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의 분열이다. 예송논쟁의 승리를 주도한 허목은 그 참에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남인 중에도 송시열의 위명을 두려워한 자들은 유배를 보내는 정도로 그치자는 온건론을 폈다. 결국 온건파의 주장이 채택되어 송시열은 다 늙은 나이에 생애 처음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의도적이든 아니든 적진을 분열시킨 것은 장차 그가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의 처벌을 놓고 강경파는청남
淸南
이 되었고, 허적
許積(1610~1680)이 이끄는 온건파는 탁남
濁南
으로 갈렸던 것이다(온건파를 ‘탁하다’고 비난한 것을 보면 그 명명은 허목 측의 작품인 듯하다).

과연 서인이 몰락하는 과정도 남인과 닮은꼴이었다. 예송에서 승리한 뒤 송시열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이 두 파로 갈렸듯이, 재집권에 성공한 서인도 남인의 처벌 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었다. 하마터면 남인에 의해 죽을 뻔한 송시열은 당연히 강경파였고, 그의 제자이면서도 사적인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윤증
尹拯(1629~1714)?그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부탁했다가 성의 없는 대우를 받자 사제지간을 끊었다?과 한태동
韓泰東(1646~1687)등은 온건파였다. 양측의 우두머리들 간에 연배 차이가 한 세대쯤 나기에 노장파는 노론
老論
, 소장파는 소론
少論
이라고 불리게 된다.

숙종은 장희빈과의 애정도 있거니와 국왕의 고유 권한(사생활)에까지 사대부들이 일일이 간섭하자 넌더리가 났다. 이런 왕의 심기 변화를 야당인 남인들이 그냥 흘려보낼 리 없다. 남치훈
南致熏(1645~1716)과 이익수
李益壽(1653~1708)등 소장파 남인들은 그런 숙종의 마음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결심을 굳힌 숙종은 노론을 대거 숙청하고 송시열과 김수항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것이1689년의 기사환국
己巳換局
이다.

숙종은5년 전과 정확히 반대되는 조치를 내렸다. 남인들이 일제히 숙청되었고, 서인들이 재집권했으며, 장희빈이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 이것이 갑술환국
甲戌換局

울릉도와 달리 독도는 원래 무인도였던 탓에 오늘날까지도 분쟁거리로 남아 있다. 영토 국가의 개념이 확실치 않았던 시대에 무인도의 임자는 사실상 없었다고 봐야 한다(지리적으로 독도는 한반도에 가깝지만 고려와 조선이 왜구의 침략 때문에 전통적으로 해안 지대와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썼기 때문에 소유권이 더욱 애매해졌다). 따라서 지금 한국이든 일본이든 독도의 ‘역사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독도는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애치슨 라인을 모방한 이른바 ‘이승만 라인’으로 영토화함으로써 실효적 지배가 이루어져 한국의 소유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그렇다면 독도를 우리 땅으로 만든 것은 이승만의 유일한 업적이다).

장희빈은1701년 인현왕후가 죽은 뒤 곧바로 사약을 받았으나 그래도 그녀가 남긴 아들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복위된 인현왕후가 끝내 후사를 낳지 못했고 곧이어 맞아들인 세 번째 계비 인원왕후
仁元王后
도 아이를 낳지 못한 탓에,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를 교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태생에 하자가 있는 세자의 왕위 계승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마침 숙종에게는 적자는 없어도 서자는 또 있었다. 갑술환국이 있었던1694년에 또 다른 후궁인 숙빈 최씨가 아들 연잉군
延?君(뒤의 영조)을 낳은 것이다. 최씨 역시 원래 궁녀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의 신분이었으므로 연잉군도 신분상의 하자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 불리는 사건인데(신임이란 신축년과 임인년, 즉 1721년과 1722년을 가리킨다), 연좌로 처벌된 인원이 무려 170명이 넘었다. 원래 목호룡은 노론의 인물이었으나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1662~1724)에게 매수되어 ‘자백’의 형식으로 노론의 역모를 고발했다. 그에 따르면 노론 측은 이른바 삼급수(三急手), 즉 칼과 약과 모해라는 세 가지 수단으로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자백만으로 정치적 대형 사태가 빚어졌다는 것은 조선의 정치 구조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말해준다. ‘말만의 역모’인 것은 다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전까지의 사화나 환국은 정치 세력 간의 모함으로 빚어진 데 비해 이제는 한낱 점쟁이의 무고가 대규모 옥사를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개 지관
地官(풍수지리 전문가)에 불과한 목호룡
睦虎龍
이라는 자가 노론에 반역의 기운이 있다며 무고하자, 소론은 그것을 빌미로60여 명의 노론 일당을 처형해버렸다(노론4대신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다).



소론은 경종이 살아 있을 때 연잉군을 없애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다. 연잉군은 조선의21대 왕인 영조
英祖(1694~1776, 재위1724~1776)로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김일경과 목호룡 등 신임사화의 주범들을 처단했기 때문이다.

그간 사대부들끼리 치고받은 싸움은 많았어도 국왕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하나의 세력을 숙청한 것은 인조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영조는 왕세제 시절의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더 이상 당쟁을 놔두었다가는 필경 나라가 망하리라는 위기의식이었다. 이 점은 이후의 행보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국왕이라 해도 자신의 뜻을 펴려면 왕당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영조는 즉위 이듬해인1725년에 노론을 다시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쟁을 재연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계에 복귀한 노론이 소론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극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영조는 노론 내의 강경파를 쫓아내버렸다. 당쟁의 불길을 잡겠다는 굳은 각오를 공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아울러 그는 소론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그 가운데 온건파를 등용해 노론과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었다. 당쟁을 제어하기 위한 나름의 묘책을 개발한 것이다. 그것이 영조의 대표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탕평책
蕩平策
이다.

사대부 정치를 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표현한다면 과두정치라고 할 수 있다. 과두정치의 장점은 어느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표적인 사례는 고대 로마의 원로원 정치다(흔히 이 시기 로마의 정치 체제를 공화정이라고 부르지만 근대적 의미의 공화정보다는 과두정치에 훨씬 더 가깝다)

과두정치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한 시대를 이끌 만한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하기 어렵다는 점이다.과두 체제에서는 탁월한 역량과 자질을 갖춘 정치가가 나오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출현한다 해도 체제의 견제를 받아 희생될 공산이 크다. 기원전1세기에 황제가 되고자 한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의해 암살된 게 그런 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무엇일까? 측근을 키우지 않으면서 당쟁을 막는 제3의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대부들의 당파를 현실적으로 인정해주되 각 당파 간의 세력 균형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고 탕평책이 효과를 거두자 영조는 두 번 다시 이 땅에 당쟁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1742년에 탕평비를 세웠다. 비문은 영조가 직접 썼는데, 탕평비를 세운 곳이 성균관이라는 것은 그곳이 바로 당쟁의 온상임을 상징한다.

탕평책의 첫 번째 수단인 쌍거호대
雙擧互對(둘을 등용해서 서로 견제하게 한다)의 전략이다.

그동안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되었던 서얼에 대한 차별을 완화해 서자 출신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영조 자신이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 때문에 느꼈던 ‘신분 콤플렉스’가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1746년에는 《속대전》이 간행된다. 무엇의 후속편이기에 이름이 《속대전》일까? 말할 것도 없이 《경국대전》의 후속편이다.

영조가 이룬 가장 큰 개혁의 성과는1750년에 균역법
均役法
을 제정한 것이다. 균역법이란 명칭의 뜻 그대로 백성들의 요역에 대한 부담을 균등하고 공평하게 하자는 취지를 가진 제도다. 요역 중에서도 으뜸은 군역이었으니까 균역법은 군제
軍制
나 다름없다.

(조용조란 각각 토지세, 요역, 특산물을 뜻한다)

물론 병역이 의무였던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의무는 양반과 천인 신분이 제외된 양인
良人
만의 몫이었다.

균역법의 첫 단추는 우선 군포의 양을 줄이는 것이었다.16개월에 베 두 필씩 바치던 것이 한 필로 대폭 삭감되었다.

한원진
韓元震(1682~1751)은 호서
湖西
, 즉 충청도 출신이었고, 이간
李柬(1677~1727)은 낙하
洛下
, 즉 서울 출신이었기에 출신지의 머리글자를 따서 호락논쟁
湖洛論爭
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그 내용은 이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물성동론은 인과 물, 즉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서로 같다는 것이고, 인물성이론은 그 반대다. 호론
湖論
은 인물성이론의 입장이고, 낙론
洛論
은 인물성동론을 취한다.
그런데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왜 그 시기에 새삼스럽게 문제가 된 걸까? 그 논쟁에서 말하는 ‘사물’이 단지 일반적인 사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면 그 논쟁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사물’에는 물론 동물도 포함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오랑캐’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물성동론과 인물성이론의 쟁점은 당시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만주족 오랑캐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데 있었다.

낙론은 사람이나 사물이나 똑같이 오상
五常(인·의·예·지·신의 유교 도덕)을 지니고 있으므로 오랑캐라고 해서 본성이 다르다고 구분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양측 모두 맹자와 주희 등 옛 유학자들의 고전에서 나름대로 근거를 인용하고 있으나, 낙론의 근저에는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비록 현실적인 힘에서는 오랑캐가 앞서는 세상이 되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중화 세계의 적통인 조선이 우위에 있다는(나아가 세계 최고라는)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이런 변형된 중화 이념은 곧이어 자민족 중심주의로 발전하면서 예술에도 영향을 미쳐 진경산수화라는 미술 장르를 낳게 된다.

진경산수화는 금강산의 모습을 그린 〈금강전도
金剛全圖
〉와 인왕산의 경치를 화폭에 담은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의 화가인 정선
鄭敾(1676~1759)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김홍도
金弘道(1745~?)와 신윤복
申潤福(1758~?)등으로 이어졌다. 이 새로운 화풍은 우리 역사상 가장 주체적인 예술 사조였으나 그 바탕에는 병적인 소중화 이념이 흐르고 있었다.

진경
眞景
이라면 ‘진짜 경치’, 즉 조선의 경치를 뜻한다. 조선의 화가가 조선의 경치를 그리겠다는 게 왜 중화 이념일까? 조선의 사대부들처럼 조선의 화가들도 이제 조선이 유일한 중화 세계, 즉 진정한 인간 세계라고 믿는 데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실학이라는 용어는18세기에 새로 등장한 학풍을 가리키지만, 원래는19세기 말과20세기 초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되던 무렵에 민족 주체성을 고취하기 위해 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다(그러므로 당대에는 실학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에 대해 유학을 가리켜 실학이라 했고, 조선 초에는 성리학을 원시 유학, 즉 육경학이나 사장학
詞章學
에 대비해 실학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의미는 달라도 여러 용례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실학이라는 말은 기존의 학풍에 대해 새롭고 진보적인 학풍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1634년 이수광
李?光(1563~1628)의 두 아들은 아버지가20년 전에 쓴 원고를 정리해 《지봉유설
芝峰類說
》이라는 일종의 작은 백과사전을 펴냈는데, 이것이 최초의 실학서라고 간주된다.

우선 이수광이 보여준 길은 서양 문물을 수용함으로써 조선이 취할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이다. 그런데 조선은 서양과 독자적으로 교류할 통로도, 권한도 없으니까 이 노선을 채택할 경우에는 청을 통해 서양 문물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당시 청에서는 서양 문물을 서학
西學
이라고 불렀는데, 청은 조선의 북방에서 출범한 왕조였던 탓에 조선에서는 청을 통해 수입하는 서학을 북학
北學
이라고 불렀다. 북학파라는 명칭은 여기서 나왔다. 이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대외 교류가 중요했으므로 북학파는 상업을 중시하고, 그 상업을 뒷받침할 공업을 진흥하고, 화폐경제 제도를 도입하자는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재야학자 유형원
柳馨遠(1622~1673)이 토지와 법, 관직 임용 등 제반의 제도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연구를 남겼다. 유형원은 평생 관직 생활을 하지 않은 탓에 자신의 제안들이 실제 정책에 반영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는 공식적으로 실학의 선구자라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1769년에 영조가 그의 연구 성과를 정리해 책으로 간행하라고 명한 것이다. 죽은 지100년이나 지났으나 국왕에 의해 인정된 덕분에 그의 책 《반계수록
磻溪隧錄
》은 최초의 ‘정부 공인’ 실학서가 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유형원이 안내한 길은 내부 개혁 노선에 해당한다. 전통적으로 조선의 산업이라면 단연 농업이므로 개혁의 기본 방향은 농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

(정전법이란 토지를 ‘井’ 자 모양의 아홉 구획으로 나누어 한가운데 토지의 생산물을 조세로 내고 나머지를 경작자들이 가진다는 이상적인 제도다). 토지를 경작자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유형원의 균전론
均田論
이나 토지 보유 상한선을 정해 대지주들을 제한하자는 이익
李瀷(1681~1763)의 한전론
限田論
은 모두 정전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북학파가 중상학파라면 내부 개혁론자들은 중농학파라고 부를 수 있다

영조의 치세에 여당은 노론이고 야당은 남인이었다. 북학파는 노론 내에서 호락논쟁이 벌어진 결과로 탄생한 집단이므로 인맥상으로는 노론의 계열에 속했다. 반면 야당 혹은 재야에 있던 남인들은 그 위치에 걸맞게 민생 문제에 주목했는데, 그들이 중농학파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전법이라는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모델로 삼은 이유도 명백하다. 예송논쟁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들의 학문적 기반은 바로 성리학 이전의 원시 유학에 있었던 것이다.

청은 옛 중화 세계의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과 양명학
陽明學
을 버리고 새로이 고증학
考證學
을 채택해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학문 연구의 풍토를 정착시켰다.

성리학이 주로 국가 운영의 철학이자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 데 비해, 양명학은 유학만이 아니라 선불교나 도교의 요소까지 가미해 일종의 생활 철학으로 성립했다

고증학은 늘 유학의 근저에 놓여 있던 그 사변성과 관념성을 제거하고 과학으로서의 유학을 지향했다. 그래서 고증학은 유학에서 나왔으되 가장 유학답지 않은 학풍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누렸던 지위는 바로 동북아시아의 중화 세계에서 유학이 차지하는 위치와 똑같다. 오늘날 유학은 대학의 학문 분과 혹은 ‘한 과목’에 불과하지만(이를테면 ‘동양철학과의 유학 전공’), 유학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학문 분야가 아니라 학문 전체였고, 총체적인 세계관이었다. 지금의 학문 구분으로 말한다면 철학이나 역사학은 물론이고 법학, 경제학, 나아가 물리학, 공학 같은 자연과학도 모두 유학의 테두리 안에서 연구되고 논의되는 ‘유학의 분과들’이었다. 따라서 사회를 성립시키고 발전시킨 것도, 또 그 사회에 정체와 침체를 가져온 것도 유학이었다. 심지어 그 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것도 유학일 수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실학이다.

근대에 와서 모든 학문의 뿌리를 이루는 철학조차 당시에는 ‘신학의 시녀’였다는 사실이 중세 그리스도교의 위력을 말해준다.

하지만 중화 세계인 조선이 근본 없는 오랑캐처럼 속되게 처신할 수야 없지 않은가? 이런 인식의 차이 때문에 청에서는 실학(고증학)이 곧 관학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지만, 조선에서는 재야의 학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동양에서 서적이란 대중에게 지식을 보급하기 해서가 아니라 국가가 지식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였다.

왕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을 때는 말만의 역모가 아무런 소용이 없으므로 사대부들도 실력 행사에 나서게 된다. 그게 실패하면 반란이 되고 성공하면 반정이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의 조선 역사상 사대부들이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경우는 모두 세 차례가 있었다. 그중 이인좌의 난은 실패한 반란으로 끝났고, 나머지 두 차례는 각각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으로 사대부가 승리했다. 따라서 정조가 대비할 것은 반정의 예방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력이 필요했다.
1785년 정조는 국왕을 특별히 수호하는 친위대를 만들고 이것을 장용위
壯勇衛
라고 불렀다.

세조가 처음 설치할 때의 명칭은 장용대(壯勇隊)였다. 이 장용대의 병사들은 무술에 능한 천인들로만 뽑았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국왕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경우 목숨을 걸고 왕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름도 신분도 없는 결사특공대인 셈인데,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였기에 반대파의 책동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그렇듯 강력한 친위대가 필요했을 터이다.

정조가 축성한 수원성의 모습이다. 한양의 도성에도 없는 누대와 포대까지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정조는 자신의 개혁에 대한 반발로 내란이 벌어질 경우 대피처이자 임시 수도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장용영의 외영을 그곳에 주둔시킨 것도 마찬가지 목적이다. 이 성의 설계는 정약용이 주도했다.

이 군대는 엉뚱하게도 수원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왜 느닷없이 수원일까? 일단 장헌세자의 묘가 수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가 있는 현륭원
顯隆園(지금의 융릉
隆陵)의 방비를 외영에게 맡긴 것이다.

정조의 치세에는 점차 그리스도교를 종교로서 대하는 움직임이 싹트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드디어 한반도 최초의 정식 그리스도교도가 탄생했는데, 바로 이승훈
李承薰(1756~1801)

(정약전 삼 형제는 이승훈의 처남들이었다).

《열하일기》는 소설처럼 씌어졌을 뿐더러 해학과 풍자가 넘치기에 더욱 재미가 있다. 박지원은 여행 도중에 목격한 우스운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익살스러운 언동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그려냈다. 그의 해학과 풍자는 당시 사람들의 고루한 사상을 깨뜨리는 데 효과를 발휘했고, 그러한 이유로 문체반정의 목표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