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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 김규나 소설
김규나 지음 / 뿔(웅진) / 2010년 7월
구판절판

한 여인의 창가를 보고 앉아있다. 책을 시야에 가까이 들어 표정을 살피게된다. 조금은 차갑기도, 예리한 시선이기도, 무표정이기도, 아무런 감정이 담아있지 않은 듯한 그녀의 시선이 제목 그대로 '칼'처럼 비수로 꽂히는 느낌이다. 짧지만 강렬하기도, 그리고 무섭기도 한 단어 하나로 이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할수 있는 것인지, 알송달송한 기분으로 , 조금은 망설임이 가득한 기분이기도 한 책이다.
개인적으로 단편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나 뿐 아니라 단편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독자들이 꽤 많지 않을까? 아마 맥이 뚝뚝 끊기는 느낌이 싫어서,그 짧은 글안에 이야기를 함축해 담다보니 감정이나 스토리가 허술하거나 내용을 음미하기도 전에 싹둑 가위질로 냉정하게 흐름이 끊기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그러한 이유로 단편을 대체로 꺼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연히 내 손에 잡히게 된 작고 가벼운 단편소설 한권을 읽게 되었다. 3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얇기도 한 책이지만, 그 얇은 책 속에 11편이나 되는 단편들이 속속 숨어있다니, 읽기도 전에 작은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얇은 책에 11단편이나 되는 이야기를 집어 넣었다면 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괜시리 부정적인 생각들이 스믈스믈 내 머릿속을 지배한다.
첫번째 단편 <칼> 을 시작으로 <달, 컴포지션/뿌따뽕빠리의 귀환/ 내 남자의 꿈/ 코카스칵티를 위한 프롤로그/ 거울의 방/ 북어/ 차가운 손/ 테트리스2009/ 퍼플레인/ 바이칼에 길을 묻다>라는 제목의 11편이다. 제목부터 왠지 다른 소설과는 색다른 느낌이다. 왠지 읽기가 겁이 날 정도로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수록 내 생각이, 나의 고정관념이 내지른 편견들이 잘못되었다는걸, 김규나라는 작가를 통해 호되게 반성을 하게되었다. 20페이지 남짓의 짧은 단편들이지만, 한편 한편 실망스러운 이야기라고는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섬세한 표현하며, 활자속에 내 마음을 그대로 녹아 내린 듯이 사물과 심리, 감정, 상처들을 너무 자연스러우면서도 날카롭고 부드럽게 풀어 놓았다. 단편들 모두가 대부분 여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보니 조금은 상대방의 감정이나 생각등이 잘 전달되지 않을듯도 했지만, 전혀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남자의 생각 표현들이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다.
인생에 꼭 하나 예측할수 있는게 있다면 그건 '돌발' 이에요. 무난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삶이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탈선이죠, 당황하거나 놀랄 필요는 없어요. 어떤 것은 사라지고 또 어떤 것은 남아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해줄테니까요. 당신이 어느날 문득 내게로 뛰어든 것도, 내게 말하지 않지만 지금 당신을 짓누르고 있는 무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바다에서 갓 건져 올려 파닥이는 은빛 갈치처럼, 어둠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들의 상처 난 영혼이 느껴져 나는 소름끼쳤다. 헤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조차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 손 내밀어 잡을 수 없을 만큼 너무 내밀한 사이. 사랑이란 반드시 간격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더이상 다가갈 빈 공간이 없다는 것은, 너무 먼 단과 나처럼 대화도 섹스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먼 사이만큼이나 위험하다. 너무 멀어서, 혹은 너무 가까워서 사랑은 가끔 참을 수 없이 슬프다.
현실에서, 지금 살아 숨쉬는 이곳에서, 어디선가 누군가에게는 일어나고, 그리고 모두 이런 '사랑' 이라는 고통속, 상처속에 힘겨운 숨을 토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동안 방안의 공기와 함께 섞여 맴돌고 있었다. 불타오르듯 뜨거웠던 두 사람의 사랑도, 차가운 얼음처럼 녹아내리듯 어느 한순간 등을 돌리게 되듯, 그리고 또다른 새로운 사랑을 갈망하는 그들을 보면서, 그리고 자신의 사랑만으로 모든걸 버릴수 없은 용기없는 현실에, 고개를 떨구는 그들을 볼때,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이 느껴졌다. 이야기중 가장 안타까웠던 "차가운 손" , 남자의 죽음 후에 하나씩 깨달으며 고통스러워 하는, 여자의 마음이 절절하게 내 마음을 후벼파는듯 하다.
사람들은 사랑을 알게되고 성숙한 육체를 가지게 되면서 끊임없이 공허한 마음속 사랑을 갈구한다. 사랑의 결핍으로 계속 채워 나가려 하는 그들이, 결국 또다른 이유로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다른 사랑으로 채워가려는 욕구가 여실히 드러나는 책이였다. 작가의 인터뷰 중 ,자신의 소설도 그런 '치유의 칼'이 되기를 바란다고 얘기를 했다. "사람을 해치는 칼이 아니라 독자들 마음의 상처를 도려내고 치료하는 서사의 칼을 지니고 싶다"라고,,, 짧은 단편들이 이렇게 강렬하게 하나하나 강하게 내 심장을 파고든적도 처음인것 같다.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들이 책을 덮은 후에도 한동안 긴 여운을 남기듯, 쉽게 다른 책을 손에 들기가 잠시동안 힘들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