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해는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공량 金公諒 이라는 자에게 접근해서, 장차 정철이 세자 책봉을 매듭지은 뒤 인빈과 신성군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흘렸다.
격노한 선조는 정철을 삭탈관직한 것은 물론 다른 서인들마저 강등시켰는데, 동인의 손아귀에서 완벽하게 놀아난 꼭두각시다. 이것으로 동인은 서인에게 진 기축옥사의 빚을 말끔히 갚았다. 당사자들은 최종 승리라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사대부의 생리상 그런 일은 없다. 파이가 커지면 먹을 입도 늘어나는 게 부패한 권력의 속성이 아닌가? 승리한 동인들은 서인들에 대한 숙청의 정도를 놓고 두 파로 갈린다. 온건파인 유성룡은 남인 南人 , 강경파인 이산해는 북인 北人 이 된다.
사실 전란의 조짐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드러나고 있었다.15세기 중반에 시작된 일본의 센고쿠 戰國 시대는100년 이상 지속되다가16세기 후반에 들면서 점차 하극상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다이묘들 간의 서열이 정해졌다. 그중에서 대권 후보로 떠오른 오다 노부나가 織田信長(1534~1582)는 라이벌들을 차례로 제압하고1568년 드디어 교토에 입성했다. 조선으로 치면 선조가 막 즉위한 시기였으니, 이 무렵에 중앙 권력을 장악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당연히 일본의 변화에 주목했어야 한다. 그러나 곧이어 오다가 무로마치 바쿠후를 무너뜨렸을 때도, 또 그다음에 최대의 라이벌인 다케타 세력을 쳐부수고1580년에 드디어 사원 세력마저 정복해 일본 열도의 통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그나마 균형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이이가 죽기 전에10만 명의 병력을 양성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부르짖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582년 오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뜻하지 않게 죽은 것은 조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조선 침략은 실제보다 몇 년 앞당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은 그 귀중한 마지막 몇 년을 동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쓸데없는 종계변무 문제로 탕진해버렸다. 오다의 뒤를 이은 간웅 奸雄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1536~1598)는 본토만이 아니라 시코쿠와 규슈, 홋카이도까지 차례로 정복하고1590년에 드디어 일본 역사상 최초로 전 일본 열도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로 대외 침략에 나설 필요성이 있었다. 오랜 내전의 시대에 팽창할 대로 팽창한 군사력, 내전이 끝나면서 실업자가 된 센고쿠 다이묘들의 불만,
일본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 황제가 책봉하는 것은 바쿠후의 쇼군일 뿐 일본 천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록 실권 없는 천황이지만 상징적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으니 조선과 달리 일본은 형식적으로 중국의 제후국이 아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측의 사절단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불렀는데, 이는 쇼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간주했다는 의미다(《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일본 국왕’도 천황이 아니라 쇼군을 가리킨다).
가관인 것은 통신사의 보고 내용이다. 조정이두 파로 나뉘어 있으니 국정의 모든 사안마다양측을배려해야 한다.그래서 통신사의정사 正使 인황윤길 黃允吉(1536~?)은서인이고,부사 副使 인김성일 金誠一(1538~1593)은 동인이다. 비록 나라 안에서는 코를 깨물고 싸우더라도 나라 밖에서는 국익을 도모하는 데 의견이 일치해야 정치인의 도리가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그 기대를 무참히 깨버린다.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함대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조선을 침략할 게 틀림없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한 것이다.
정사와 부사가 정반대의 견해를 내놓는데도 조정에서는 사실 확인을 채근하지 않고 부사인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그 와중에 벌어진 정철의 건저 문제로 동인이 우세해진 탓이었으니, 당시 조선 정부가 얼마나 판단 능력이 부재했는지를 말해준다.
임진왜란은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칠 테니 문을 열라는 구실을 내세워 조선을 침략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정복이 단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도요토미는 한반도를 넘어 중국 대륙을 공격하려 했으며, 나아가서는 멀리 인도까지 침략할 구상을 품고 있었다(물론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구상은20세기에 현실화된다. 이렇게 보면 일본의 대륙 침략은 이미 일본 열도가 통일되는 시기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셈이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폐쇄적이었던 중화 세계와는 달리 일본은 이미 일찍부터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역을 했고(중화 세계의 중국과 조선은 조공을 통하지 않은 사무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다),16세기 중반에는 포르투갈 상인들과 무역을 하면서 조총이라는 신무기도 수입했다.
화력과 병력에서 앞선 일본군은 조선이 제정신을 차렸더라도 당해내지 못할 강적이었다. 게다가 조선에는 변변한 정부군마저 없었으니 백성들과 승려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는 것 외에는 달리 항전의 수단이 없었다. 더 불행한 일은 350년 뒤에도 이런 현상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사실 일본이 준비한 함대는 병력 수송선이지 해전을 벌이기 위한 전선 戰船 이 아니었다. ● 일본군의 해상 전술이라고는 고작해야 배를 서로 붙여놓고 적의 배에 뛰어올라 자신들의 장기인 검술로 싸우는 것
임진왜란은 여러모로 20세기의 한국전쟁과 닮은 데가 많다. 우선 전쟁의 책임자가 아니면서도 한반도가 전장이 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개전 직후 공격 측의 일방적인 공세, 반격과 소강상태, 제3국(중국)의 참전 등 전쟁의 전개 과정도 그렇다. 게다가 종전 협상 과정은 더더욱 닮았다. 한국전쟁에서 국제연합과 북한이 휴전 협상의 주체였듯이, 임진왜란에서도 조선은 협상에 끼지 못하고 명의 일개 사신과 도요토미가 협상 주체였다. 일본의 요구 중에 조선의 국토와 왕족까지 포함되어 있는데도 조선은 발언권이 없었다(더구나 명의 강화 요구는 일본군이 조선에서 물러나고 도요토미가 사과하는 정도였을 뿐 조선이 입은 막대한 피해는 전혀 배려되지 않았다). 결국 조선은 일본과 명이 서로의 힘을 가늠해본 전쟁터만 제공해주고 만 셈이다. 마치 한국전쟁을 통해 서방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가 서로의 힘을 시험했듯이.
결국 이듬해인1597년1월 도요토미는 재차 원정군을 보냈는데, 이것이 정유재란 丁酉再亂 이다. 명의 사신에 불과한 심유경의 어처구니없는 농간 때문에 조선은 다시 한 번 난리를 겪게 되었다.
일본의 제안을 명 황실에서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심유경이 엉뚱하게도 도요토미가 자신을 일본 왕으로 책봉해주고 명에 조공을 바칠 테니 허락해달라는 조건을 내세웠다고 본국에 보고한 것이다. 통역의 잘못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허위 보고
하지만 정유재란은 처음부터 임진왜란과는 딴판으로 전개되었다. 우선 일본군의 사기가 전만 못했으며, 개전 초부터 명군이 출동했다. 또1차전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조선의 관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적극 대처하여 충청도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1598년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일본군이 철수하는 것으로써7년간에 걸친 일본의 조선 침략 전쟁은 끝났다.
오랜 전란으로 한반도 전역이 거의 폐허처럼 변했고,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삶의 터전을 잃었다. 임진왜란의 ‘종군기’에 해당하는 유성룡의 《징비록 懲毖錄 》은 그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앙과 지방 할 것 없이 굶주림이 심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데 지쳐 늙은이와 어린이 들은 도랑과 골짜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둑이 되었으며, 게다가 전염병으로 죽어 넘어지고,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다."
더욱이 전쟁 전에 전국적으로170만 결에 이르던 경지가 종전 후에는 불과3분의1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전쟁으로 빚어진 엄청난 재앙을 복구할 재정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현실적 피해뿐 아니라 문화적 피해도 막심했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건축물이 잿더미로 변했고, 사서들을 보관한 춘추관이 불타 없어졌다. 아울러 수많은 백성이 일본으로 잡혀가 노예가 되기도 했다. 그 가운데 도공이나 인쇄공 들이 일본 문화의 창달에 기여한 것은 의도하지 않은 문화 전파였던 셈이다. ●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의 지배 체제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오히려 사대부들에게는 큰 ‘성과’가 있었다. 삐걱거리면서도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하던 과전법이라는 토지제도가 완전히 무의미해진 것이다. 토지가 황폐해졌고 토지대장도 사라져버렸으니 이제 공전이고 사전이고 가릴 것 없이 말뚝만 꽂으면 모두 내 땅이었다. 그 말뚝은 물론 권력자만이 꽂을 수 있다. 대부분이 지주들인 사대부들은 마치 그때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이 일제히 토지 겸병에 나섰다. 몽골 지배기가 끝난 고려의 경우와 너무나도 흡사한 상황이다.
어떻게든 집권 세력인 남인의 꼬투리를 잡으려는 북인은 영의정 유성룡이 명에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며 탄핵했다. 결국 유성룡은 정계에서 은퇴해버렸고,2년 뒤 복직이 허용되었을 때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더욱 터무니없는 일은 그렇게 해서 남인을 몰아낸 공로를 놓고 다시 북인이 둘로 분열된 것이다. 유성룡의 탄핵을 주도한 남이공 南以恭(1565~1640)은 오히려 홍여순 洪汝淳(1547~1609)이 대사헌으로 승진하자 발끈했다. 임명은 국왕이 했지만 그것은 물론 홍여순을 지지하는 세력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북인이라는 같은 집에 살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남이공은 따로 살림을 차려 나갔는데, 그의 새 집은 소북 小北 이 되었고 홍여순의 옛 집은 대북 大北 이 되었다.
그 어린 계비 인목왕후 仁穆王后(1584~1632)가4년 뒤에 아들 영창대군 永昌大君(1606~1614)을 낳자 광해군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훨씬 어리더라도 엄연히 왕실 적자 출신이니 서자인 자신과는 신분이 다른 것이다. ●
●조선의 국왕은 많은 후궁을 거느릴 수는 있었지만 정비는 하나뿐이었다. 정비가 죽었을 때는 계비를 맞을 수 있었는데, 후궁들 가운데서 고르거나 궁 밖에서 데려왔다. 왕실에서 서얼의 차이는 있었으므로 정비나 계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大君)이고 후궁의 아들은 그냥 군(君)이며, 딸은 각각 공주와 옹주(翁主)가 된다(그래서 광해군도 광해대군이 되지 못했다).
1600년에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죽은 게 광해군에게는 큰 불운이었다.
그녀가 죽었으니 혹시 선조가 계비라도 들인다면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과연 그 혹시는 역시가 된다. 난리가 가라앉은1602년에 선조는 쉰 살의 나이로 열여덟 살의 계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박응서는 선조 초기에 영의정이었던 박순(朴淳)의 서자로, 학문과 재주가 뛰어났으나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좌절한 인물이다. 그는 같은 처지의 명문 출신 서자들과 함께 ‘강변 7우’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신세를 한탄하다가 광해군 즉위 초에 서얼 출신에 대한 차별을 없애달라고 탄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공교롭게도 광해군은 그 자신도 왕실의 서자로 설움을 겪었으면서도 그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쓴 허균(許筠, 1569~1618)은 친구인 박응서가 체포된 뒤 신분 해방의 꿈을 접었으나 1618년 반역을 꾀했다가 처형당했다.
전혀 아귀도 들어맞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였으나 광해군에게는 최대의 맞수인 영창대군과 소북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광해군은 김제남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 이듬해에 영창대군을 유배시켰다가 죽였으며, 그 밖에100명이 넘는 소북 세력을 숙청했다. 열네 살의 영창대군은 이이첨의 끈질긴 사주로 강화부사에게 비참하게도 뜨거운 증기로 쪄서 죽이는 증살 蒸殺 을 당했다. 이로써 반대파는 완전히 제거되었고 광해군은 왕당파를 심복으로 삼아 왕권을 단단히 다지는 기반을 마련했다.
국왕에게는 좋은 건수로 활용할 만한 사건이 계속 터졌다. 이듬해인1612년에는 황해도에서 허위 역모 사건이 꾸며졌다. 내용 자체는 터무니없었다. 김경립 金景立 이라는 자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사기를 치다가 걸리자 봉산 군수 신율 申慄 은 그를 고문해서 김백함 金白緘 이라는 자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김백함을 체포하니 그의 아버지 김직재 金直哉 가 일찍이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의 상중에 술과 고기를 먹었다가 파직된 사연이 드러났다. 역모를 조작할 수 있는 좋은 건수다. 고문에 못 이긴 김백함은 엉뚱하게도 인목왕후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 金悌男(1562~1613)을 불었고, 때마침 충청도에서 강도질을 하다 잡힌 박응서 朴應犀(?~1623)라는 자가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 했다는 사건까지 겹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졌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건축을 서두른 게 상징적인 재건이라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시행한 대동법 大同法 은 실질적인 국가 재건 사업에 해당한다. 전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었으니 가장 시급한 게 토지와 조세 제도다. 남아 있는 토지라도 추슬러놓아야 농업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고 무엇보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데 그 재정은 토지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전법이 유명무실해진 탓에 관리들의 녹봉 체계도 재정비해야만 국가의 기틀이 설 수 있다.
1608년 광해군은 경기도를 대상으로 대동법을 시범 운용했다. 대동법은 처음에 선혜법 宣惠法 이라는 명칭이었고 이 제도를 집행하는 기관으로 선혜청 宣惠廳 이 설립되었다. ‘선혜’라면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지만, 실은 백성들을 위하려는 게 아니라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필요했다.
대동법의 기본 정신은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그 이름처럼 간단하다. 생산자들이 국가에 납부하는 모든 조세를 한 가지 품목, 즉 쌀로 통일하는 것이다(이 쌀을 대동미 大同米라고 불렀다). ●
이전까지 농민이 국가에 내는 것은 편의상 조세로 통칭했지만 실은 기본적인 전세 田稅 를 비롯해 공물, 진상 進上(특산물), 잡세 등등 다양했다. 생활양식이 다양하니 그랬겠지만 세금을 그렇게 여러 가지로 거두어들인다면 재정 운영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고, 무엇보다 부패한 관리가 임의로 착복하기에 유리하다(그래서 근대 국가로 진화할수록 조세의 납부 방식은 단일해진다).
사실 대동법은 순수한 발명품이 아니라 ‘원조’가 있다. 국내판 원조는 일찍이 이이가 주장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다. 이것은 특산물 공납제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공납을 쌀로 통일하자는 구상
유통망이 발달한 덕분에 지방의 특산물 정도는 왕실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세제를 통일할 조건이 숙성된 것이다.
대동법이 실시되자 과세의 표준이 확립되었고, 지방관들의 농간도 줄어들었다. 또한 탈세의 여지도 적어졌을 뿐 아니라 면세지 자체가 줄어 국가 재정이 강화되는 당장의 효과를 보았다. 아울러 조세 품목이 쌀로 단일화됨으로써 장차 화폐경제의 도입을 가능케 하는 장기적인 효과도 기대하게 되었다.
광해군 시대에는 중부 지방부터 양전이 이루어지면서 그에 따라 대동법도 점차 확대 실시되었다. 이리하여 속도는 느리지만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19세기 말까지 조선의 기본적인 세제로 기능하게 된다
서양에서는 중세부터 지대(rent)의 개념이 발달한 반면, 동양에서는 왜 지대가 없었을까? 지대의 개념을 적용하면 세금 제도는 아주 쉽게 해결된다. 땅의 이용자(농민)는 땅의 소유자(지주)에게 세금을 내고, 지주는 또 그것으로 국가에 세금을 내면 되기 때문이다(현물이든 화폐든 상관없다). 동양 사회에 그런 방식이 적용될 수 없었던 이유는 ‘지주’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양식 왕국에서 모든 땅은 왕(국가)의 것이다. 지주라는 용어는 있으나 서양과 달리 동양의 지주는 단지 ‘수조권자’일 뿐이다. 현실적으로는 실제 소유자처럼 처신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왕토 사상이 적용되므로 지주는 땅의 진정한 소유자가 아니었다(
1593년에 중국과 조선에서 건주라고 부르던 힘의 공백 지역을 통일한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 努爾哈赤(1559~1626)가 바로 그 구심점이었다(원래 여진이라는 이름은 중국인들이 만주 지역의 여러 민족을 통칭하던 명칭이었으나 이 시기부터의 여진은 보통 만주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오늘날 중국 한족이 흔히 만족 滿族이라 줄여 말하는 게 그들이다)
후금이라면400년 전 송(북송)을 멸망시킨 금의 후예라는 뜻이며, 천명이라면 하늘의 명령이라는 뜻이 아닌가? 더욱이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중국 한족 왕조에 사대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표현이었다.
만주 쪽에서 보기에는 중원보다 더 가까운 게 한반도이고, 중국보다 더 약한 게 조선이다.
명은 서산에 지는 해이고, 후금은 동쪽 바다 위로 뜨는 해다. 하지만 명은 아직 후금이 두려워하고 있는 강대국이며, 전통적으로 조선의 상국이다. 그래서 광해군의 줄타기는 결코 쉽지 않다. 하나 다행스런 전망은 줄 위에 머물러야 하는 기간이 그리 오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조만간 늙은 공룡 명 제국이 쓰러질 것은 뻔해 보였으니까 그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광해군은 절묘한 타개책을 찾아낸다. 지원군을 보내되 싸우지는 않는다는 전략
광해군은 측근들도 모르게 강홍립에게 후금군과 가급적 싸우지 말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알아서 눈치껏 처신하라는 명령인데, 과연 강홍립은 명의 제독 유정 劉綎 의 군대와 랴오둥에서 합류한 뒤 싸우는 척하다가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해버렸다.
1622년 이이첨이 폐위된 인목왕후를 살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반대파의 공분을 자아내기에 족했다. 특히 정철이 실각한 이래 오랫동안 권력의 맛을 보지 못한 서인들은 이런 분위기를 틈타 뭔가 일을 엮어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왕당파란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되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1617년 인목왕후를 폐위시켜야 한다는 대북인들의 주장을 광해군이 쉽게 허락한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 ●
손쉽게 궁궐을 장악한 반란군은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왕후에게 옥새를 건넨 다음 그녀의 손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조선의16대 왕인 인조 仁祖(1595~1649, 재위1623~1649)이므로 이 사건을 인조반정 仁祖反正 이라고 부른다. 엄연히 기존의 합법적인 왕권에 도전한 것이므로 실은 쿠데타였지만, 성공한 쿠데타이기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反正]’행위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다.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고 왕국을 사대부 국가로 복원시켰다는 점에서, 인조반정은100여 년 전의 중종반정과 동급이 될 소지가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수많은 공신이 책봉되는 것은 당연할 터이다. 왕당파를 주도한 대북파의 우두머리들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은 처형되었고, 반정을 주도한 소장파 서인들을 비롯해50여 명이 정사공신 靖社功臣 으로 책봉되었다.
외적의 침략도 아닌 국내의 반란으로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은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관리들과 백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수십 년 전 일본의 침략을 받아 선조가 버선발로 도망친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국가 비상사태였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내란으로 국왕이 꽁무니를 뺀 이번 사건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광해군이 주도한 왕국화의 노선이 붕괴하면서 국왕의 체통도 완전히 무너진 셈이다. 하지만 조선 백성들은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 뒤 그때 도망친 국왕이 외적 오랑캐 앞에서 무릎을 꿇는 광경까지 목격하게 된다.
후금은 황해도에 주둔한 채 강화도의 피난 정부에 화의를 제안했다. 그들의 요구 조건은 간단했다. 명의 연호를 사용하지 말고 조선 왕실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인데, 그들이 침략해온 이유가 뭔지를 명백히 말해주는 요구다. 즉 후금은 장차 명을 칠 때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의 태도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조선을 응징하기 전에 먼저1636년4월에 국호를 중국식 이름인 청 淸 으로 바꾸어 중원 정복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그래서 나중에 그의 시호도 중국식의 태종 太宗이 되니까 이때부터는 그를 청 태종이라 불러도 되겠다). 일정이 확실히 잡힌 만큼 후방을 다지는 일은9년 전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일단 그가 취한 조치는 전쟁이 아니라 ‘외교’였다. 그는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아울러 청에 대해 호전적인 태도를 가진 주전론자들을 압송하라고 주문했다. 예상했겠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이 그 요구를 받아줄 리 없었다. 결국 그것은 전쟁을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드디어 그해12월에 청 태종은 직접12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침략에 나섰다. 이것이 병자호란 丙子胡亂 이다.
결국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이산가족’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지방에서 오는 군대도 자연히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집결하면서 이곳은 조선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 이곳이 나라의 수도가 된 것은 일찍이 옛 백제의 근초고왕이 이곳을 도성으로 삼은 이래무려1300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피난처였기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1만 명이 넘게 불어난 성의 수비대를 감안하면 비축된 식량으로는 두 달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청 태종은 굳이 성을 공략하려 하지 않았다. 이제20만 명으로 늘어난 군대로 성을 튼튼히 포위한 채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선 병력을 경기도 일대에서 차단하면서 기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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