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 10주년 기념판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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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오히려 두려움은 커지는 것 같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인 셸리 케이건은 먼저 죽음을 정의하려고 한다. 예로부터 죽음을 정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가장 크게는 두 가지가 있다.

1. 육체-영혼 이원론 :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2. 물리주의(일원론) : 사람은 오직 육체다.

1은 종교적(특히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죽음이란 육체의 끝일 뿐이고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간다고 말한다. 사실상 1의 관점에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육체의 끝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2의 관점에서 육체의 끝은 곧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한다. 저자인 셸리 케이건은 영혼을 인정하지 않으며 ˝당신이 죽었다면 곧 죽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말하는 내용은 얼마 안 되는데, 분량의 대부분을 당연한 것에 대한 사변적인 논증에 쓰고 있다. 겉으로만 요란한, 실제로는 다 아는 맛인, 그런 음식점 같았다. 말이 길다는 건 무지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심적인 위로가 된다는 이유로 최종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하는데, 나는 이 말에서 철학의 유용함과 무용함을 동시에 느꼈다. 모든 생각을 근거에 입각해서 한다는 면에서 철학의 유용함을 느꼈고, 심적인 위로를 무시하는 저자의 오만함이 실제 세상과 괴리되어 있는 데에서 철학의 무용함을 느꼈다.

나는 근거 따윈 없어도 심적인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 이유만으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고 본다. 실제로 우리는 예술이나 종교에서 많은 심적인 위로를 받으며, 모진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것이 명제적 참(객관적 진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예술(종교)을 없는 것으로 취급해야만 하는가?

피카소의 큐비즘은 실제 대상과 같은 모습이 아니므로 거짓인가?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으므로 예수는 거짓말쟁이인가?

예술(종교)은 사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그저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일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저자의 입장이 굉장히 재수 없고 불쾌하게 느껴졌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위안)을 느끼지 못하고 사실(참)에 천착하는 저자의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의 자세가 아니다. 사람들이 예술(종교)을 믿는 이유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삶의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믿음을 단지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헛된 것으로 치부하는 자세는, 정말 재수 없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죽음에 대해서만큼이나 삶에 대해서도 골몰했다.

삶의 고통(두려움)은 변화(죽음)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온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가정으로 사는 게 최선일 것이다.

인생에서 행복의 기준은 여러 가지기 때문에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경제적인 일에 국한될 게 아니라, 그걸 함으로써 자신이 정말 보람을 느낄 일이어야 할 것이다.

삶은 세상을 인지할 수 있는 한 번뿐인 기회이다. 나 또한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언젠간 의식 없는 물질로 돌아가야 할 운명이지만, 그 전까지는 부모님께 선물 받은 삶을 소중히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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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을유세계문학전집 10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진인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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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차 뒤를 따라가면서 짤막한 노래를 불렀다.

화창한 날의 열기에 종종
아가씨는 사랑을 꿈꾼다네.

낫으로 추수하고 난 이삭을

부지런히 주워 모으려고

이삭이 나오는 밭고랑으로

나의 나네트는 몸을 굽히고 가네.



"장님이다!" 그녀가 소리쳤다.

그리고 에마는 웃기 시작했다. 영원한 암흑 속에 무시무시한 괴물처럼 우뚝 서 있는 거지의 흉측한 얼굴이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기괴하고, 미친 듯한, 절망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짧은 치마가 들춰졌다네!



그녀는 경련을 일으키며 매트 위에 쓰러졌다. 모두 다가갔다.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결혼식 때의 드레스를 입히고 하얀 구두에 화관을 씌워 묻어 주기를 바랍니다. 머리카락은 어깨 위로 늘어뜨려 주시고, 관은 떡갈나무, 마호가니, 납, 이 세 가지로 해 주십시오. 제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기운을 차릴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녀를 커다란 초록색 벨벳 천으로 덮어 주십시오. 이상이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해 주십시오.>

두 남자는 보바리의 비현실적인 생각에 매우 놀라, 곧 약사가 그에게 가서 말했다.

"이 벨벳 천은 불필요한 중복 같은데요. 게다가 비용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요?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세요! 내 아내를 사랑한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가 보세요!" 샤를이 소리쳤다.

그녀는 아들을 갖고 싶었다. 튼튼한 갈색 머리의 사내아이를 낳으면, 조르주라고 부르리라. 사내아이를 갖는다는 생각을 하니 과거 자신의 모든 무력감에 대해 앙갚음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느꼈다. 남자는 적어도 자유롭다. 여러 열정과 여러 나라를 두루 섭렵할 수 있고, 장애를 뚫고 나가 가장 멀리 있는 행복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당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법률의 구속과 함께 육체적인 나약함이라는 불리한 점을 갖고 있다. 여자의 의지는 끈으로 묶여 있는 모자의 베일과 같아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는데,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체면이 발목을 잡는다.

그녀는 어느 일요일 새벽 여섯 시쯤, 해가 뜰 무렵에 해산했다.

"딸이야!" 샤를이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기절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심사위원장이 소리쳤다.

<전체 경작 우수상!>

"예를 들어 지난번에 제가 댁에 갔을 때……."

<켕캉푸아의 비제 씨.>

"당신과 이렇게 같이 있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70프랑!>

"저는 백 번도 더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따라왔고 이렇게 남은 것입니다."

<퇴비 상.>

"오늘 저녁도, 내일도, 다른 날도, 아니 평생 이대로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르게유의 카롱 씨에게 금메달!>

"어떤 사람과 함께해도 이토록 완벽한 매혹을 느껴 본 적은 없었으니까요."

<지브리생마르탱의 뱅 씨!>

"그래서 저는 당신의 추억을 가져갈 것입니다."

<메리노 숫양 상에는…….>

"하지만 당신은 저를 잊으시겠지요. 저라는 존재는 그림자처럼 지나가 버리고 말 테지요."

<노트르담의 블로 씨…….>

"오! 아니에요, 제가 당신의 마음속에서, 당신의 삶에서 뭔가가 될 수 있을까요?"

<돼지 부문, 공동 수상, 르에리세 씨와 퀼랑부르 씨, 60프랑!>

마차는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이제는 목적도 방향도 없이 닥치는 대로 헤매고 다녔다. 마차는 생폴, 레스퀴르, 가르강산, 루주마르, 가야르부아 광장에서도 보였고, 말라드르리 거리, 디낭드리 거리, 생로맹, 생비비앵, 생마클루, 생니케즈 앞에서도 (세관 앞에서도) 보였고, 바스 비에유투르, 트루아피프, 모뉘망탈 공동묘지에서도 보였다. 이따금 마부석에 앉은 마부는 술집 쪽으로 절망적인 시선을 던지곤 했다. 대체 어떤 이동의 광기에 사로잡혔기에 이 사람들은 도무지 멈추려 하지 않는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따금 멈추려고 시도했지만, 그러면 곧바로 뒤에서 화난 고함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는 땀에 흠뻑 젖은 두 마리 늙은 말을 더 세게 채찍질하면서, 마차가 덜컹거리지 않도록 조심하지도 않고 여기저기 걸려도 조금도 개의치 않은 채 낙담해서 갈증과 피로와 서글픔으로 거의 울다시피 했다.

그리고 항구에서는 짐수레와 술통들 속에서, 거리에서, 경계석 모퉁이에서, 지방에서는 너무도 특이한 이 광경, 즉 블라인드를 내린 마차 한 대가 무덤보다 더 단단히 문을 닫은 채 선박처럼 흔들거리면서 그렇게 계속 나타나는 그 광경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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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드디어 다윈 1
찰스 로버트 다윈 지음, 장대익 옮김, 최재천 감수, 다윈 포럼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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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만큼 유명한 책이 있을까? 이 책은 우리가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진화˝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집대성한 책이다. 물론 진화라는 개념을 다윈이 처음으로 떠올린 건 아니다. ‘종이 변한다‘는 개념은 이미 그 이전에도 경험적으로 알려졌으며, 다만 그 원리를 납득할 만하게 설명하지 못했을 뿐이다.

책의 초반부에선 각종 비둘기에 대한 얘기가 자꾸 나오는데, 다윈이 살던 19세기 영국에선 비둘기, 닭 등 각종 가축을 교배해서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는 게 유행이었다(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강아지 종들도 이때 생겨난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여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람이 인위적으로 품종을 개량할 수 있다면, 자연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는 단순한 아이디어다. 즉 ˝자연선택˝의 개념이다.

다윈은 비글호 20대 중반에 떠난 비글호 탐사에서 갈라파고스의 핀치새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핀치새들은 부리 모양이 각기 달라서 처음에 다윈은 각기 다른 종이라서 생각했으나, 근연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어떤 영감을 받는다. 어쩌면 이들이 같은 종에서 출발하지 않았을까? 비둘기를 교배해서 각기 다른 외형적 특성과 습성을 갖는 비둘기종들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자연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이 변이를 축적시킴으로서 종을 분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에겐 너무 당연하게 들리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먼저 종교적인 도그마가 ‘종은 영원불변의 것‘이라는 개념을 강요했기 때문이고, 지금처럼 과학적 도구(지질학, 생물학적)들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질학자였던 다윈이 쓸 수 있었던 과학적 도구는 지층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화석들 정도였다.

길어봤자 100년을 사는 인간의 눈으로는 오랜 시간을 거쳐 종이 분화한다는 걸 믿기 힘들다. 당연한 일이다. 물이 돌을 뚫을 수 있을까? 100년을 지켜본다 한들 거의 뚫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돌은 물을 뚫지 못하는가? 오랜 시간이 흐른다면 뚫을 수 있고, 진화적 시간대는 그런 긴 시간대를 상정한다.

그렇다면 자연이 어떻게 종을 분화시키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1. 생물은 생존 가능한 수보다 더 많은 개체를 낳는다.
2. 각 개체들 간에 생존 투쟁이 벌어진다.
3. 돌연변이가 일어나 약간의 형질적 변화가 생긴다.
4. 환경에 더 잘 맞는(살아남은) 개체들이 후손을 남기며 변이가 축적된다.
5.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다.
6. 종이 분화된다.

여기서 핵심은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다. 변이가 없다면 자연선택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생존 투쟁은 거의 기후 요인으로 인한 것이라고 다윈은 말한다. 이는 우리 시대의 기후 위기를 떠올리게 하는데, 약자에게 기후 위기가 진정 위협인 것처럼 전체 생물 종에서도 또한 그렇다.

자연 선택은 형질 분기와 대량 멸절을 야기한다. 새로운 종이 분기되려면 ‘빈 곳(니치)‘이 있어야 한다. 한 종이 있는 자리에 다른 종이 생길 수는 없는 것이다. 공룡이 멸종하지 않았으면 포유류는 진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룡에게 다 잡아먹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다행스럽게도 기후 변화로 공룡이 멸종하고, 그 빈자리를 포유류가 채운 것이다. 이를 보면 생물의 역사는 멸종과 진화를 반복해왔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심각한 경쟁은 ˝가까운 관계에 있는 근연 형태들 간의 경쟁˝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같은 종 내의 투쟁 뿐만 아니라, 약간의 변이를 거친 종-아종 간의 투쟁이 가장 격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가 진화의 ‘중간 다리‘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근연 형태들 간의 경쟁으로 인해 근연종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근연종 중 인간(homo) 속에 속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하다. 그 이유는 침팬지와 인간을 이어주는 ‘중간 다리‘들은 근연종 간의 격렬한 투쟁으로 인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인간 속에 속한 유일한 종이 되었다.

또한 어떤 종의 평균 개체수를 결정하는 것은 ‘먹이‘보다는 ‘얼마나 잡아먹히냐‘의 문제라고 말하는데, 이를 인간사회에 적용시켜보면 왜 인구가 그렇게 폭발적으로 늘어났는지를 깨닫게 한다.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이기에 잡아먹힐 일이 없다. 또한 기술발전(특히 농업 분야)을 통해 식량 문제를 해결했기에 인구가 줄어들 일이 없는 것이다.

<종의 기원>을 읽다 보면 왜 ˝사회 진화론˝이 나왔는지 이해가 가능한데, 개체가 모여 사는 사회란 결국 생물학의 영역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윈의 책을 읽으며 <총균쇠>가 많이 떠올랐는데, 결국 <총균쇠>가 주장하는 굵직한 큰 틀은 다 <종의 기원>에서 따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총균쇠의 기본 주장은 ‘밀집된 경쟁으로 인해 경쟁력을 획득한 유럽이, 경쟁이 덜한 다른 문명을 멸종시켰다‘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정확히 <종의 기원>에 나오는 내용이다.

<종의 기원>에서는 대륙(특히 유라시아 대륙)의 종이 더 많은 경쟁에 노출됨으로써 생존투쟁에 강한 종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대륙종과 섬종이 만났을 때 섬종이 멸종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러한 논리를 북반구와 남반구 종들 간에도 적용 할 수 있는데, 북반구에는 남반구보다 육지가 더 많기에, 북반구는 남반구에 비해 대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반구 종들이 남반구 종들보다 더 강한 생존투쟁력을 갖게 되어, 북반구 종들이 남반구 종들을 멸종시킨 것이다.

자연이 비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해 자연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으며(가치중립적), 투쟁에서 진 쪽은 그저 사라질 뿐이다. 이를 사회의 차원에 적용한 게 바로 사회 진화론이다. 사회 진화론은 강대국의 논리로 이용되었는데, 이는 진화가 가진 개념, 즉 ˝살아남기 위해서는 투쟁(경쟁)을 피할 수 없다˝와 ˝개방과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획득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가 정확히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할 때 쓰는 논리와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화는 경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경쟁을 피해 새로운 환경을 찾아나선 생물에 의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으로, ˝진화는 진보다˝가 있다. 하지만 진화에는 방향성이 없다. 그저 환경에 대한 적응이 있을 뿐이다. 생물 간 투쟁으로 꽉 찬 수중에서 벗어나 뭍으로 올라온 생물처럼, 진화에는 그저 환경에 적응해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 있을 뿐이다.

경쟁을 하든 안 하든, ˝삶의 본질은 변화˝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즉 삶의 본질은 변화이며, 그 변화는 결국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명을 이어나가기 위한 염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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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를 자기가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 - 한가로이 걸을 수 있는 시공간의 중요성
천천히 가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산책의 목적은 이동이 아니다 ‘인지(관찰)‘이다. 즉, 세상을 느끼는 것이다.
걸어 다님으로써 우리가 우주적 존재임을 인지 하는 것.
책에 나왔던 밥 아저씨가 왜 ˝긴 산책으로 마음이 열린다˝고 하는지 알 거 같다. 걸음으로써 우리는 자연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자연이고, 인간이 만든 예술은 자연의 모방일 뿐이다.
천천히 걸어 다님으로써 자연을 관찰하는 것은 신을 찬양하는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름답고도 냉혹한 자연, 태양 빛에 의해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들
계절이 있어서 시간을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 - 감사한 일이다.

˝우주에서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

우주는 위에 있는 것이 아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기에
경외감은 저 멀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
창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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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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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60세의 주인공이 자신의 지난 30년 간의 교수 생활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공부를 등한시했던 젊은 날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급습을 받고 개과천선해서 지방의 대학으로 간다(베를린->지방). 거기서 영문학 교수님을 만나고 학문의 열정(을 가장한 교수님을 향한 인정욕구)을 불태운다.

그런데 그 교수님은 묘하게 비밀에 싸여있는 듯하다. 처음 만났을 때 교수님은 굉장히 활기찬 모습이었는데, 다음에 만났을 땐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명력이 전혀 없어보이는가 하면, 어떤 때는 갑자기 며칠 동안 휴가를 내고 어디론가 떠나버리기도 한다.

주인공은 교수님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학문을 시작하는데, 교수님이 이런 비밀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주인공을 밀어낸다. 그래서 주인공은 채워지지 않는 인정욕구에 괴로워한다. 또한 교수님이 가진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또한 교수님에게는 젊은 부인이 있는데, 이 부부는 데면데면한 것이 마치 남을 대하듯이 서로를 대한다. 이렇게 교수님과 정서적으로 단절된 그의 부인은 수영 같은 육체 활동을 할 때만 진솔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주인공을 지속적으로 경계하며 거리를 둔다.

교수님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 고통스러워하던 주인공은, 어느 날 젊은 부인과 수영장에서 만나며 어떤 사랑의 흔적을 찾게 된다. 주인공과 교수님 부인과의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 않아서, 둘은 결국 불륜을 저지르고 만다. 주인공은 교수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얼마 뒤 교수님이 자신과 주인공 사이에서 나온 학문적 성취(논문)을 축하하기 위해 술자리를 가지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문밖에서 부인이 듣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서 그 자리를 피하려 한다.

교수님은 결국 부인과 주인공이 불륜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교수님은 주인공을 사랑한다고 갑자기 고백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 얘기를 해준다. 동성애자로서 살아온 힘든 삶에 대해서 얘기해주시는 교수님은, 이제 친구로서 이별하자고 하면서 작별 키스를 주인공에게 한 뒤 어서 가라고 소리친다.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온 주인공은, 그 뒤로 교수님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으며, 살면서 만난 사람 중 교수님에게 가장 큰 고마움과 사랑을 느꼈다고 고백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감정의 혼란>이라는 제목답게 혼란스러운 책이었다. 동성애가 소재라는 걸 전혀 모르고 봐서 더 큰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사랑이라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 경우에, 즉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성적 취향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삶이 정말 힘들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은 이성애자다. 이 말인즉슨, 짝사랑을 할 수는 있지만 어쨌든 상대와 내가 맺어지게 될 가능성이 주위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성 간 사랑은 공공연하지 않다. 매우 비밀스러우며, 만약 상대방이 나와 같은 취향을 갖지 않는다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가능성도 있다. 즉 동성 간 사랑의 감정은 두려움이 근간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두려움과 사랑, 이 두 감정의 혼합이 바로 동성애자의 사랑이며, 그래서 <감정의 혼란>이라는 제목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성적 취향은 개인의 근간을 이루는 정체성이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계속해서 쌓이면 스스로를 혐오하거나 부정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소설에서 교수님은, 진정 사랑하는 주인공을 위해서 당당하게 이별하는 쪽을 택한다. 만약 이 둘이 이성애자고, 남자와 여자였다면, 자연스럽게 성적인 관계를 맺게 됐을 것이다. 마치 교수님 부인과 주인공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인생을 경험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주관(특질)이고, 어떤 특질을 타고 태어날지는 아무도 선택할 수 없다. 오직 우연에 의해 주어질 뿐이다. 삶이란 것은 이리도 잔인하다. <감정의 혼란>을 통해 나는 내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대리 체험으로써 평소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깨닫게 해주는 것, 그것이 소설의 진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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