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고전의세계 리커버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신념에 대한 통찰이 놀라웠다. 모든 사람들이 신념을 갖는 순간, 그 신념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 - 맹목적인 믿음은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명제에 대한 의심이 있어야 그 명제를 더욱 철저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는 곧 사회의 다양성이 많은 게 좋다는 사상으로 이어지고,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맞는 삶을 살게 하는 게 좋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정말 좋은 책이다. 다만 왜 사회주의를 지지했는지는 의아하지만 -사회주의야말로 파시즘을 통해 전 사회가 같은 사상을 갖게 되는 것 아닌가?- 아마 지금도 살아 있다면 사회주의를 옹호하진 않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종횡무진 한국사 2 - 조선 건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시리즈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시의 논리에도 약소국의 운명을 강대국들끼리 멋대로 결정하는 것은 비열한 책동이었으므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20년 뒤인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
桂太郞(1848~1913)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특사인 윌리엄 태프트
William Taft
와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교차 승인해주기로 약속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조선을 소유했다는 뜻이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소유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니,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는 순간 이미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셈이다.

어차피 국왕도 책임을 회피한 마당에 대신들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모두 여덟 명의 주요 대신들 가운데 다섯 명이 찬성함으로써 을사보호조약
乙巳保護條約
이 통과되었는데, 이완용과 이지용, 이근택
李根澤
, 박제순
朴齊純
, 권중현
權重顯
이 바로 을사오적
乙巳五賊
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이듬해1월에 을사조약을 주도한 일본 공사관이 해체되고 통감부
統監府
가 성립되었다. 이제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속국이 되었으므로 공사관 대신 정식 지배 기관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과연 통감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공사관의 위상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 정부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니까.

당시 유럽 세계에서 태풍의 눈은 독일이었다. 뒤늦게 국가 통일을 이루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나선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전 세계의 식민지 분할이 사실상 완료되자 누구보다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같은 처지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맺고 형세의 역전을 도모했다. 그러자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에 긴장한 영국은 라이벌 프랑스에다 오랜 앙숙인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삼국협상을 맺고 삼국동맹에 대비했다. 국제적 평화회의가 필요해진 이유는 이런 유럽의 정세 때문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가1907년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를 열자고 열강에 제안하면서 고종에게 특사를 파견하라는 초청장을 보내온 것이다. 회의의 목적은 유럽에 감도는 전운을 해소하자는 것이지만 니콜라이가 굳이 종속국의 지위에 있는 조선에까지 초청장을 보낸 것은 일본에 조선을 빼앗긴 것을 억울하게 여긴 탓이었다

의병은 이미2년 전인1905년부터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 의병이 일어난 것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었던1895년 무렵이지만 그때는 사안이 일회성인 탓에 의병도 얼마 안 가 사그라졌다. 그러나 을사조약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사건이었으므로 이번의 의병은 규모에서나 강도에서나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데다 고종이 반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사태에 이르자 ‘을사의병’은 자연히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면서 한층 치열해졌다.

비록 때늦은 저항이라 하더라도 의병의 의의는 적지 않다고 해야겠지만, 의병 운동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자주독립의 취지는 높이 살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위정척사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병들의 공격 대상에는 침략자 일본과 그 앞잡이들은 물론이고 개화사상을 가진 인물들까지 포함되었으며, 이념적 목표도 외세를 완전히 배제하고 옛날의 제도를 부활시키려는 데 있었다.

40년 전의 위정척사 운동이 그랬듯이 의병 운동 역시 성리학적 세계관을 동력으로 하는 시대착오적이고 수구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동기로 거사한 게 아니라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이라는 자격으로 조선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적을 쏘아 죽인 것이므로 자신을 전쟁 포로로서 취급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테러가 아닌 전쟁이라고 밝힌 것은 그가 의병 운동과 항일운동의 본질적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의병 운동은 조선의 왕실과 옛 체제를 부활시키려 했지만, 항일운동은 ‘왕국으로서의 조선’에 집착하지 않고 ‘주권국가로서의 조선’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1910년8월22일에 데라우치와 이완용이 비밀리에 만나 합병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왕조는 건국한 지519년 만에, 왕계로 치면27명의 왕을 역사에 남기고 최종적으로 문을 닫았다.

어찌 보면1800년에22대 왕인 정조가 죽으면서 망했어야 할 왕조가100년 이상 온갖 추한 꼴을 보여주면서 쓸데없이 존속한 셈이다.

전임 통감과 달리 군 출신의 데라우치가 새 통감으로 부임했다는 것은 일본의 조선 합병 전략이 막바지 단계에 왔음을 뜻했다. 사진은 1910년 7월 23일에 데라우치가 마차를 타고 부임하는 장면인데, 다음 달에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그는 통감에서 총독으로 승진한다.

이완용이라는 조선 측 파트너가 있는 한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빼앗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매국노든 뭐든 이완용이 엄연히 조선을 대표하는 관직에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는 분명히 순종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아 데라우치와 ‘국제법상으로 하자 없이’ 합병을 조인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입장에서는 국가 간의 정치적 행위를 진행한 데 불과하다(일본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는 것과 절차의 하자를 따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허수아비라고 해도 일국의 왕과 전권대신이라면 그 지위에 걸맞은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고종의 경우도 그랬듯이, 만약 순종이 합병 조약에 끝까지 강력하게 반대했다면, 또 이완용 같은 적극적인 협력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일본의 식민지화 작업이 상당한 난항을 겪었을 게 분명하다(실제로 일본은 조약의 비준을 순종의 ‘조칙’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영악하게도 기존의 토지 소유 개념이 모호하다는 데 착안했다.
전통적으로 한반도 왕조들은 왕토 사상을 바탕으로 했다. 쉽게 말해 전국의 모든 재산, 특히 부동산은 오로지 왕(국가)의 것이므로 왕 이외에는 그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물론 조선에 근대적인 토지 소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으로 중대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사실상 모든 토지제도가 기능 마비되면서 왕토의 개념이 무너진 상태였다. 따라서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어 토지의 매매도 이루어졌다. 다만 그것이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게 아니라 관행적으로 이루어져왔다는 게 문제인데(현실적으로는 왕토 사상이 무력해졌지만 공식적으로는 조선의 국체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았다), 일본이 노린 약점은 바로 그 공식과 관행의 틈이었다

쉽게 말해 소유권을 문서로써 입증할 수 없는 모든 토지는 졸지에 임자 없는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유권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일부 농민들의 토지도 등기를 거쳐 소유권을 인정했다. 여기까지가 토지조사사업의 긍정적인 측면이다(토지 소유의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자 일본은 많은 측량사와 기술자를 파견해 한반도의 상세한 지적도를 작성했다. 이 거대한 토지조사사업은 모든 자원을 면밀히 파악하여 수탈 경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결국 수백만의 농민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영세 소작인 또는 화전민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렇게 해서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게다가 이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이름에서 ‘척식
拓殖
’이란 개척 이주를 뜻하는 말이다. 원래는 일본 농민의 조선 이주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게 도미노처럼 작용해 조선 농민의 만주 이주까지 촉발하게 되었다.

1908년에 조선과 일본 양국은 함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라는 합자회사를 만들었다. 곧이어 합병이 이루어지게 되므로 합자회사라는 사실은 별 의미가 없지만, 창립 당시 본사를 서울에 둔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우선 동척은 주로 곡창지대의 조선 농민들로부터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였다. 이 과정에는 함께 진행되던 토지조사사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등기가 불가능한 토지는 곧바로 동척의 부동산이 되었고, 등기된 토지라 해도 새로 제정된 소유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농민들은 동척의 집요한 공세에 휘말려 싼값으로 땅을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동척은 이렇게 마련한 토지를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농업 이민자들에게 팔아버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후발 제국주의 열강(동맹국)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연합국)

1914년6월28일 발칸에서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중국은 독일이라면 이를 갈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연합국 편인데, 일본은 어느 편으로 참전했을까? 제국주의의 ‘발달 수준’으로 보면 일본은 후발 제국주의에 속하므로 동맹국 측에 붙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만 지역적인 기준에서 보면 다르다. 아시아에서 일본은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연합국 측에 가담하게 된다.

전쟁 과정에서 일본은 태평양 지역에 산재한 독일의 해외 식민지들을 차례로 접수하고(후발 제국주의인 독일은 식민지 분할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서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기에 태평양의 작은 섬들에 대해서까지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어쨌든 연합국 측은 아시아에서 제 몫을 해준 일본을 기특하게 여겼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은 독일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모든 이권을 승계하고, 나아가 만주 지역의 개발권마저 차지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신흥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을 축으로 아시아의 제국주의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게 연합국 측의 의도였으니, 여기서 중국의 사정 따위는 전혀 배려될 수 없었다. 그런 탓에 결과적으로 연합국은 차후 일본의 중국 침략을 공식 승인한 셈

개전 초기부터 연합국 측에 가담해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싸웠는데도 전후의 논공행상에서는 승전국에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결국 승전의 대가가 고작 독일 대신 일본을 불러들인 것뿐임을 자각하게 된 중국 민중은1919년5월4일에 전국적인 반일 시위를 벌였다.

1919년1월에 고종이70년에 가까운 욕된 삶을 마감하고 죽었는데, 때가 때인지라 그가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하지만 식민지 세상에서 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못난 국왕이라 해도, 독살설이 헛소문이라 해도 폭발의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 분위기가2월8일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으로,3월1일에는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 저명인사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원래 거사 일자는3월3일 고종의 장례에 맞추었으나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틀 앞당겨졌다).
3·1운동의 민족 대표33명은 음식점에서 나와 순순히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그들도 총독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터졌다. 미리 소식을 듣고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어린 학생과 시민 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분노한 조선 민중들은 각 종교계 인사들의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사건을 엄청나게 증폭시켜 이후 몇 개월 동안 한반도 전역, 나아가 만주와 연해주까지 ‘대한 독립 만세’의 구호로 뒤덮는 대형 사태로 엮어냈다.

따라서 이 사건은 한 가지 중대한 교훈을 남겼다.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려면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1919년4월에 중국 상하이에서는 정치 망명객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를 수립하게 된다.

하지만 명칭은 ‘정부’라고 해도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에서 도망쳐나온 인물들이 제대로 항일 투쟁을 지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1945년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가 거창한 명칭과 달리 그저 명패만 내리지 않은 것에 가장 큰 의의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몇 년 뒤인1925년4월17일에 김재봉
金在鳳(1890~1944), 김원봉
金元鳳(1898~1958), 이여성
李如星(1901~?)등의 젊은 청년들은 서울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비밀조직인 조선공산당을 창립했다. 임시정부와 조선공산당은 둘 다3·1운동의 영향으로 탄생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 노선이었다

그러나 윌슨은 유럽 세계 내에서만 민족자결권이 적용된다고 주장했으니, 식민지·종속국의 처지와는 무관했다.

당대에는 당대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다. 지나고 보면 알기 쉽더라도 막상 그 시대의 한복판에서는 시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것은 중대한 역설이다. 비록 박쥐처럼 이중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체질상’ 동맹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그런 점은 원래 독일에 붙으려다가 달마치야 해안 지대를 주겠다는 연합국 측의 막판 제의에 마음을 돌린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것은 일본의 그런 야망을 연합국이 사후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유럽을 잿더미로 만든 세계대전을 계기로 오히려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은 패전국만이 아니라 전승국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연합국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미국뿐이었다.

세계경제가 최대의 호황을 누리던 시점에서 갑자기 터져나온1929년의 세계 대공황이 없었다면 혹시 일본은 경제적인 노선, 즉 정상적인 제국주의화의 길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 경제를 순식간에 마비시킨 공황의 피해는 태평양 건너 일본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일본은 경제 대국이었으나 대외 의존도가 높다는 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군부가 제시한 해법은 만주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나아가 중국마저 정복해서 경제 위기를 타개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통 정치인의 길을 걸었고 자유주의 이념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던 하마구치 총리가 피살된 것이다. 이 사건은 정부와 군부의 싸움에서 군부가 승리했음을 뜻

일본 군부는 그 노선을 구현할 ‘건수’를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없으면 만든다.1931년9월18일에 일본의 만주 주둔군인 관동군의 일부 장교들은 남만주 철도를 몰래 폭파해놓고 그것을 중국군이 저지른 짓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만주사변인데, 일본이 도발한 예전의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선전포고 없이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불과 닷새 만에 랴오둥 일대를 손에 넣었고, 두 달 뒤에는 만주 전역을 장악했다.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권은 일본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만주를 거저 내주다시피 했다.

이듬해 봄에 일본은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
溥儀(1906~1967)를 불러와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우고 만주를 합법적으로 손아귀에 넣었다.

당시 중국이 만주를 쉽게 포기한 데는 역사적으로 만주에 대한 집착이 덜한 전통도 작용했을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이 무너진 것은 제국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인 동시에 300여 년에 걸친 이민족 지배가 끝난 것이기도 했다. 중국은 비록 지배자는 군벌이었으나 한족 정권으로 복귀했다. 알다시피 만주는 청 황실의 고향

이 사건에 힘입어 그 이듬해 젊은 조선공산당원과 원로급 민족주의자 들이 처음으로 새로운 조직을 통해 상견례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탄생한 민족운동 통합 조직이 바로 신간회
新幹會
였다.6·10만세운동으로 일본이 유화책으로 돌아선 덕분에 신간회는 처음부터 합법 단체로 출범할 수 있었다.

1920년대부터는 만주에서도 본격적인 항일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일본의 치안력이 한반도만큼 강력하게 작용하지 못하는 지역이었기에 이곳의 투쟁은 일찌감치 명망가 중심의 정치 운동에서 벗어나 무장투쟁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항일 투사의 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
를 비롯해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와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
등의 무장 조직들이 모두1919년에 결성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종횡무진 한국사 2 - 조선 건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시리즈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권보다 2권(조선-근현대사)이 훨씬 흥미로웠다. 저자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큰 흐름에서 한반도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어 좋았다. 현재 한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원왕후가 은언군의 후손에서 철종을 발굴했다면, 조대비는 은언군의 동생인 은신군
恩信君
을 금맥으로 삼았다. 은신군의 손자인 이하응
李昰應(1820~1898)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마흔이 넘었으니 왕실의 대를 잇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다.

그에게는 명복
名福
이라는 열한 살짜리 둘째 아들이 있었기 때문

명복 소년이 조선의26대 왕인 고종
高宗(1852~1919, 재위1863~1907)으로 즉위하게 되었다(정조 이후 조선의 여섯 왕은 모두 장헌세자의 직계 후손이었기에 나중에 고종은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했다).

이하응은 10대 시절에 부모를 모두 여읜 뒤 안동 김씨의 탄압으로 숱한 고초를 겪었으므로 안동 김씨에 대한 원한이 결코 조대비에 뒤지지 않았다.

일단 자신의 뜻을 이룬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으로 고종의 치세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번 가세가 몰락한 풍양 조씨는 대비의 소망과 달리 세력을 회복하지 못했다(아무리 무도한 세도가문이라 해도 세도를 휘두를 만한 ‘인재’가 필요한 법인데, 당시 풍양 조씨에는 그런 인재가 없었다). 그래서 권력은 자연히 그녀의 파트너인 이하응에게로 옮겨왔다.

천주의 방향을 달리 설정했을 뿐 개념은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에서, 동학이 탄생하는 데는 100년 전부터 조선에 보급된 서학의 영향이 있었다.

동학이라는 이름은 서학을 대표하는 그리스도교가 천주교(天主敎)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생겨났다

서학처럼 동학에서도 천주를 주장한다.천주가 하늘에 있지 않고 사람 안에 있다는 점에서 뜻은 정반대지만 어쨌든 동학도 일종의 천주교라고 볼 수 있다.

최제우가 갑자기 처형되는 바람에 동학교도들은 그가 평소에 쓴 글을 모아 《동경대전(東經大全)》이라는 책으로 엮었고, 그가 지은 노래를 모아 《용담유사(龍潭遺詞)》라는 노래집을 펴냈다(용담은 최제우가 수련한 경주의 연못이다). 노래집까지 펴낸 것은 좀 특이한데, 최제우와 동학교도들은 서학(그리스도교)의 성서와 성가집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도 동학이 그리스도교를 모방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865년 봄부터 시작된 경복궁 중건 사업은 대원군의 구상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지 무려 3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경복궁을 중건한다는 구상은 좀 뜬금없었지만, 별다른 권력 기반이 없던 대원군으로서는 오랫동안 실추되어왔던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할 처지였다.

대원군은 며느리의 조건으로 보잘것없는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최우선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가 선택한 며느리는 놀랍게도 명망대가와는 전혀 무관한 여흥 민씨 집안의 열다섯 살짜리 계집아이였다. 민씨라면 바로 대원군의 처가가 아닌가?

결과적으로 보면 세도가를 뿌리 뽑겠다는 이유로 명성황후를 며느리로 선택한 대원군의 판단은 잘못이었다. 쇠붙이라면 모조리 끌어당기는 자석 같은 권력의 속성상, 가문에서 왕비가 나왔다는 소식은 민씨 일가붙이들을 총집결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정조의 실험도 서학 때문에 실패했다고 여긴 그는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를 수락한다면 조선이 존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영국군이 중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베이징발 소식이 전해진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실은 소식이라기보다 소문에 불과했고, 그것도 사실이 아닌 오보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는 뜬소문만으로도 정책이 뒤바뀔 만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렇잖아도 대원군이 사교의 신부를 만난다는 것을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던 조정 대신들이 거세게 들고일어나는 바람에 대원군은 노선을 급선회해 서양 세력과의 타협 없는 투쟁을 선언했다. 그 결과가 바로1866년2월의 병인박해
丙寅迫害
다.

이곳에서 ‘절두’된 교도의 수는 남종삼을 비롯해1만 명에 가까웠으니 가히 사상 최대 규모였다.

그러나 그 수천 명의 목숨보다 대외적으로 더 큰 비중을 가지는 것은 베르뇌를 위시해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이 함께 처형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강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그해7월,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 와서 통상을 요구했다.

제너럴셔먼호가 화염에 휩싸인 지 한 달 뒤에 프랑스 동양 함대 사령관인 로즈가 군함 세 척을 거느리고 인천 앞바다로 왔다.

그리고 두 달 뒤인10월 초 프랑스의 군함 일곱 척과 병력1000명이 본격적인 원정에 나섰다. 이것이 병인양요
丙寅洋擾
인데, 침략자들은 "프랑스 신부 아홉 명을 죽인 대가로 조선인9000명을 죽이겠다."라고 선언했으니, 대원군의 병인박해에 못지않은 광기이며 야만이 아닐 수 없다.

정족산성을 공략한 전술은 과연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의도였을까? 그것은 아니다. 그런 의도였다면 오히려 조선군은 산성을 점령하지도, 방어에 성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선이 정족산성의 탈환에 그토록 집착을 보인 이유는 바로 그곳에 역대 왕조실록들을 보관한 사고(史庫)가 있었기 때문이다(원래는 마니산에 있다가 병자호란 때 청의 공격으로 불타 무너지자 정족산으로 옮겼다). 중화 세계에서 역사서라면 국가 최고의 보물이자 비밀인데 그것을 오랑캐에게 빼앗겼으니 조선 정부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강화도에 국가 보물을 보관한 이유도 역사적으로 외침을 당할 때마다 정부가 강화도로 도망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871년 봄, 로저스가 이끄는 미국의 군함 다섯 척과1200명의 병력이 또다시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5년 전 상황과 다른 점은 처음부터 응징과 보복을 부르짖었던 프랑스와 달리 미국은 이미 침몰한 배는 어쩔 수 없으니 그 대신 통상을 하자고 나섰다는 점이다.

그러나 트집을 잡아서 힘으로 굴복시킨 다음 유리한 조건에서 통상 협상을 벌이는 게 제국주의적 침략의 기본 공식이 아닌가?

과연 로저스는 협상 대표의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함대를 강화도로 진격시켰다.5년 전 프랑스 침략의 악몽을 떠올린 조선군은 먼저 대포를 쏘았다.

신미양요
辛未洋擾
는 결과를 따지기가 애매하다. 우선 전쟁 자체로 보면 화력에서 앞선 미국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강화도에 성조기도 꽂았다. 그러나 미국은 결국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고, 얼마 안 가서 철군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제국주의 열강이 그렇듯이 미국은 조선 본토는커녕 강화도조차 영토적으로 차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도는 일차적으로 조선의 개항이었고, 이차적으로는 미국에 유리한 조건에서의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와 정반대로 강화도는커녕 조선 본토까지 적에게 정복된다 해도 개항을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랬으니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도 두 손 들고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조선 정부의 노선은 더욱 분명해졌다. 서양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이기든 지든 그런 것은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통상이든 뭐든 그들과 일체의 대화나 교섭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원군 정권의 트레이드마크인 쇄국정책
鎖國政策
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위정척사
衛正斥邪
,즉 정의를 수호하고 불의를 배척한다

대원군은 병인양요가 끝나고부터 쇄국의 결심을 굳혔다.

소장파와 유생들까지 일제히 존화양이
尊華洋夷(중화를 숭상하고 서양 오랑캐를 배척한다는 정신)를 목청껏 외쳤다.

중국이1839년 인도산 아편2만 상자를 압수해 불태워버린 사건은 오히려 영국이 본격적인 침략 노선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를 빌미로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키고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으로 개항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조약으로 영국은 홍콩을 할양받고 중국의 다섯 항구를 개항했는데, 이때부터 홍콩은 영국령이 되어 150년 뒤인 1997년 7월 1일에야 중국에 반환된다. 그 밖에 영국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고 아편 문제는 제기하지도 못하게 했으니 그런 적반하장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관세 결정권을 영국이 갖기로 한 점이었다.

조선에서 최제우가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포교하던 무렵에 중국에서는 홍수전
洪秀全(1814~1864)이라는 자가 등장해 그리스도교와 중국의 전통 사상을 적당히 버무려 상제교
上帝敎(‘상제’는 옥황상제를 뜻한다)라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반

만주족 지배와 반외세를 구호로 내걸었다. 이것이 중국판 동학운동이라고 할 태평천국운동이다

이때부터19세기 말까지 약30년 동안 중국에서는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적극 도입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양무운동
洋務運動
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조선은 대원군 집권기의 10년 동안만 쇄국기였지만 일본은 에도 바쿠후가 성립된 17세기 초 이후 개항될 때까지 무려 250년간이나 공식적인 쇄국을 유지했다. 조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쇄국을 가져온 것도 서양의 그리스도교였다. 처음에 에도 바쿠후의 창건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측근들까지도 서양의 종교를 믿는 것에 놀라 탄압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일본은 이후 쇄국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 문물을 수입하는 통로를 완전히 봉쇄하지는 않았다. 특히 네덜란드에는 계속 무역 특혜를 주었는데, 조선에 처음 온 서양인(벨테브레이와 하멜)이 모두 네덜란드 상인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20여 년 전인1854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은 군함 네 척만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간단히 일본을 개항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전투를 치렀음에도 조선이 전혀 개항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니 미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것도 당연했다.

일본은 천황이라는 상징적 중심이 있었으므로 설령 쿠데타 세력이 바쿠후 정권을 거부한다고 해도 천황에 대한 반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정치적 메커니즘이 있었기 때문에 개항 이후 일본에서는 시시
志士
라고 불리는 젊은 개혁 세력이 등장해서 미국의 군함 몇 척에 무력하게 굴복한 바쿠후 정권을 타도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존왕양이
尊王洋夷(여기서 ‘왕’이란 천황을 가리키는데, 천황의 존재가 현실 정치에 잘 이용된 셈이다)를 구호로 내건 반바쿠후 세력은1868년에 드디어 바쿠후 정권을 무너뜨리고 무려1000년 만에 왕정복고를 이루었다. 당시 천황이 바로 열여섯 살의 메이지 천황이다.

후대에 메이지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그의 이름을 딴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
때문이다.1868년부터 시작된 이 개혁 운동은 물론 소년 천황이 직접 주도한 게 아니라 메이지 정부의 젊은 관료들이 입안하고 집행한 것이지만, 일본이 오랜 바쿠후 체제(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조선의 사대부 체제와 같은 위상이다)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중앙집권 국가로 복귀했기에 가능한 개혁이었다.

유신이라는 말은 원래 《논어》에 나오니까 족보에 있는 용어지만, 박정희는 바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자신의 유신을 따왔다.

조선이 신미양요의 혼란에 빠져 있던1871년에 일본은 중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으나 이 조약은 유사 이래 최초로 일본과 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맺은 외교 관계라는 점에서, 작지만 커다란 한 걸음이었다. 이제 일본은 조선의 종주국인 중국과 같은 위상이 되었고 조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일본의 구상은5년 뒤에 현실로 드러난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대원군이다. 신미양요가 끝나자마자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대원군으로서는 골수 성리학자들의 고리타분한 입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그보다도 전후 복구와 경복궁 재건축 등으로 돈 들 데가 많은 마당에 여전히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면세의 혜택까지 누리고 있는 서원들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는 반대 세력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서원 철폐는 조정 대신들만이 아니라 성균관 유림 세력의 반발까지 부를 만큼 과격한 조치였으니 분란이 빚어지지 않을 수 없다.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원군은 만동묘(위쪽)를 철폐하고 당백전(아래쪽)을 발행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였으나 그 결과는 유림의 반발과 인플레였다.

1875년 가을 메이지 유신의 자랑스러운 산물인 일본의 근대식 증기군함 운요호
雲揚號
가 강화도 해상으로 왔다.
10여 년 전의 프랑스와 미국은 침략의 구실이라도 있었으나 일본은 그것조차 없었다. 그러나 만들면 되는 게 구실이 아닌가?

식수를 구한다는 이유로 함선에서 보트를 내려 선원 수십 명을 강화도에 상륙시킨 게 그 미끼다. 명백한 무단 침범이므로 조선의 수비대가 사격을 가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으로 조선은 일본의 덫에 걸려들었다.

각본대로 운요호는 함포 사격으로 응수하는 한편, 수십 명의 전투 병력까지 풀어 정식 교전을 유도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36명이 전사한 데 비해, 일본 측은 경상자가 두 명뿐이었다. 그것만도 조선 측의 큰 손실이었지만, 정작 조선이 입게 될 손실과 일본이 노린 이득은 그 뒤에 가시화된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대사를 파견하면서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이렇게 전쟁을 먼저 벌인 뒤 외교를 통해 유리한 협상 고지를 차지하는 솜씨는 과연 일본이 후발 제국주의 국가라는 게 사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노련하고 교활했다.

고구려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된 것도 이 측량 작업에서다. 조약에서는 한반도의 연해와 섬 들만 측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일본 정부는 군인을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조선 전역의 지리와 문물을 조사하게 했다.

일본의 의도를 더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조약의 제7조다. 이것은 조선의 연해와 섬 들을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한다면 강화도조약의 불평등성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이 조항 하나뿐이다. 동등한 관계라면서 남의 나라를 일방적으로 측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곧바로 한반도에 대한 면밀한 측량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 보겠지만 일본이 한반도 전체를 강점한 뒤 이 측량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이어져 한반도를 장차 중국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똑같이 강제로 개항을 당한 처지였지만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불과20년의 시차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컸다. 일본은 서양 열강의 압력으로 문호를 개항했으나 그 뒤 메이지 유신을 이루면서 아시아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로 도약했고, 조선은 그 일본에 의해 개항되면서 신흥 제국주의의 성장을 위한 발판으로 전락했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은19세기 중반에 개항과 메이지 유신을 통해 단기간에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게 아니다. 그 배경에는17세기 초부터 시작된 에도 바쿠후 시대의 오랜 번영기가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비록 대외적으로 쇄국을 유지했고 대내적으로도 숱한 진통과 혼란을 겪었으나 전반적으로 보면 비중화 세계 특유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착실히 국력을 키웠다.

대원군이 허무하게 물러나자 그 빈자리를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이 꿰찼다. 그전까지 조금씩 조정으로 들어오던 민씨 세력은 개화를 계기로 아예 중앙 권력을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개화파의 중심인물로 떠오른 사람은 정통 관료 출신인 김홍집
金弘集(1842~1896)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민씨 세력은 오로지 대원군을 반대하기 위해 개화를 주장한 것이지만, 김홍집은 사상과 이론으로 무장한 소신 있는 개화파였기 때문이다.

당시 청은30년에 걸친 양무운동으로 서양 문물을 수용한 상황이었으므로 가장 우려하는 적은 북방의 러시아였다. 그래서 《조선책략》도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는 것을 가장 주요한 과제로 삼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친중
親中
ㆍ결일
結日
ㆍ연미
聯美
,즉중국ㆍ일본ㆍ미국과 동맹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인의 분열이다. 예송논쟁의 승리를 주도한 허목은 그 참에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남인 중에도 송시열의 위명을 두려워한 자들은 유배를 보내는 정도로 그치자는 온건론을 폈다. 결국 온건파의 주장이 채택되어 송시열은 다 늙은 나이에 생애 처음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의도적이든 아니든 적진을 분열시킨 것은 장차 그가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의 처벌을 놓고 강경파는청남
淸南
이 되었고, 허적
許積(1610~1680)이 이끄는 온건파는 탁남
濁南
으로 갈렸던 것이다(온건파를 ‘탁하다’고 비난한 것을 보면 그 명명은 허목 측의 작품인 듯하다).

과연 서인이 몰락하는 과정도 남인과 닮은꼴이었다. 예송에서 승리한 뒤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이 두 파로 갈렸듯이,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도 남인의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하마터면 남인에 의해 죽을 뻔한 송시열은 당연히 강경파였고, 그의 제자이면서도 사적인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윤증
尹拯(1629~1714)?그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부탁했다가 성의 없는 대우를 받자 사제지간을 끊었다?과 한태동
韓泰東(1646~1687)등은 온건파였다. 양측의 우두머리들 간에 연배 차이가 한 세대쯤 나기에 노장파는 노론
老論
, 소장파는 소론
少論
이라고 불리게 된다.

숙종은 장희빈과의 애정도 있거니와 국왕의 고유 권한(사생활)에까지 사대부들이 일일이 간섭하자 넌더리가 났다. 이런 왕의 심기 변화를 야당인 남인들이 그냥 흘려보낼 리 없다. 남치훈
南致熏(1645~1716)과 이익수
李益壽(1653~1708)등 소장파 남인들은 그런 숙종의 마음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결심을 굳힌 숙종은 노론을 대거 숙청하고 송시열과 김수항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것이1689년의 기사환국
己巳換局
이다.

숙종은5년 전과 정확히 반대되는 조치를 내렸다. 남인들이 일제히 숙청되었고, 서인들이 재집권했으며, 장희빈이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 이것이 갑술환국
甲戌換局

울릉도와 달리 독도는 원래 무인도였던 탓에 오늘날까지도 분쟁거리로 남아 있다. 영토 국가의 개념이 확실치 않았던 시대에 무인도의 임자는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지리적으로 독도는 한반도에 가깝지만 고려와 조선이 왜구의 침략 때문에 전통적으로 해안 지대와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썼기 때문에 소유권이 더욱 애매해졌다). 따라서 지금 한국이든 일본이든 독도의 ‘역사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독도는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애치슨 라인을 모방한 이른바 ‘이승만 라인’으로 영토화함으로써 실효적 지배가 이루어져 한국의 소유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그렇다면 독도를 우리 땅으로 만든 것은 이승만의 유일한 업적이다).

장희빈은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곧바로 사약을 받았으나 그래도 그녀가 남긴 아들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복위된 인현왕후가 끝내 후사를 낳지 못했고 곧이어 맞아들인 세 번째 계비 인원왕후
仁元王后
도 아이를 낳지 못한 탓에,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를 교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태생에 하자가 있는 세자의 왕위 계승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마침 숙종에게는 적자는 없어도 서자는 또 있었다. 갑술환국이 있었던1694년에 또 다른 후궁인 숙빈 최씨가 아들 연잉군
延?君(뒤의 영조)을 낳은 것이다. 최씨 역시 원래 궁녀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의 신분이었으므로 연잉군도 신분상의 하자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불리는 사건인데(신임이란 신축년과 임인년, 즉 1721년과 1722년을 가리킨다), 연좌로 처벌된 인원이 무려 170명이 넘었다. 원래 목호룡은 노론의 인물이었으나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1662~1724)에게 매수되어 ‘자백’의 형식으로 노론의 역모를 고발했다. 그에 따르면 노론 측은 이른바 삼급수(三急手), 즉 칼과 약과 모해라는 세 가지 수단으로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자백만으로 정치적 대형 사태가 빚어졌다는 것은 조선의 정치 구조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말해준다. ‘말만의 역모’인 것은 다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전까지의 사화나 환국은 정치 세력 간의 모함으로 빚어진 데 비해 이제는 한낱 점쟁이의 무고가 대규모 옥사를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개 지관
地官(풍수지리 전문가)에 불과한 목호룡
睦虎龍
이라는 자가 노론에 반역의 기운이 있다며 무고하자, 소론은 그것을 빌미로60여 명의 노론 일당을 처형해버렸다(노론4대신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소론은 경종이 살아 있을 때 연잉군을 없애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다. 연잉군은 조선의21대 왕인 영조
英祖(1694~1776, 재위1724~1776)로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김일경과 목호룡 등 신임사화의 주범들을 처단했기 때문이다.

그간 사대부들끼리 치고받은 싸움은 많았어도 국왕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하나의 세력을 숙청한 것은 인조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영조는 왕세제 시절의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더 이상 당쟁을 놔두었다가는 필경 나라가 망하리라는 위기의식이었다. 이 점은 이후의 행보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국왕이라 해도 자신의 뜻을 펴려면 왕당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영조는 즉위 이듬해인1725년에 노론을 다시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쟁을 재연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계에 복귀한 노론이 소론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극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영조는 노론 내의 강경파를 쫓아내버렸다. 당쟁의 불길을 잡겠다는 굳은 각오를 공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아울러 그는 소론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그 가운데 온건파를 등용해 노론과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었다. 당쟁을 제어하기 위한 나름의 묘책을 개발한 것이다. 그것이 영조의 대표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탕평책
蕩平策
이다.

사대부 정치를 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표현한다면 과두정치라고 할 수 있다. 과두정치의 장점은 어느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표적인 사례는 고대 로마의 원로원 정치다(흔히 이 시기 로마의 정치 체제를 공화정이라고 부르지만 근대적 의미의 공화정보다는 과두정치에 훨씬 더 가깝다)

과두정치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한 시대를 이끌 만한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하기 어렵다는 점이다.과두 체제에서는 탁월한 역량과 자질을 갖춘 정치가가 나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출현한다 해도 체제의 견제를 받아 희생될 공산이 크다. 기원전1세기에 황제가 되고자 한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의해 암살된 게 그런 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무엇일까? 측근을 키우지 않으면서 당쟁을 막는 제3의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대부들의 당파를 현실적으로 인정해주되 각 당파 간의 세력 균형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탕평책이 효과를 거두자 영조는 두 번 다시 이 땅에 당쟁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1742년에 탕평비를 세웠다. 비문은 영조가 직접 썼는데, 탕평비를 세운 곳이 성균관이라는 것은 그곳이 바로 당쟁의 온상임을 상징한다.

탕평책의 첫 번째 수단인 쌍거호대
雙擧互對(둘을 등용해서 서로 견제하게 한다)의 전략이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되었던 서얼에 대한 차별을 완화해 서자 출신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영조 자신이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때문에 느꼈던 ‘신분 콤플렉스’가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1746년에는 《속대전》이 간행된다. 무엇의 후속편이기에 이름이 《속대전》일까? 말할 것도 없이 《경국대전》의 후속편이다.

영조가 이룬 가장 큰 개혁의 성과는1750년에 균역법
均役法
을 제정한 것이다. 균역법이란 명칭의 뜻 그대로 백성들의 요역에 대한 부담을 균등하고 공평하게 하자는 취지를 가진 제도다. 요역 중에서도 으뜸은 군역이었으니까 균역법은 군제
軍制
나 다름없다.

(조용조란 각각 토지세, 요역, 특산물을 뜻한다)

물론 병역이 의무였던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의무는 양반과 천인 신분이 제외된 양인
良人
만의 몫이었다.

균역법의 첫 단추는 우선 군포의 양을 줄이는 것이었다.16개월에 베 두 필씩 바치던 것이 한 필로 대폭 삭감되었다.

한원진
韓元震(1682~1751)은 호서
湖西
, 즉 충청도 출신이었고, 이간
李柬(1677~1727)은 낙하
洛下
, 즉 서울 출신이었기에 출신지의 머리글자를 따서 호락논쟁
湖洛論爭
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그 내용은 이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물성동론은 인과 물, 즉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서로 같다는 것이고, 인물성이론은 그 반대다. 호론
湖論
은 인물성이론의 입장이고, 낙론
洛論
은 인물성동론을 취한다.
그런데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왜 그 시기에 새삼스럽게 문제가 된 걸까? 그 논쟁에서 말하는 ‘사물’이 단지 일반적인 사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면 그 논쟁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사물’에는 물론 동물도 포함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오랑캐’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의 쟁점은 당시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만주족 오랑캐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데 있었다.

낙론은 사람이나 사물이나 똑같이 오상
五常(인·의·예·지·신의 유교 도덕)을 지니고 있으므로 오랑캐라고 해서 본성이 다르다고 구분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양측 모두 맹자와 주희 등 옛 유학자들의 고전에서 나름대로 근거를 인용하고 있으나, 낙론의 근저에는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비록 현실적인 힘에서는 오랑캐가 앞서는 세상이 되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중화 세계의 적통인 조선이 우위에 있다는(나아가 세계 최고라는)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이런 변형된 중화 이념은 곧이어 자민족 중심주의로 발전하면서 예술에도 영향을 미쳐 진경산수화라는 미술 장르를 낳게 된다.

진경산수화는 금강산의 모습을 그린 〈금강전도
金剛全圖
〉와 인왕산의 경치를 화폭에 담은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의 화가인 정선
鄭敾(1676~1759)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김홍도
金弘道(1745~?)와 신윤복
申潤福(1758~?)등으로 이어졌다. 이 새로운 화풍은 우리 역사상 가장 주체적인 예술 사조였으나 그 바탕에는 병적인 소중화 이념이 흐르고 있었다.

진경
眞景
이라면 ‘진짜 경치’, 즉 조선의 경치를 뜻한다. 조선의 화가가 조선의 경치를 그리겠다는 게 왜 중화 이념일까? 조선의 사대부들처럼 조선의 화가들도 이제 조선이 유일한 중화 세계, 즉 진정한 인간 세계라고 믿는 데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실학이라는 용어는18세기에 새로 등장한 학풍을 가리키지만, 원래는19세기 말과20세기 초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무렵에 민족 주체성을 고취하기 위해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다(그러므로 당대에는 실학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대해 유학을 가리켜 실학이라 했고, 조선 초에는 성리학을 원시 유학, 즉 육경학이나 사장학
詞章學
에 대비해 실학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의미는 달라도 여러 용례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실학이라는 말은 기존의 학풍에 대해 새롭고 진보적인 학풍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1634년 이수광
李?光(1563~1628)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20년 전에 쓴 원고를 정리해 《지봉유설
芝峰類說
》이라는 일종의 작은 백과사전을 펴냈는데, 이것이 최초의 실학서라고 간주된다.

우선 이수광이 보여준 길은 서양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조선이 취할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이다. 그런데 조선은 서양과 독자적으로 교류할 통로도, 권한도 없으니까 이 노선을 채택할 경우에는 청을 통해 서양 문물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당시 청에서는 서양 문물을 서학
西學
이라고 불렀는데, 청은 조선의 북방에서 출범한 왕조였던 탓에 조선에서는 청을 통해 수입하는 서학을 북학
北學
이라고 불렀다. 북학파라는 명칭은 여기서 나왔다. 이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대외 교류가 중요했으므로 북학파는 상업을 중시하고, 그 상업을 뒷받침할 공업을 진흥하고, 화폐경제 제도를 도입하자는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재야학자 유형원
柳馨遠(1622~1673)이 토지와 법, 관직 임용 등 제반의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연구를 남겼다. 유형원은 평생 관직 생활을 하지 않은 탓에 자신의 제안들이 실제 정책에 반영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는 공식적으로 실학의 선구자라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1769년에 영조가 그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책으로 간행하라고 명한 것이다. 죽은 지100년이나 지났으나 국왕에 의해 인정된 덕분에 그의 책 《반계수록
磻溪隧錄
》은 최초의 ‘정부 공인’ 실학서가 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유형원이 안내한 길은 내부 개혁 노선에 해당한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산업이라면 단연 농업이므로 개혁의 기본 방향은 농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

(정전법이란 토지를 ‘井’ 자 모양의 아홉 구획으로 나누어 한가운데 토지의 생산물을 조세로 내고 나머지를 경작자들이 가진다는 이상적인 제도다). 토지를 경작자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유형원의 균전론
均田論
이나 토지 보유 상한선을 정해 대지주들을 제한하자는 이익
李瀷(1681~1763)의 한전론
限田論
은 모두 정전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북학파가 중상학파라면 내부 개혁론자들은 중농학파라고 부를 수 있다

영조의 치세에 여당은 노론이고 야당은 남인이었다. 북학파는 노론 내에서 호락논쟁이 벌어진 결과로 탄생한 집단이므로 인맥상으로는 노론의 계열에 속했다. 반면 야당 혹은 재야에 있던 남인들은 그 위치에 걸맞게 민생 문제에 주목했는데, 그들이 중농학파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전법이라는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모델로 삼은 이유도 명백하다. 예송논쟁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들의 학문적 기반은 바로 성리학 이전의 원시 유학에 있었던 것이다.

청은 옛 중화 세계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과 양명학
陽明學
을 버리고 새로이 고증학
考證學
을 채택해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학문 연구의 풍토를 정착시켰다.

성리학이 주로 국가 운영의 철학이자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 데 비해, 양명학은 유학만이 아니라 선불교나 도교의 요소까지 가미해 일종의 생활 철학으로 성립했다

고증학은 늘 유학의 근저에 놓여 있던 그 사변성과 관념성을 제거하고 과학으로서의 유학을 지향했다. 그래서 고증학은 유학에서 나왔으되 가장 유학답지 않은 학풍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누렸던 지위는 바로 동북아시아의 중화 세계에서 유학이 차지하는 위치와 똑같다. 오늘날 유학은 대학의 학문 분과 혹은 ‘한 과목’에 불과하지만(이를테면 ‘동양철학과의 유학 전공’), 유학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학문 분야가 아니라 학문 전체였고, 총체적인 세계관이었다. 지금의 학문 구분으로 말한다면 철학이나 역사학은 물론이고 법학, 경제학, 나아가 물리학, 공학 같은 자연과학도 모두 유학의 테두리 안에서 연구되고 논의되는 ‘유학의 분과들’이었다. 따라서 사회를 성립시키고 발전시킨 것도, 또 그 사회에 정체와 침체를 가져온 것도 유학이었다. 심지어 그 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도 유학일 수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실학이다.

근대에 와서 모든 학문의 뿌리를 이루는 철학조차 당시에는 ‘신학의 시녀’였다는 사실이 중세 그리스도교의 위력을 말해준다.

하지만 중화 세계인 조선이 근본 없는 오랑캐처럼 속되게 처신할 수야 없지 않은가? 이런 인식의 차이 때문에 청에서는 실학(고증학)이 곧 관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재야의 학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양에서 서적이란 대중에게 지식을 보급하기 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지식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였다.

왕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을 때는 말만의 역모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사대부들도 실력 행사에 나서게 된다. 그게 실패하면 반란이 되고 성공하면 반정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상 사대부들이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경우는 모두 세 차례가 있었다. 그중 이인좌의 난은 실패한 반란으로 끝났고, 나머지 두 차례는 각각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으로 사대부가 승리했다. 따라서 정조가 대비할 것은 반정의 예방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력이 필요했다.
1785년 정조는 국왕을 특별히 수호하는 친위대를 만들고 이것을 장용위
壯勇衛
라고 불렀다.

세조가 처음 설치할 때의 명칭은 장용대(壯勇隊)였다. 이 장용대의 병사들은 무술에 능한 천인들로만 뽑았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국왕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경우 목숨을 걸고 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름도 신분도 없는 결사특공대인 셈인데,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였기에 반대파의 책동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그렇듯 강력한 친위대가 필요했을 터이다.

정조가 축성한 수원성의 모습이다. 한양의 도성에도 없는 누대와 포대까지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정조는 자신의 개혁에 대한 반발로 내란이 벌어질 경우 대피처이자 임시 수도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장용영의 외영을 그곳에 주둔시킨 것도 마찬가지 목적이다. 이 성의 설계는 정약용이 주도했다.

이 군대는 엉뚱하게도 수원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왜 느닷없이 수원일까? 일단 장헌세자의 묘가 수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현륭원
顯隆園(지금의 융릉
隆陵)의 방비를 외영에게 맡긴 것이다.

정조의 치세에는 점차 그리스도교를 종교로서 대하는 움직임이 싹트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드디어 한반도 최초의 정식 그리스도교도가 탄생했는데, 바로 이승훈
李承薰(1756~1801)

(정약전 삼 형제는 이승훈의 처남들이었다).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씌어졌을 뿐더러 해학과 풍자가 넘치기에 더욱 재미가 있다.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목격한 우스운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익살스러운 언동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그려냈다. 그의 해학과 풍자는 당시 사람들의 고루한 사상을 깨뜨리는 데 효과를 발휘했고, 그러한 이유로 문체반정의 목표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