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0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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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이란 1세대가 아니라 물려받은 신앙이기에 쇠퇴하는 신앙.

그래서 “모든 사람이 신념을 받아들였을 때 그 신념은 쇠퇴하기 시작한다”는 것.

모든 기독교인들은 가난하고 겸손하며 세상으로부터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믿는다.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맹세 같은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 누가 자신의 겉옷을 가져가면, 속옷도 벗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일을 염려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이런 것들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옳다고 한결같이 칭찬하면, 그것이 왜 옳은 것인지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 이유나 근거를 알지 못해도, 사람들은 그것이 옳다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규범들을 그런 식으로 믿는다. 하지만 진정으로 살아 있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 규범들이 그들의 행위를 규율해서, 그들이 그 규범들에 의거해서 실제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살아 있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대적들을 공격하거나, 자신들이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에 그 규범들을 사용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그 규범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주면서, 그들이 결코 행할 엄두를 낼 수조차 없는 수많은 행위들을 그들에게 행하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사람이 마치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착한 것처럼 위선을 떠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정말 정나미가 떨어지는 상종못할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하지만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고, 이런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멸시받았던 유대교의 한 무명의 종파에서 로마 제국의 국교로 도약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반대한 사람들조차도 "이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를 보라"고 말한 것을 보면(오늘날에는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후의 그 어떤 기독교인들보다도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의미를 훨씬 더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기독교가 1,8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 그 세력을 더 이상 확장해 나가지를 못하고서, 여전히 거의 유럽인들과 유럽인들의 후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주된 이유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보여주었던 그런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기독교의 교리들을 일반 신자들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믿고, 그 교리들 중 많은 것들에 상당히 큰 의미를 부여하여 엄격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지성 속에서 그런 식으로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여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교설은 칼뱅Calvin이나 녹스Knox,19 또는 그들 자신의 품성이나 성향과 비슷한 점이 많은 어떤 인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설일 뿐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교훈들은 그들의 지성 속에 수동적으로 공존해서, 아주 기분좋고 상쾌한 말들을 들었을 때 같은 효과만을 낼 뿐이고, 그 이상의 효과를 그들에게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이때부터는 그 지지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의사로 그 교설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선대로부터 대물림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의 교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다른 교설로 전향하거나 개종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제1세대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세상과 맞서서 그들 자신을 변호하거나 세상을 그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대신에 조용히 뒤로 물러나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교설을 반박하는 주장이나 논거들을 될 수 있는 한 귀 기울여 듣지도 않고, 반대자들에 맞서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번거로움도 피하려고 한다. 통상적으로 이때가 그 교설의 생명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어떤 신념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신념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죽게 되게 된다는 것이 정말인가? 어떤 명제에 대한 의심이 여전히 존재해야만, 그 명제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정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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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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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니것의 공로는 브라우티건을 널리 알린 것이다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7년 동안 낚시를 하러 갔는데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나는 낚싯바늘에 걸린 송어를 전부 놓쳐버렸다.
그것들은 펄쩍 뛰어오르거나
또는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거나
또는 몸부림쳐서 빠져나가거나
또는 내 낚싯줄을 끊거나
또는 수면으로 떨어지면서 빠져나가거나
또는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면서 빠져나갔다.
나는 송어에 손을 대본 일조차 없다.
이러한 좌절과 당혹스러움에도
나는 믿는다.
놓친 송어의 총계를 생각해볼 때,
그것이 매우 흥미로운 실험이었음을.
그러나 내년에는 다른 어느 누군가가
또 송어낚시를 하러 가야만 할 것이다.
다른 어느 누군가가 그곳으로 가야만
할 것이다.

-알라딘 eBook <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중에서

버트런드 러셀이 《행복의 정복》에서 말하기를, 책을 읽는 두 가지 이유는 읽는 게 즐겁거나 남에게 뽐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알라딘 eBook <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중에서

그것은 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와도 같았고, 아주 수줍게 느껴졌다.

-알라딘 eBook <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중에서

비는 거리를 익사한 사람의 허파처럼 만들었고, 나는 서둘러 일터로 나가는 길에 교차로마다 역류하고 있는 하수도들을 보았다.

-알라딘 eBook <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중에서

우리는 양떼를 보았다. 아이는 원래 털이 많은 동물을 보면 소리를 지른다. 그 애는 제 엄마와 내가 알몸으로 있는 것을 볼 때에도 그런 소리를 낸다. 아이는 이번에도 역시 그런 소리를 냈다. 우리는 비행기가 구름을 헤치고 날아가듯 그렇게 양떼 밖으로 차를 몰아 빠져나갔다.

-알라딘 eBook <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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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마틴 에덴 1~2 - 전2권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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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초반부가 지나가면, 역겨운 자화자찬으로 가득한 중후반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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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예항 / 짐승들의 유희 대산세계문학총서 182
미시마 유키오 지음, 박영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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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가 좋다. 그래서 이 책도 읽었다.
나는 왜 일본 극우주의자의 소설을 좋아하게 된 걸까? 사실 그의 사상은 역겹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미 의식에 굉장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미시마 상의 소설을 보고 있으면 엽기적인 일본 만화가 떠오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선뜻 보기 힘든 그런 엽기적인 소재/서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낸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오후의 예항>(1963)이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작품 내에서 주인공은 13세의 구로다 노보루라는 소년인데, 노보루는 다른 5명의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무슨 꿍꿍이를 꾸민다. 구로다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그래서 젊은 어머니와 둘이 산다. 어느 날 어머니는 쓰카자키 류지라고 하는 항해사와 사랑에 빠지고, 어머니와 류지는 결혼할 거라고 구로다에게 말한다.

구로다는 친구들에게 그 항해사의 ‘못된 짓‘을 말하고, 무리의 리더인 소년이 ˝드디어 거사를 치를 때가 됐다˝고 말한다. 6명의 소년들은 류지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며 항해사를 인적이 없는 야산으로 끌고 간다. ˝산 위에 대체 뭐가 있냐˝는 류지의 질문에 소년들은 ˝드라이 독(선박을 수리하는 곳)˝이 있다고 말한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 홍차에 약을 탄 홍차를 류지에게 주는 소년들, 류지는 왠지 씁쓸한 홍차의 맛을 느끼며 먼바다를 응시한다. ˝원래 영광의 맛은 쓰다˝라는 말로 소설은 끝난다.

제목이 무슨 뜻인가 했더니, ‘예항‘은 예인선이 큰 배를 항구로 데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속박된 것을 드라이 독에서 해방시켜, 세계의 공허(허무함)를 메꾸려 하는 소년들. 촉법소년 면제권을 노린 그들은 14세가 되기 전에 범행을 결행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소설이 나올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소설은 다분히 일본적인 소설이다. 나쁜 말로 하자면 변태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미시마의 사상을 그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는 듯하다.

아마 미시마는 늙어서 죽는 걸 수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일본인들은 ‘죽음‘ 그 자체를 숭상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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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유희>(1961)
잇페이, 유쿄, 고지 라는 세 사람의 이야기.

초반부 상황 묘사가 난해하고, 전반적인 설정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세 명이 ‘친했다‘고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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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본명 히라오카 기미타케)는 세상을 참 섬세하게 느끼는 작가다. 섬세함의 극단에는 야만성이 있는 걸까?

미시마 상의 소설은 문장이 아름다운 만큼이나 서사가 명확하고 흥미롭다. 그래서 재미있다고 느껴지고, 그 안에 품고 있는 기괴하고 비틀린 주제 의식을 한 번쯤 눈감아주게 되는 그런 마력이 있다. 앞으로도 그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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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 10주년 기념판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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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오히려 두려움은 커지는 것 같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인 셸리 케이건은 먼저 죽음을 정의하려고 한다. 예로부터 죽음을 정의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가장 크게는 두 가지가 있다.

1. 육체-영혼 이원론 : 사람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
2. 물리주의(일원론) : 사람은 오직 육체다.

1은 종교적(특히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죽음이란 육체의 끝일 뿐이고 영혼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간다고 말한다. 사실상 1의 관점에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육체의 끝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2의 관점에서 육체의 끝은 곧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한다. 저자인 셸리 케이건은 영혼을 인정하지 않으며 ˝당신이 죽었다면 곧 죽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책은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말하는 내용은 얼마 안 되는데, 분량의 대부분을 당연한 것에 대한 사변적인 논증에 쓰고 있다. 겉으로만 요란한, 실제로는 다 아는 맛인, 그런 음식점 같았다. 말이 길다는 건 무지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심적인 위로가 된다는 이유로 최종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하는데, 나는 이 말에서 철학의 유용함과 무용함을 동시에 느꼈다. 모든 생각을 근거에 입각해서 한다는 면에서 철학의 유용함을 느꼈고, 심적인 위로를 무시하는 저자의 오만함이 실제 세상과 괴리되어 있는 데에서 철학의 무용함을 느꼈다.

나는 근거 따윈 없어도 심적인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 이유만으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고 본다. 실제로 우리는 예술이나 종교에서 많은 심적인 위로를 받으며, 모진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것이 명제적 참(객관적 진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예술(종교)을 없는 것으로 취급해야만 하는가?

피카소의 큐비즘은 실제 대상과 같은 모습이 아니므로 거짓인가?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으므로 예수는 거짓말쟁이인가?

예술(종교)은 사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그저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일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저자의 입장이 굉장히 재수 없고 불쾌하게 느껴졌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위안)을 느끼지 못하고 사실(참)에 천착하는 저자의 모습은 내가 바라는 삶의 자세가 아니다. 사람들이 예술(종교)을 믿는 이유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삶의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믿음을 단지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헛된 것으로 치부하는 자세는, 정말 재수 없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죽음에 대해서만큼이나 삶에 대해서도 골몰했다.

삶의 고통(두려움)은 변화(죽음)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온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가정으로 사는 게 최선일 것이다.

인생에서 행복의 기준은 여러 가지기 때문에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가정할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경제적인 일에 국한될 게 아니라, 그걸 함으로써 자신이 정말 보람을 느낄 일이어야 할 것이다.

삶은 세상을 인지할 수 있는 한 번뿐인 기회이다. 나 또한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언젠간 의식 없는 물질로 돌아가야 할 운명이지만, 그 전까지는 부모님께 선물 받은 삶을 소중히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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