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캐리스와 토니와 로즈 모두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 지니아는 그들의 연인을 한 번씩 빼앗아 갔다. 토니에게서는 웨스트를 빼앗았다.
지니아가 캐리스에게서 빼앗은 남자는 빌리였다. 그것이 가장 잔인한 도둑질이었을 거라고 토니와 로즈는 생각한다.
나한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갔는데, 그게 뭐였냐면, 빌리가 돌아올 거라는 거였어." "사후세계에선 소식이 되게 느린가 보네." 토니가 말한다. "빌리는 이미 돌아왔잖아." "엄밀히 말하면 돌아온 건 아니지." 캐리스가 깐깐하게 따지고 든다. "그러니까, 우리는…… 빌리는 옆집 이웃일 뿐이니까."
결과적으로 로즈와 토니는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려는 지니아의 갖은 노력에도 제각기 남자와 함께하는 삶고 있었지만 캐리스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최근에 사건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얼간이 빌리가 별안간 나타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후, 이제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빌리와 지니아는 단둘이 도망가 버렸다. 닭장의 닭은 몽땅 죽어 있었다. 두 사람이 빵칼로 닭의 목을 죄다 베어 버리고 갔던 것이다
지니아는 미치의 주머니까지 털어먹고도 캐리스가 미치의 정신적 고결함이라 부른 것까지 앗아 간 후 그를 차 버렸고, 미치는 결국 온타리오호에 투신해 익사했다.
먼 친척으로부터 어마어마하지는 않아도 섬을 떠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은 캐리스
물론 그들은 계약의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서명까지 떡하니 박힌 그 빌어먹을 계약서를 운운할 뿐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돈을 내어줘야 했다.
변호사들은 의뢰인을 처음에는 한입씩 베어 먹다가 나중에는 가죽이나 힘줄이나 발톱만 남을 때까지 흰담비나 쥐나 피라냐 떼처럼 조금씩 뜯어먹는 족속이었다.
결코 말이 많지는 않았고 신중했지만 어떤 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지를 지켜보다 보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가 드러났다.
"일자리를 구할 거야." 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일자리?" 흑요석 같은 심장의 소유자 이레나가 말했다. "진저에일도 있으니까 먹고 싶으면 먹어." "백과사전 팔아도 되겠네." 로드가 그렇게 말하며 웃자 나머지 둘도 웃음을 터뜨렸다. 백과사전 판매는 무책임하고 무능하고 절박한 사람이 동원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알려져 있었던 터다. 그리고 잭 데이스가 실제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판다는 생각 자체가 그들에게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네 소설 인세를 나누는 건 어때?" 로드가 말했다. 로드는 경제학 전공이었다.
"무슨 시간?" 재프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절대적 시간, 아니면 상대적 시간? 정신적 시간, 아니면 측정 가능한 시간? 유클리드적 시간, 아니면 칸트적 시간?" 철학 개론 수업에서처럼 사소한 것 하나하나 꼬치꼬치 물고 늘어지는 말장난
계약서를 작성한 사람은 로드였다. 월세 3개월 치에 1개월 치, 즉 잭이 내지 못했던 3개월 치에 앞으로 내야 할 1개월 치를 세 사람이 내주는 대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잭의 소설에서 발생할 인세 수입을 잭의 몫을 포함해 4분의 1씩 나누어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어떤 소설이든 소설 쓰기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재프리와 로드가 계속 비아냥거리게 놔둘 수는 없었다. 더는 이레나의 아름다운 푸른 눈에 서린 동정과 멸시를 견딜 수 없었다.
책이 출간되면 그동안 숨겨 온 너무 많은 진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분명 룸메이트들은 잭이 아무 생각 없이 소설에 집어넣은 각자의 모습이 유령의 집에 설치된 거울의 상처럼 왜곡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말 터였다.
잭, 이레나, 로드, 재프리는 결국 재계약을 하지 않고 각자 다른 집을 구해 떠났지만 잭은 로스쿨에 가기로 결정한 이레나와 계속 만남을 이어 갔다.
불가사의한 미소를 머금은 이레나는 여전히 실용적인 검은 팬티를 벗고 있는 모습으로 잭의 머릿속에 고이 자리해 있다. 훗날 1년에 두 번씩 잭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냉혹하고 탐욕스러운 마귀할멈과는 꽤나 다른 모습이다. 잭이 도통 통합시키지 못하는 두 얼굴을 가진 이레나랄까.
"하지만, 난 그 계약 잊고 있었어. 진짜 계약도 아니잖아. 그냥 농담으로 한 소리지, 그건 그냥……." "진짜 계약이야." 이레나가 냉담하게 말했다. 그때 이레나는 진짜 계약이 무엇인지 알 만큼 알고 있었다. "고의성이 입증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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