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파란 눈 검은 머리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뒤라스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뒤라스가 자신이 겪었던 삶의 비밀을 말로 표현할 수 있든 표현할 수 있지 않던 기록 하고자 한 작가라는 이유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소스라치는 깨달음의 순간이, 깨달음 이후로 깨달음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단절을 만들어내는 깨달음의 순간이 존재할 거다. 어떤 사람들은 이 깨달음을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표현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동심을 잃었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어른이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이 깨달음은 무게만 무겁고, 사람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는 변화만 만들어낼 따름이지 어느 기준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서는 전혀 가치가 없을 수 있다. 한 사람은 이 깨달음을 알기 때문에 그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더 제멋대로가 되어버릴 수도 있고, 죽음과 마주할 수도 있다.
그런 비밀의 순간, 변화의 순간을 목도하고 난 뒤에 작가는 이 순간을 돌이키며 다시 적는다. 그렇지만 적을 때, 읽힐 때, 그 순간은 온전하고 생생한 현재가 된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현실에 맞닿아 있는 채로.
대부분의 뒤라스의 소설은 이 깨달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인지한 상태로 쓴 소설이다. 깨닫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과거가 다시 한번 살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상태. 가령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뒤라스의 소설 <파란 눈 검은 머리>에서 주인공인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여름의 한순간에서 시간 상으로는 벗어나 있지만, 기억으로는 벗어나 있지 못한다. 그들에게 현재는 없는 거나 다름없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자면, 그들에게 과거의 그 한순간은 어느 때보다 더 현실적인 현재다.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무수한 역설 속에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안다. 이 이야기에서는 한 남성을 사랑하는 여성이 말하기 시작한다. 여성이 사랑하는 남성은 동성애자 남성으로, 그 남성이 (동성애자이므로)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 남성을 사랑한다. 동성애자 남성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성적 욕망을 실현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함께 그 불능을 본다. 사랑의 불가능함을 본다.
그런데 그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나고, 사랑이 진행된다. (리베카 솔닛과 다른 사람들이 말했듯) 욕망은 욕망을 가진 주체가 욕망하는 대상과의 거리가 절대 좁혀지지 않는 때에야 발생할 수 있으니까. 주체와 대상 간의 합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욕망은 충족되고 충족 이후에는 소멸이 뒤따른다. 욕망의 바깥에는 욕망이 생겨난 사유가 있고, 한 사람이 욕망의 안으로 들어서고 나면 그 사람은 사유를 망각하기 마련이다. 망각해야지만 온전한 욕망 속에 존재할 수 있으므로. 소설 속의 두 인물은 그러나 이 욕망을 사유한다. 사유하는 과정에서 욕망은 분석된다.
소설은 이 분석의 과정을 보여준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 채로 그 일을 겪고 난 사람이 일의 원인을 찬찬히 분석해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자세로. 인물들은 더는 말할 수 없는 상태에 관해서 말한다.
만약 사랑의 가능성이 사랑의 불능에 있다면, 아마도 헤테로 사이의 사랑은 남성과 여성이 너무나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될 것이다. 동성 사이의 사랑은 그들이 같은 성별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르다는 사실, 다르기 때문에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으나 그 사랑할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다 말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다가 통속적이라고 불리는 삼류 영화 삼류 이야기들의 사랑에 관해서 생각해봤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인위적인 구석이 있다.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 때 이 인물들이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조건화하여 제시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가진 돈의 양이 다르다는 것에서 비롯된 신분의 격차. 또는 사랑의 대상이 어긋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삼각관계. 혼인으로 묶인 사람이 있으나 그 약속 외의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발생하는 불륜. 그러나 이 사랑할 수 없는 이유 속에서 얼마나 자주 사랑이 발생하곤 하는가. 사랑하면 안 될 사랑이 발생하곤 하는가.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랑, 그 사랑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사랑의 주체들조차 불가능한 조건이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각본이 생성한 사랑 안으로 몰입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이 사랑과 거리를 지키며 사랑의 출처를 묻는 행위, "그녀가 말한다, 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사는 모양새로 살게 될 거라고, 사막에 내버려진 육체를 가지고 그와 함께, 마음속에는, 단 한 번의 키스와, 단 한마디 말과, 단 한 조각 시선을 하나의 오롯한 사랑을 떠안는 기억으로 품고서." 라는 구절처럼 이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하며 사랑에 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살겠다는 행동은 얼마나 용감한 일인지. 이 과정과 이 경험은 그 자체로 사랑이 아닐 수 없는 사랑이 되는 거라고 소설은 이야기한다. 인물들은 사랑을 깨닫는다. 깨닫는다는 걸 알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