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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시가 아니다 ㅣ 세계사 시인선 139
이승훈 지음 / 세계사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쓰고 싶은 일기가 있었는데 그새 까먹어서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싶다) 산책 얘기를 했다. 생각이 유난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날들인데, 의식적으로 멈추려는 노력을 자주 한다. 아마 불안정하기 때문에 생각이 불안정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겠고, 그러기는 싫기 때문이다. 오늘 읽은 이승훈의 시집 <이것은 시가 아니다>에 실린 시들은 화자의 생각의 흐름을 잘 관찰해 볼 수 있는 시들이다. 시 같은 일기이고 일기 같은 시다. 손자들과의 즐거운 일상도 실려있는 한편,
(“석준이(초등학교 3학년) 아니면 호준이(여섯 살) 짓이다 그들은 아파트 4층에 살고 나는 3층에 산다 나를 놀리는 거다 흥 내가 모를 줄 알고? 이젠 안 속는다 안 속아 또 현관 벨 소리 이번엔 나가지 말고 방에 앉아 있어야지 내가 모를 줄 알고? 계속 벨 소리다 참다 못해 호준이지? 큰소리치며 문을 열면 신문 구독료 받으러 온 낯선 사내가 서 있네”,<현관 벨 소리>)
언어에 관한 생각, 시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하기도 하다. ("결국 난 시를 쓰지 않으려고 시를 쓴다 시를 버리려고 언어도 버리려고 모두 버리려고 담배도 바꿨다", <시론>) 시를 말하지 않으면서 시를 말하고 있는 역설로 읽을 수 있었다. 이 시집을 읽고 가장 자주 느껴졌던 것, 가장 좋았던 점은 이런 시들에 관한 화자의 저항 불가능한 사랑이 느껴진다는 거다. ("시는 창조가 아니라 표류이고 이 표류가 표류가 기쁘다 목적이 없어 기쁘고 묶이지 않아 기쁘고 여기저기 흩어져 기쁘다", <시론>) 시가 뭔지도 모르고 아마 앞으로도 모르겠고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그러니까 시의 조건도 없겠지만, 그래도 시를 사랑하는 일. 남는 건 시가 좋다고 말하는 일. 시의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게 가짜인지 진짜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해도 사랑하는 일.
(“손이 떨려도 좋아 글자가 틀려도 좋아 감기에 걸려 또 약을 먹었지 바른 손이 저리면 왼손도 저리고 저려도 좋아 저려도 좋아 이런 시는 쓰지 않아도 좋아 감기에 시달리며 가을이 가네 그대 소식 없어도 좋아 인제 가던 길가에 흔들리던 코스모스”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기침하는 가을이 좋아 떨리는 글씨가 좋아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어느 날 그대 낙지 천국에서 매운 낙지 먹고 난 고등어 먹으리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아 바람에 흔들리는 백지 읽을 수 없어도 좋아”
<손이 떨려도 좋아>)
이렇게 좋다는데 무작정 좋다는데, 읽는 내가 이 시들을 안 좋아하고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그저 같이 좋아할 수밖에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세계가 있을까 감탄하게 되기도 했고!
이승훈은 고등학교때 친구가 읽어서 어깨 너머로 좋아하다가, 성인이 되어서 전집을 산 시인이다. 전집은 이승훈이 살아 있을 때 출간되었다. 한 권의 전집에 아쉽게도 그의 모든 시들이 들어있지는 않다. 아마도 본인이 선택한 모양으로, 거의 대부분의 시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빠진 시들이 있다. 정말 좋은 시들이 빠지기도 했어서, 전집을 사서 훌훌 넘기며 읽었어도 시집 한 권 한 권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의 시집 <이것은 시가 아니다>를 읽기 전에 잠깐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이미 아는 세계를 또 들여다봐도 괜찮을지. 읽고 나서는 역시 생각이 바뀌었다. 아는 세계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보는 것은 머무름일 수도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찾아내서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또 새로운 걸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