치가 놓여있다. 우연히 앤은 그 브로치를 발견하고 언제나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리고 잠시 뒤, 마릴라는 브로치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앤을 다그치기 시작한다. 마침 다음날은 교회 소풍이 있는 날이었고 앤은 평생 처음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브로치를 만졌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앤은, 더욱이 신뢰하기 힘든 고아였던 아이였기에, 마릴라의 의심과 벌은 합당해 보였다. 자신이 누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앤도 속이 타지만, 거짓말하는 앤을 바라보는 마릴라의 속도 탄다. 앤은 거짓 자백을 준비하고, 마릴라는 집안 일을 끊임없이 만들어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며 자신의 원칙을 지켜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없어진 듯 여겼던 브로치가 우연히 발견되고, 앤은 누명을 벗고 가까스로 소풍에 간다. 마릴라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다. 그리고 앤의 거짓 자백을 회상하며, 앤에 대한 편견을 거두기 시작한다. 


저런 아인 여태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요. 오라버니 말대로 확실히 재미있는 아이이기는 하군요. 나까지 저 아이가 다음엔 무슨 말을 꺼낼 건가 하고 기다려지거든. 나한테도 마법을 걸 작정인 게지.


마릴라 아주머니는 엄하고 보수적이었지만,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정직과 성실함, 그리고 삶의 원칙들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혼란스러웠을 어린 앤에게, 변치 않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앤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앤은 어느덧 성장하여 어른스러운 눈빛을 가진 예의 바른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면 마릴라는 되려 쓸쓸한 마음을 읊조린다. 


마릴라는 문득 앤이 훌쩍 커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지 못한 사이에 앤은 숙녀가 다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앤에 대한 대견함은 표현하기 힘든 그리움으로 바뀌어 버린다. 작고 깡마른 몸에 커다란 눈을 하고 머릿속에 뭉게구름처럼 떠도는 모든 상상을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아이가 어느 사이엔가 다소곳한 숙녀의 모습을 하고 자신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품속에서 언제나 그렇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보호가 필요하지 않을 것처럼, 조금은 생소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앤의 달라진 모습은 마릴라에게 가슴 한 곳이 허전해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허전함은 침묵 속에서 깊어지고 밤의 정적 속에서 목메는 슬픔으로 바뀌어 버린다.


앤도 어느새 숙녀가 되었지만, 마릴라도 어느새 앤의 어머니가 되어있었다. 마릴라는 앤이 더 이상 자신의 보호가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슬펐지만, 이제는 앤이 그녀의 필요가 되어줄 차례였다. 매튜가 죽고 마릴라가 시력을 점차 잃어가던 즈음, 마침 앤은 꿈에 그리던 에이브리 장학금을 받고 더 큰 세상으로 초대받는다. 하지만 앤은 장학금을 포기하고 마릴라 곁에, 초록지붕 집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앤은 마릴라의 기적이 된다. 마릴라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영화 "빨간머리 앤"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영화 "빨간머리 앤"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앤의 희망이 되어준 사람들은 또 있다. 매튜 삼촌이 그러하다. 언제 다시 고아원으로 쫓겨날지 모르는 낯선 집에서, 언제나 앤의 편이 되어주었다. 마릴라가 엄격한 훈육으로 앤을 가르쳤다면, 매튜는 늘 용서하는 엄마의 사랑으로 앤을 품었다. 앤이 가장 많이 한 대사 중 하나, 제 기분을 알아주시는 군요.는 늘 매튜에게 하던 말이었다. 어린 소녀 앤이 가장 간절히 받고 싶어하던 소매 부푼 옷을 사온 것도 결국 매튜였다. 


평생의 벗이 되어준 다이아나. 처음 교회에 간 앤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산다. 초라한 옷차림, 붉고 노란 꽃으로 장식한 모자, 그리고 고아란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교회나 주일학교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앤에게, 다이아나는 상상 이상의 친구였다. 무엇보다 다이아나는 소매가 부푼 옷 따위로, 고아라는 이유로 편견을 갖지 않고 앤을 대했다. 무엇보다 다이아나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다이아나가 빌려주는 책들로 인해, 앤의 상상력은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다. 물론 둘은 성장하면서 싸우기도 하고 잠시 헤어지기도 하지만, 어렸을 적 앤의 곁에 다이아나가 없었다면 앤의 낭만과 상상력은 금새 좌초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버트 블라이스. 짓궂은 장난꾸러기 길버트는 한때 앤의 앙숙이었다. 열네 번째 에피소드 교실소동에서, 길버트는 앤의 빨간머리를 잡아 당기고 홍당무라고 놀려, 앤의 트라우마를 제대로 건드린다. 그리고 이후 둘은 학교에서 장학금을 두고 다투는 라이벌로 티격태격한다. 하지만 앤이 에이브리 장학금을 포기하고 초록지붕 집에 남기로 결정했을 때, 길버트는 에이본리 소학교의 교사 자리를 앤에게 양보하고 둘은 점차 연인이 되어 간다. 



ⓒ영화 "빨간머리 앤"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영화 "빨간머리 앤"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신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안하도다


빨간머리 앤은 고아였던 한 아이가 자신에게 숙명처럼 주어졌던 절망들을 이겨내고 한 성숙하고 지혜로운 여자로 자라가는 성장 드라마이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던 상상력 많은 앤은 그저 철없고 못생긴 수다스런 아이였을지도 모른다. 희망에 대한 앤의 상상력이, 앤이 그처럼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숙하게 된 가장 큰 동력이었을 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녀의 곁에는 늘 변함없는 원칙과 정직, 성실함으로 보살피는 마릴라와 매튜가 있었고, 편견없는 우정으로 자신을 대하는 다이아나가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기꺼이 내려놓는 길버트가 있었다. 그들 때문에, 앤의 트라우마는 치유되고, 앤의 희망은 기적처럼 이루어졌을 것이다. 


우리 곁에 희망이 필요한 숱한 사람들이 있다. 고아 앤과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 있다. 대물림 되는 가난이란 숙명에 맞서 저항하거나 바둥대는 사람들이 있다. 뜨거워야 할 스무 살 언저리의 청춘이지만, 세상에서 그저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이미 늙어버린 청춘들도 있다. 그리고 쌍용차, 한진, 용산, 재능교육, 콜트콜텍, 대추리, 강정마을 등에서 권력에 맞서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가련한 백성들이 있다. 희망이 필요하나 희망이 아득한 아픈 사람들이 있다. 


2011년, 2012년 한국의 출판계를 압도한 단 하나의 키워드가 힐링이었다고 한다. 새로운 정권이 내세우는 청사진에도 불구하고 경기 불황은 지속되고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양극화도 더욱 심화될 것이고, 이 땅의 불의는 더욱 그 위력을 과감히 드러낼 것이다. 숱하게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는 결코 힐링의 구원자가 되지 못한다. 값싼 힐링이 지나간 자리엔 더욱 허망한 허무만이 세상을 탓할 뿐이다. 


힐링은 결코 빨리 오지 않는다. 오랜 세월, 우리를 둘러싼 온갖 절망스런 조건과 환경들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상상력 속에서 그 희망은 비로소 싹틀 것이다. 그리고 우리 곁에서 편견 없는 사랑과 우정으로, 우리의 한줌 희망을 위로해주고 북돋는 사람들로 인해 그 희망은 기적에 다다를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벗이 되자. 숱한 빨간머리 앤의 허물없는 길벗이 되자. 물론 낙관할 수 없다. 결코 앤의 희망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빨간머리 앤을 다시, 같이 읽고 같이 보자고 권하고 싶다. 혹시 아는가? 앤딩 장면에서 앤이 인용한 브라우닝의 시처럼, 우리도 신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안하도다.라는 고백을 갖게 될지.  



ⓒ영화 "빨간머리 앤" 공식 홈페이지 갈무리


ps.

어렸을 적, 텔레비전 만화와 동화책으로 빨간머리 앤을 보며 감동하던 추억을 기억하며, 일곱 살 딸 아이에게 빨간머리 앤을 보여주었다. 딸 아이는 만화를 보며 자주 앤의 처지가 되어 마음을 조아리고, 난 되려 마릴라 아주머니의 처지가 되어 마음 조아리게 된다. 마침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개봉했다니 가까운 시일 내에 딸과 함께 극장에서도 빨간머리 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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