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때 참 재밌었는데, 그렇지?" 로드가 말한다. "그 낡은 집에서 말이야. 지금보다 순수했던 시절이었지."
"맞아. 정말 재밌었어." 이만치 떨어져서 보면 정말이지 재밌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미는 뭐가 어떻게 끝날지 모를 때나 느낄 수 있는 법이다.

"그 책 때문에 나를 찼었어. 나의 진정한 재능을 저버렸느니 어쩌니 하면서."
"책 때문이 아니야. 걔는 널 사랑했어. 몰랐어? 네가 자기한테 프러포즈하기를 원했고 결혼하고 싶어 했어. 이레나 걔, 아주 고리타분한 애거든. 하지만 넌 그럴 낌새도 보이지 않았지. 걔는 완전 거절당한 기분을 느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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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여 페이백] 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 황금가지 / 2024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참 재미있게 잘 쓰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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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캐리스와 토니와 로즈 모두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 지니아는 그들의 연인을 한 번씩 빼앗아 갔다. 토니에게서는 웨스트를 빼앗았다.

지니아가 캐리스에게서 빼앗은 남자는 빌리였다. 그것이 가장 잔인한 도둑질이었을 거라고 토니와 로즈는 생각한다.

나한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갔는데, 그게 뭐였냐면, 빌리가 돌아올 거라는 거였어."
"사후세계에선 소식이 되게 느린가 보네." 토니가 말한다. "빌리는 이미 돌아왔잖아."
"엄밀히 말하면 돌아온 건 아니지." 캐리스가 깐깐하게 따지고 든다. "그러니까, 우리는…… 빌리는 옆집 이웃일 뿐이니까."

결과적으로 로즈와 토니는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려는 지니아의 갖은 노력에도 제각기 남자와 함께하는 삶고 있었지만 캐리스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최근에 사건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얼간이 빌리가 별안간 나타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후, 이제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빌리와 지니아는 단둘이 도망가 버렸다. 닭장의 닭은 몽땅 죽어 있었다. 두 사람이 빵칼로 닭의 목을 죄다 베어 버리고 갔던 것이다

지니아는 미치의 주머니까지 털어먹고도 캐리스가 미치의 정신적 고결함이라 부른 것까지 앗아 간 후 그를 차 버렸고, 미치는 결국 온타리오호에 투신해 익사했다.

먼 친척으로부터 어마어마하지는 않아도 섬을 떠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은 캐리스

물론 그들은 계약의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서명까지 떡하니 박힌 그 빌어먹을 계약서를 운운할 뿐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돈을 내어줘야 했다.

변호사들은 의뢰인을 처음에는 한입씩 베어 먹다가 나중에는 가죽이나 힘줄이나 발톱만 남을 때까지 흰담비나 쥐나 피라냐 떼처럼 조금씩 뜯어먹는 족속이었다.

결코 말이 많지는 않았고 신중했지만 어떤 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지켜보다 보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가 드러났다.

"일자리를 구할 거야." 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일자리?" 흑요석 같은 심장의 소유자 이레나가 말했다. "진저에일도 있으니까 먹고 싶으면 먹어."
"백과사전 팔아도 되겠네." 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나머지 둘도 웃음을 터뜨렸다. 백과사전 판매는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절박한 사람이 동원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알려져 있었던 터다. 그리고 잭 데이스가 실제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판다는 생각 자체가 그들에게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네 소설 인세를 나누는 건 어때?" 로드가 말했다. 로드는 경제학 전공이었다.

"무슨 시간?" 재프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절대적 시간, 아니면 상대적 시간? 정신적 시간, 아니면 측정 가능한 시간? 유클리드적 시간, 아니면 칸트적 시간?" 철학 개론 수업에서처럼 사소한 것 하나하나 꼬치꼬치 물고 늘어지는 말장난

계약서를 작성한 사람은 로드였다. 월세 3개월 치에 1개월 치, 즉 잭이 내지 못했던 3개월 치에 앞으로 내야 할 1개월 치를 세 사람이 내주는 대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잭의 소설에서 발생할 인세 수입을 잭의 몫을 포함해 4분의 1씩 나누어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어떤 소설이든 소설 쓰기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재프리와 로드가 계속 비아냥거리게 놔둘 수는 없었다. 더는 이레나의 아름다운 푸른 눈에 서린 동정과 멸시를 견딜 수 없었다.

책이 출간되면 그동안 숨겨 온 너무 많은 진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분명 룸메이트들은 잭이 아무 생각 없이 소설에 집어넣은 각자의 모습이 유령의 집에 설치된 거울의 상처럼 왜곡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말 터였다.

잭, 이레나, 로드, 재프리는 결국 재계약을 하지 않고 각자 다른 집을 구해 떠났지만 잭은 로스쿨에 가기로 결정한 이레나와 계속 만남을 이어 갔다.

불가사의한 미소를 머금은 이레나는 여전히 실용적인 검은 팬티를 벗고 있는 모습으로 잭의 머릿속에 고이 자리해 있다. 훗날 1년에 두 번씩 잭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냉혹하고 탐욕스러운 마귀할멈과는 꽤나 다른 모습이다. 잭이 도통 통합시키지 못하는 두 얼굴을 가진 이레나랄까.

"하지만, 난 그 계약 잊고 있었어. 진짜 계약도 아니잖아. 그냥 농담으로 한 소리지, 그건 그냥……."
"진짜 계약이야." 이레나가 냉담하게 말했다. 그때 이레나는 진짜 계약이 무엇인지 알 만큼 알고 있었다. "고의성이 입증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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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단한 몸을 가졌더라도 이제는 시체일 뿐인데 뭐."

돌아오겠다는 약속, 하지만 돌아오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는 상황.

"뭘요?" 조리가 거의 소리를 지르듯이 묻는다. "저를 뭐 어디서 풀어 주시겠다는 거예요?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돌로 만든 벌집에서요. 당신은 오랫동안 거기에 갇혀 검푸른 벌들에 쏘이고 있었거든요. 형벌로요. 그리고 당신이 개빈을 해치지 못하게 막는 의미로요."
"이분이 파열의 주홍 마법사였군요!" 너비나가 말한다.

셋째 날, 가족들은 축축한 지푸라기로 관을 채운 다음 묘지로 끌고 가서 기도문과 수수한 묘비를 세우고 땅에 묻었다. 그리고 3개월 후 언니는 결혼을 했다.

죽고 나니 더 자유로웠다. 오로지 엄마만 내 방에, 가족들이 내 예전 방이라고 부른 공간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웃에게는 나를 추모하는 사당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엄마는 가능한 한 빨리 자리를 떴다. 가급적 숨기려고는 했지만 엄마는 당연하게도 나를 원망했다. 누군가를 안쓰럽게 여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상대방의 고통은 그가 내게 의도적으로 가하는 악의적인 행위로 느껴지는 법이다.

"팔아요."라고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내 목소리는 이제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방 비울게요. 제가 머물 수 있는 데가 한 군데 있어요." 엄마는 고마워했다. 가여운 사람. 엄마가 내게 갖는 애착은 손거스러미나 사마귀에 느끼는 애착과 같았다. 나는 엄마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제거할 수 있어서 기뻐했다. 한평생 당신의 의무를 충분히 다한 것이다.

샘의 얼굴에서 눈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의 어깨와 뱃살의 비율처럼 변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 푸른 눈을 이용해 먹을 수는 있었다. 아직 대부분의 경우 효과가 있었다. 물론 남자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가 늘어놓는 헛소리를 더 잘 분간한다.

샘과 기네스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그러니 이혼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형식적인 절차만 거치고 나면 샘은 또다시 일정한 직업 없이 빈둥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달팽이처럼 등에 집을 얹고 세상을 방랑할 것이다. 어쩌면 그게 샘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삶일 수도 있다.

메트라즐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샘은 딸랑딸랑 부딪히는 여러 개의 열쇠 꾸러미에서 가게 열쇠를 찾는다. 파트너는 이미 가게 뒤편에서 평상시의 업무를, 가구를 위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아니, 가구 위조가 아니라 가구 개량이다. 파트너의 이름은 네드다. 정확히는 그가 주장한 이름이다.

네드는 말하자면 목재를 다루는 보톡스 의사로, 일반 보톡스 의사와 달리 목재를 젊어 보이게 만들기보단 늙어 보이게 만든다.

샴페인 상자 옆에는 역시 개봉하지 않은 샴페인 잔이 몇 상자 있다. 플라스틱이 아니라 질 좋은 유리잔이다. 그리고 흰색 자기 그릇이 담긴 상자 몇 개, 휴지가 아닌 천으로 된 냅킨이 담긴 커다란 상자도 보인다. 누군가가 결혼식을 통째로 이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 그것도 호화 결혼식을.
종이 상자들 뒤에는 여행 가방이 몇 개 있다. 하나의 세트처럼 어울리는 완전히 새것인 선홍색 여행 가방이다.
그리고 그 뒤, 더 어두운 더 안쪽에는 신랑이 있다.

시신을 발견하고도 신고하지 않는 건 중범죄 아닌가? 최악의 사실은 이 남자가 살해당했으리라는 점이다. 살해당하지 않고는 스스로 화려한 예식용 양복 차림으로 몇 겹의 플라스틱 비닐 속으로 들어가 지퍼를 잠그고 그 이음새에 테이프를 붙일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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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이 만질 수 있고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된 지 적어도 나흘은 지난 지금은

이완과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품을 수 없을지라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여기로 가, 이거 사, 저거 해! 약간 깔보는 듯한, 얕잡아 보면서 놀리는 듯한 목소리. 병에 걸리기 전에도 이완은 대체로 그런 태도로 콘스턴스를 대했다.

어쩌면 이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파트는 아들 녀석들이, 녀석들이라 부르기에는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아들들이 이완의 장례식에서 강력히 주장한 대안이었다. 두 아들은 각각 뉴질랜드와 프랑스의 도시에, 콘스턴스를 자주 찾아오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기 쉬운 먼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파트는 양로원을 돌려 말한 것이지만 콘스턴스는 그 대안을 고깝게 여기지 않는다. 아들들은 본인들에게 가장 간편할뿐더러 콘스턴스에게도 최선일 수 있는 방법을 원한다

콘스턴스는 이완의 목소리가 실제가 아님을 안다. 이완이 죽었음을 안다.

콘스턴스는 알핀랜드에 깊이 빠져들고부터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주의가 산만해진 탓에 수십 년 전에 만료된 면허를 갖고만 있었다. 알핀랜드는 무수한 생각을 요한다. 정지 신호 같은 부차적인 세부 사항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밀어내 버린다.

시인과 포크 가수와 재즈 뮤지션과 배우 가운데 푼돈이라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건 콘스턴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콘스턴스는 가난을 매혹적으로 여길 수 있을 만큼 젊었다.

콘스턴스는 개빈을 뒷바라지할 돈을 벌기 위해 알핀랜드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시인들과 포크 가수들은 콘스턴스의 알핀랜드 이야기를 비웃었다. 당연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나? 콘스턴스 본인도 자기 이야기를 비웃었다. 콘스턴스가 대량으로 찍어 내는 삼류 문학은 존중받을 만한 문학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콘스턴스가 점점 알핀랜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알핀랜드는 오로지 콘스턴스의 것이었다. 알핀랜드는 콘스턴스의 피난처이자 요새였다

콘스턴스는 늘 그 질문을, 외도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를 두려워했다. 바보는 아니었기에 누구와 그러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이완에게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완도 개빈처럼 떠나 버릴까 봐 두려워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이완은 콘스턴스를 떠났다. 이완은 침묵했다. 사라졌다.

한때 레이놀즈는 개빈이 사람들을, 적어도 일부 사람을 흉보는 면에 홀딱 빠져 있었다. 그게 곧 개빈이 남들보다 우월한 지적 능력과 세련된 취향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심술에 불과하다고, 아니면 비타민 결핍 증상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깔아뭉갠다고 해서 당신이 우월해지는 건 아니야.

대학은 돈을 원하고, 그래서 뭣도 모르는 애들을 끌어들인다. 그런 다음에는 그 애들을 머릿속에 지식만 잔뜩 채워 넣은 속 빈 강정으로 만들지만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제공하지 않는다. 대학에 가느니 배관공 자격증을 얻는 편이 낫다.

개빈은 이룬 것도, 받은 상도 없었다. 찬사를 받고 부러움을 살 만한 얇은 시집 한 권도 출간하지 못했다. 그는 무명의 자유를 누렸고, 뭐든 쓸 수 있는 백지 같은 미래가 눈앞에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콘스턴스는 오로지 개빈이라는 사람 자체를 깊이 아꼈던 것이다. 그의 내면을.

하루의 첫 커피, 하루의 첫 담배, 마법처럼 나타나 하루의 첫 시를 이룬 첫 구절. 그런 시는 대부분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건 용납할 수 없다고! 콘스턴스는 내 사생활이야. 사생활! 여태 그런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겠지!"
"개빈, 당신은 당신 글을 팔았어." 레이놀즈가 말한다. "그러니 이제 공공 자료라고."
"개소리 집어치워! 내가 아니라 네가 팔았지! 이 배신자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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