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를 맛있게 내리는 사람은
커피콩을 갈고 뜨거운 물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 옆을 떠나지 않는다.
좋은 눈빛으로 주시하고 집중한다.
그런 사람이 내리는 커피는 이미 마시기도 전에
맛있다는 생각을 머릿속 가득 채워준다.
이 문장이 내게는 부끄러움이었다.
자신이 냉소적이라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요즘
아마도 내 눈빛은 이런 문장에 가까웠다.
검은 눈빛도 있다. 생기를 거부한 듯한,
검은 것만으로도 모자라 좀처럼 상대의 눈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눈빛.
쓰임새를 만나지 못해 열의를 드러내지 않는,
자신감도 그 어떤 선명함조차도 담고 있지 않은
죽은 눈빛 앞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지 않아서 얼른 자리를 마치고 싶은 눈빛.
좋은 눈빛을 가진 때가 있었지,
노인처럼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언제인지 생각해보니 그저 아마득했다.
그 눈빛을 앗아가버린 건 이 세상이었다 같은 말은 구차한 변명이었다.
눈빛을 사그라들게 만든 건 결국 나 자신,
이런 문장에 의문을 던지는 나쁜 눈빛을 한 냉소적인 자신.
음식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좋은 눈빛을 가진 사람은 잘되게 되어 있다.
잘하겠다는 그 마음이 눈빛으로 옮겨가면서 마침내 좋을 수밖에 없는 결과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좋은 눈빛이 좋은 결과를 내는 세상이라면
그저 좋겠다.
내 좋은 눈빛은 어디에 숨어버렸나.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마음에 든 첫 문단은 이런 것이었다.

꽤 오래전에 이발소 주인이 내게
"머리카락에 딱히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가위로 손님의 머리카락을 자를 뿐이지.
아침에 가게 문을 열고 밤에 문을 닫을 때까지
쉬지 않고 싹둑싹둑 가위질을 하는 거야.
손님의 머리가 말쑥해지는 걸 보면 물론 기분이야 좋아지지만,
딱히 머리카락을 만지는 게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니라는 소리네."
그는 그날로부터 닷새 뒤에 노상강도에게 배를 찔려 죽고 말았는데,
물론 그런 말을 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터라
목소리는 쾌활하고 생동적이었다.
"그런데 왜 이발소를 하는 거지?" 하고 되묻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일이니까."
그 대답이야말로 나의 생각과,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의 철학과 매우 일치한다.
나는 왜 이 일을 오래도록 하고 있는가.
요즘 이 질문을 자주 던진다.
"일이니까"
이발소 주인의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하고 싶었던 일'도 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저 일'이 되어버린다.
그저 일이니까 라고 대답하는 게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생각해보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라는 것이 솔직한 답이다.
그나저나 알라딘 서재는 왜 이렇게 글쓰기가 불편한 것인지,
몇 번 더 쓰다보면 적응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