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 현실문화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2003년 12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해서 만든 첫 번째 인권 사진집 <눈.밖에.나다>에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쟁이 필립 퍼키스는 <사진 강의 노트>에서,  “나는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사진은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직접 부딪치기 싫어하는 것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고 말했었다. 인권위에서 기획한 이 사진집만큼 그 창문에 꼭 맞는 책도 드물 것이다. 나는 바로 그 창문을 통해 선생님이 되고 싶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혜선이와 희망을 마음껏 노래하고 있는 장애인 곽상필과, 오늘이 늘 불안한 이주 노동자들과, 완전한 한국인이 되지 못하는 혼혈인 같은 소외당한 이 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홉 사람의 사진가가 담은 우리의 오늘은, 짐작하겠지만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어두운 흑백 사진 속에서 책장을 펼쳐 든 나를 바라보는 그네들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 힘들 정도였지.


2006년 1월, 인권위에서 만든 두 번째 사진집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에는 성남훈, 임종진, 김중만, 노익상 같은 10명의 사진가들이 공들여 작업한 사진에다 공선옥, 방현석, 이문재, 조병준이 글을 보탰다. 책이 두꺼워지고 책값이 좀 오른 것 말고도 첫 번째 사진집의 한없는 우울함에다 밝은 빛깔 희망이 보태졌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하겠다.


성남훈이 작업하고 공선옥이 글을 쓴 첫 번째 꼭지 ‘엄마 저어 오네에’는 강원도 정선에 살고 있는 아람이 이야기다. 개구진 얼굴로 사진 너머 나를 바라보는 꼬맹이 아람이의 순한 얼굴 때문에 사진집을 여는 마음이 즐겁다. 아람이는 할머니 손에 크면서 내내 엄마만 기다리는 서글픈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도, 이 아이의 웃음은 대책 없이 환해서 그것을 들여다보는 나 역시 벙싯벙싯 따라 웃게 됐다. 아마도 ‘꽃이 피어서 행복하다고, 하늘이 파래서, 바람이 불어서, 달이 떠서, 비가 와서, 구름이 흘러가서 행복하다’고 일기장에 쓰는 아이들에게서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란 생각을 무턱대고 해 버리는 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임종진의 사진에 조병준이 글을 보탠 ‘그 곳엔 우리의 누이들이 산다’에서는 순박하기 짝이 없는 필리핀 여인에게서 나는 또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하얀 이를 맘껏 드러내 놓고 마이크를 잡고 노래 한 자락 뽑고 있는 이 건강한 필리핀 여인을 ‘누이’라 부르는 조병준의 살가운 글도 글이지만, 고운 심성의 이국 여인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찍은 임종진의 넉살이 느껴진다. 농촌 총각의 국제 결혼이 낳은 갖가지 문제들까지 조목조목 짚으면서도 결코 부담스럽지 않게 사람들에게 전하고픈 이야기 다 풀어 놓는 놀라운 사람들.


내가 가장 좋았던 것은 김문호가 작업한 ‘기대어 선 가족들’이다. 장애우와 더불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들려주고 있는데, 그게 또 엄청 감동이다. 어찌 들으면 심드렁하기까지 느껴지는 그이의 건조한 말투는, 하지만 사진 속 사람들이 이 사진가에게 보여 주는 신뢰의 눈빛을 확인하면 오히려 더 사랑스럽다. 수줍어서 오히려 포장하지 못하고, 할 말만 무뚝뚝하게 해 버리고 반쯤 돌아선 듯한 말투. 가족 사진을 몇 번이고 쓰다듬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다운증후군 아들을 낳아 기르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던 <콩깍지 사랑>의 추둘란 씨네 식구를 이 사진집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지. 엄마를 많이 울게 했던 민서는 이제 제법 의젓하게 자랐다. 이 네 식구의 오늘이 행복해 보여서 나는 그만 가슴이 뻐근해 오기까지 했다. 


아, 물론, 이 사진집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무겁게 내리누르는 비정규직의 암울한 현실을 적확한 단어들과 분명한 어조로 고발하고 있는 방현석의 글은 박여선과 김중만의 사진을 만나 놀라운 선동으로 다시 태어났다. 난민 승인에 인색한 대한민국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최항영의 작업, 가리봉동에 삶터를 꾸린 중국 동포들을 찍은 이규철의 사진은 이문재의 글과 만나 또 한없는 안타까움을 불러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두 번째 인권 사진집은 표지 느낌 그대로 파랗고 말간 희망을 안고 있다. 모질게 살아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이들의 강인함이, 그 강건한 웃음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올곧은 시선이, 낮이고 밤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아픔이 있는 곳을 찾아 헤맨 사진가들의 열정과 뚝심이 그대로 내비치는 작업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힘겨운 사진만으로 제풀에 절망스러웠던 첫 번째 사진집에는 없었던 작가들의 정갈한 글이 함께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만3천원, 그래, 비싸긴 하다. 하지만, 이런 좋은 책이 ‘왕의 남자’처럼 생각지도 못한 대박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상상을 해 본다.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가 서점에서 마구마구 팔려 나가는 그런 일을 꿈꾸는 건, 내가 너무 허황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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