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틈틈이 읽었기 때문에 읽는 내내 몰입해서 읽지도 못했고 부분부분 어렵사리 읽어나갔다. 초반부는 특히 더 집중이 안됐다. 그렇지만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이 소설을 시작하기를 너무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읽은 배수아 소설 뿐만이 아니라 읽은 한국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이렇게 말한 걸 뒤엎을 만한 또다른 좋은 소설을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이 빈곤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한국에서의 빈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개개인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탐구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더 와닿게 느껴졌을 수 있다. 

작가의 말 :"이것을 쓰게 된 가장 직접적인 동기는 빈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분명한 빈곤인 개인적으로 겪는 가난, 궁핍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지금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한 자기애의 치명적인 상처 등이다. (...)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만났거나 혹은 직접 만나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서 빈곤을 읽었다. 가난을 겪은 사람이나 심지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 말고는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읽은 것이 없다고 말할 수조차 있다. 극단적으로 단언해서, 나를 포함해서, 빈곤하지 않은 사람을 나는 한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인용한 부분처럼, 빈곤의 층위는 다르겠지만 살면서 한번도 빈곤의 문제를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여러 모습의 빈곤과 연관된 인물들이 나오는데, (배수아의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통일된 이야기를 갖고 있다거나 그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확실히 설명할 수 있지는 않다. 그들의 모습은 일화 속 조연처럼 모호하고 단편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다만 그 중 후반부에 나오는 한 사람에 대한 부분적인 이야기는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데 그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서 돈이 필요한 것은 야만적이다. 그것은 노동을 강요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노용은 노동을 하지 않고, 친척이 노용에게 주고 나서 잊은 집에서 기거하며, 사람들이 버린 음식물을 먹고 식당에서 남은 재료를 구해 먹는다. 노용에 대한 이 간략한 소개는 바르다의 영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바르다의 이 영화에서도 (노용과 노동에 관한 생각은 다를지 몰라도) 시장에서 버려진 음식을 줍고 쓰레기통에서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바르다의 애정 가득한 시선이 느껴졌었다. 이 책에서 역시 '노용'이라는 허구의 캐릭터를 알게 되면서 그 사람에 대한 작가의 애착과 더불어 '노용'이 느끼는 노동에 대한 거부감과 가난의 한 부분은 곧 읽는 누군가의 옆에 있는 사람의 한 부분, 혹은 읽는 사람 그 자신의 한 부분일 수 있다는 느낌도 동시에 들었다. 빈곤의 기억이란 정말 묘하다. 각자 서로 정말 다른 모양의 빈곤을 경험하면서 빈곤의 기억으로 가끔씩 연결될 수도 있다니. 

그렇지만 이 책에서 작가는 작품 안에서 빈곤에 대해 공동체 의식을 느끼는 인물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의문도 함께 제시한다. 

("(백두연:) 역사란 개인사의 불행에 대한 원망의 대상으로만 머물기에는 부적합한 것이죠. 왜냐하면 그런 개인의 역사가 바로 한국의 역사이고 우리가 짊어지고 그리고 물려주는 유산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시간을 매개로 하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에는 가장 영원에 근접한 존재입니다."
/(...) '그러나 곧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때 느꼈던 두려움의 기억이 그를 순간 떨게 했다. 굶주림이나 추위, 외로움 따위에 대한 공포만은 아니었다. 집을 나간다 할지라도, 그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은 이 땅에서 결코 아주 다른 곳으로는 떠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왜 백두연은 공허한 웅변으로 결코 자랑스럽지도 않을 그를 자신과 같은 역사의 무리 안으로 몰아넣으려는 것일까. (...) 그들은 공통점이 없었다. 그들은 한시도 같은 '역사' 안에 머물렀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그는 일생 동안 한국인도 뭣도 아니었다. 오직 무참히 짓밟힌 인간, 그것일 뿐.')

동일시와 동일시가 야기할 수 있는 폭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타인으로 구분지어야 하는가? 가난으로 어떤 사람과 동일시를 느끼는 게 옳지 않은 점이 있다고 느끼면서도 결국 어떤 지점에서는 동일시를 느끼는 건 어떻게 된 감정일까? 여러 의문들이 든다. 의문들이 해결될 거라는 확신이 없어도 빈곤의 문제를 다룬 영화와 소설을 보면 어떻게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타인에게 그 사람이 원하는 만큼만, 원하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고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함께하는 게 그 사람을 존중하는 방식 중 하나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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