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뛰어넘기 - Learning Fable Series 데이비드 허친스의 학습 우화 시리즈 3
데이비스 허친스 지음, 김철인 옮김 / 바다출판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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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조직학습과 조직변화이론의 전문가다. 당연히 책의 내용도 조직학습과 조직변화를 위한 학습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난, 성인을 위한 동화 보듯이 삽화가 나오는 우화에 이끌려 3부작(네안데르탈인의 그림자, 레밍 딜레마, 늑대 뛰어넘기) 시리즈를 모두 보았다. 내용보다는 책의 겉 껍데기에 매료되어 읽었으니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나 할까. ^^

조직이란 것은 결국 개개인이 모여 만들어내는 집합체다. 해서 조직의 구성물인 개개인의 학습을 중요시하며 개개인의 학습이 이뤄지지 않을때 일어나는 개인의 정체와 그로 인해 발생되는 조직의 정체 및 와해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한다. 이 시리즈는 개인/조직의 학습을 통해 진일보하는 자리를 만든다.

그 중 '늑대 뛰어넘기'는 말 그대로 양들을 잡아먹는 늑대를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에 대한 얘기다. 양들은 늑대가 나타나는 것을 운명으로 여긴다. 양들은 그렇게 늑대에게 잡아 먹히는 것이 운명이다. 놀랍게도 늑대에게 잡아먹히면서도 양의 숫자는 줄지 않고 늘어나니 이 어찌 성공한 삶이 아니겠는가. ???

좀 상투적이긴 한데 이 성공한(?) 삶에 대해 의문을 품는 양이 나타난다. 나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늑대로부터의 위험과 불안감, 내가 아닌 다른 양의 죽음에서 오는 안도감, 소수의 희생을 발판으로 얻는 평화....... 양들은 힘을 합쳐 궁리 끝에 우리 안으로 늑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낸다.

이것이 일반 우화라면 여기서 양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지만 불행히도 이건 현실에서의 문제다. 우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늑대가 가만히 앉아서 포기할 리는 없겠고. 늑대도 끊임없이 관찰하고 연구해서 언젠가 다시 우리를 뛰어넘을 것이다.

쉬지않고 학습하며 자신을 단련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개인의 연마는 곧 조직의 힘이 된다. 늑대든 양이든 먼저 현실에 안주하는 자가 패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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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 - 2000년 제31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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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청나게 평범한 사람이다. 책을 보며 숨은 속내를 찾거나 하는 일 따위는 상상도 못하게 고단한 일이며 그저 읽기 편하고 재미난 것을 선호한다는 말이다. 일반 보통 사람들이 그러했을지도 모르지만(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얼핏 제목에서 고단한 삶의 냄새를 맡았다. 고단한 삶의 끝자락에 놓인 인간의 마지막(?) 삶의 모습을 담았을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고 기대는 무너지라고 있다는 말처럼 보기좋게 엇나갔다.

배경은 농촌이고 절정으로 치닫는 사건도 없다. 걸판지게 늘어놓는 충청도 사투리의 홍수 속에서 조금은 거부감마저(뭔소린지 정말 못 알아 먹겠는 말도 많거든. -.-) 느껴지는 - 말하자면 향토소설(내가 나눈 소설의 한 종류일거다 아마.)이었다.

느릿느릿 보이지 않는 움직임 속에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어수룩하니 순박할 것만 같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말들은 예사로운 것들이 아니다. 나랏님도 없으면 욕한다는 식의 마구잡이 떠들기가 아니라 지나치게(?) 논리정연한 이야기로 듣는이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세상이 왜 이럴꼬, 사람이 왜 이럴꼬'하는 장탄식과 함께.

작가 이문구는 이 책을 '나무' 이야기라 말한다. 각각의 제목도 나무이름이다. 제목만으로는 아무 것도 유추할 수 없는 - 나무이름. 그것도 플라타너스니, 소나무니 하는 나무 나름의 색이 있고 의미가 있는 -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아닌 개암나무, 화살나무 처럼 생소한 것들을 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내리고 흔들림없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얘기거나, 아예 종적을 감춰버린 토종 나무들에 대한 얘기가 하고 싶어서일거라 누구든 짐작할 것이다.(실제로 이것이 맞는지는 작가 자신만이 알 일이지만.) 눈에 띄지 않는 민초들의 형상화 정도로.....

소박한 이야기고 농촌색 짙은 이야기다. 인물의 감정이 전혀 꾸밈없이 소박하고 솔직하다.(사투리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읽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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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이응준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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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머꼬네 집에 놀러올래'를 찾은 줄 알았다. 코믹과 풍자가 한데 어우러진 가벼운(?) 읽을거리를 또 찾았구나, 좋아했었는데 그것은 결국 샴페인을 일찍 터뜨린 꼴이었으니. 역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내였던 것이었다. -.-

보통 단편집을 보면 그 작가의 색깔을 알 수 있다. 중장편 하나만으로는 잡아 챌 수 없는 작가만의 무엇이, 짤막한 단편 여러 개를 통해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엔 이런 작가만의 굵은 뼈대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을 보면 드라마극본 공모에 당선된 드라마를 보는듯 하다. '이교도의 풍경' - 영화 '디 아더스'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그녀에게 경배하시오' -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나게 읽었다.

위의 단편은 그 소재 면에서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마지막 반전이 압권이었다. 다 늘어진 테잎 듣듯이 거기서 거기인 사랑 얘기도 아니고 한 때 투사로 살던 사람의 사상적 공황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그렇다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활의 소소한 얘기도 아니다. 말 그대로 드라마극본 공모에서나 가능하고 단편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말 그대로 소재의 참신함이 돋보인다. 마음같아선 내용을 다 이야기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읽을 분들을 위해 참겠다. ^^

작가 이응준은 소재의 참신함을 바탕으로 개인의 문제를 고민한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개인적 방황의 냄새가 나고 방황하는 자 특유의 삐딱한 시선도 새롭다. 그러나 그 고민이 바닥까지 치고 내려가지 못해서 그저 사사로운 문제로만 끝이 나고, 때문에 제 3자, 사회적 고민으로까지 승화되지 못한 듯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씩스 센스, 디 아더스에 이은 반전문학이라 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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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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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얘기를 잠깐 먼저 하자면 - 보통 책을 읽을 때 이곳 서평란을 많이 참고로 해서 무엇을 볼 것인지 결정한다. 그런데 '먼 북소리'는 추천을 통해 읽기 시작했고 책 구하는데 집중(절판되었다. 편집증적인 집착(?)으로 출판사까지 연락했으나 구할 수 없었다.)하느라 책을 다 읽은 지금에서야 서평을 보았다. 진작에 보았더라면 좀 더 많은 노력을 들여서 읽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무라카미 하루키. 마치 교양인(?) 필독서인양 너도나도 읽기에, 나도 뒤질세라 의무감으로 읽었던 '상실의 시대'. 그 공허함과 허망함, 책 전반에 깔린 상실감으로 무지 우울하게 읽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에 홀린듯 부러 찾은 하루키의 단편들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모두 짙은 회색톤 일색이었다.

'먼 북소리'는 단지 소설과는 다른 분위기의 하루키를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글은 쓰는 사람은 반영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소설과는 다른 하루키라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에 진짠지 아닌지 확인하겠다는 오기(?)를 가지고 시작한 읽기. - '먼 북소리'에서의 하루키는 소설에서 보던 하루키가 아니다. 그의 에세이에 열광하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다고나 할까.

'먼 북소리'는 말하자면 일기같은 기행문이다. 약 3년 동안 유럽에 머물면서 이국땅에서의 생활을 쓰고 있는데, 머무는 곳이 일본이었으면 일기였겠으나, 유럽이다 보니 기행문이 된 거라고나 할까. 작가 자신이 피폐와 상실을 벗어나기 위하야 떠난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믿지 못할 만큼 가볍고 경쾌하다. 그의 유럽생활은 단조롭지만 늘 문제(?)가 따랐고 달리기로 소일하는 여유로움에 이질적인 이국문화 앞에 선 동양인의 열린 마음이 웃음 짓게 만든다. 그의 낯선 생활도 생활이지만 사람 자지러지게 하는 한 마디가 군데군데 숨어 있는 그의 문장도 재미나다.

80년대에 여행 다니며 쓴 글이다보니 지금 유럽 여행에는 도움 될 것이 하나도 없을테고, 그나마 품절된 책이니 구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또 다른 세계가 궁금하신 분은 읽어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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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죽음 1
진중권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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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서양 미술에 나타난 죽음의 미학'. 말 그대로 중세부터 현대까지 서양화를 본다. 그림 읽어주는 여자가 한동안 유명세를 떨쳤듯이 작가 진중권도 우리에게 그림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의 모티브, 죽음을 통해서 말이다.

죽음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아름다운 시체가 부패한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다. 벌레가 들끓고 너덜너덜한 시체를 꿈이나 꿀 수 있는가!! 그래서 그들은 시체의 부패를 거부했으나, 사실주의가 등장하고나선 오히려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기독교의 부활과 심판을 믿는 자들에게 죽음은 오랜 동안의 수면의 의미이기도 했다. 그저 잠들었다 심판의 날에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오랜 수면이던 죽음이 살이 썩어버리는 육신의 문제(?)로 인해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인식되어지기도 했다. 삶이 고단한 자에게는 죽음이 안식이 되기도 했고 삶이 편한 자에게는 모든 것을 앗아가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죽음 앞에서도 계급이 존재한다고 믿던 이들이 죽음 앞에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기까진 오랜 시간과 혁명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림(문화가 되기도 하겠다.)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을 뒤쫓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총망라하고 시대의식을 반영한다. 단순한 색채감과 아름다움으로 그림을 감상하기엔 숨겨진 뜻이 너무도 방대하다. 진중권은 그 속에 숨겨진 많은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 이렇게 몇 줄 적는 것도 힘에 부친다. 직접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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