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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은 왜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하늘 아래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그런 말들이 많이 들려온다. 수천년에 걸쳐 수많은 이야기꾼들이 이미 만들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만들었다고. 앞으로 들려질 이야기들은 앞선 이야기들의 변주나 조합에 불과하다고. 과연 그럴까? 글쎄, 한마디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문제지만, 적어도 뒤늦게 태어난 이야기꾼들이 점점 힘들게 작업을 해야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김영하의 <아랑은 왜> 역시 '새로운' 이야기를 위한 작가의 노력이 담긴 작품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위해 작가가 선택한 소재는 바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글을 쓰는 작가들의 머리 속을 온통 들끓게 했지만, 대개의 경우 종이 위에는 옮겨지지 않는 내용들이 이 소설 속에서는 이야기 그 자체가 되었다. 주인공의 아이덴티티는 어떻게 정할까? 요런 놈으로 할까, 저런 놈으로 할까....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 어디쯤에서 반전을 줄까? 어떻게 결말로 다가설까? 등등... 때로는 수없이 되풀이 되는 공식들까지. 이야기 만들기의 과정이 소설의 핵심이 되고, 소설 속 아랑과 미용보조사의 스토리는 오히려 보조적인 재료가 되어 버린다.
때문에, '이야기'라는 것 자체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나름대로 참신하고 흥미로운 소설이 되었다. 나 역시 읽는 동안만은 충분히 즐거웠다. 수많은 이야기꾼들이 어쩔 수 없이 거치곤 하는 비슷비슷한 과정들을 떠올리며, 이럴 꺼라면 왜 세상엔 그렇게 많은 이야기꾼들이 존재해야하는 걸까 ... 그런 생각도 해보면서.
하지만, 작가의 새로운 시도와 기분좋을 정도로 재치있게 펼쳐지는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기대한 만큼의 완성도를 안겨주질 못한다. (적어도 내게는... ) <아랑은 왜>를 읽은지 넉달 쯤 지난 요즈음, 서서히 이 소설은 읽었어도 그만, 안 읽었어도 그만인 소설 쪽으로 분류되고 있으니.
아무리 재료에 불과했다하여도, 아랑의 이야기와 미용보조사의 이야기가 비교적 안이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이 아쉽다. 두 이야기가 좀 더 연관을 지으며 '이야기 만들기'라는 주제를 밀도있게 발전시켰다면 좋지 않았을까. 작가가 '이야기 만들기'라는 비슷비슷한 행위에 대해 어느 정도의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는 '딱 그 정도만큼', 두 개의 스토리 역시 그저그런 수준에서 멈추고 만 건 아닌지.
사실, 많은 작가들이 소설을 쓰면서 어느 수준까지는 대동소이한 과정과 수없이 되풀이된 고민을 또 반복할지 모른다. 하지만, 정말 훌륭한 작품은 그 한계를 극복하는 작가로부터 탄생한다. <아랑은 왜>가 하나의 시도에 그치는 듯 보이는 것은, 김영하라는 작가가 '그 한계' 이전까지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기대가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면, 작가는 <아랑은 왜> 정도의 고만고만한 작품을 쓰는 수준에 머물지도 모르는 것이다.
쓰다 보니 <아랑은 왜>라는 작품에 대해 너무 삐딱한 내용을 적고 있는데, 사실은 김영하라는 작가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최근에 접한 젊은 소설가 중에 그만큼 재주가 있는 작가도 드물다고 생각한다...재주라고 하면 작가에게 실례인가? 그렇다면 재능이라고 표현을 바꾸자.)
따라서,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작가의 기대도, 이 소설 속에서 언급되어진 그 이상일거라 믿고 싶다. <아랑은 왜>라는 소설 역시, 그가 작가로서의 긴 여정의 초입길에서 일종의 '자기 점검'을 위해 쓴 작품이기를 바란다. 이야기 만들기에 관한 고민의 흔적 정도로 말이다. <아랑은 왜>에서 남은 아쉬움을, 작가가 다음 작품에서 꼭 메꿔주기를 기대해본다. 그의 다음 작품이라면, 분명 찾아서 챙겨읽을 독자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