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숙제
다니엘 페낙 지음, 신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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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번역하는 사람의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원작의 내용을 변질시켜서는 안 되고 외국 작가가 전달하려는 말의 뉘앙스나 맛깔스런 표현을 우리 것으로 적절하게 바꾸어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독자가 번역이 서툴러서 읽기 불편하다는 말을 한다면 문제가 아주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번역가가 너무도 많다. 그러나 '마법의 숙제'는 작가 다니엘 페낙만의 작품이 아니었다. 번역가 신미경의 공동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책 읽는 내내 외국 작품이란 생각을 갖게 한 적이 없었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비유 하나로도 웃음이 삐져 나왔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깔끔한 번역을 바탕으로 다니엘 페낙 특유의 발랄하고 경쾌한 문체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이들이 살인(?)의 충동까지 느끼는 한 선생님이 내준 숙제로부터 기인한 해프닝 - 졸지에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과 그들이 보살펴야 하는 어린(?) 부모들 - 그만큼 아이들의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봐야 하고 아이들의 시선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 무겁고 긴 문장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

'난 꼭 한 번만이라도 어린 시절을 '맛보고' 싶은 것뿐이에요.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어 단 한 번만이라도 나를 냉철한 의식의 사막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으면, 내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 보았으면 하는 거라구요. ........ 그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기쁨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토록 충만한 무지를! 쉽게 열정에 빠졌다가도 그 순간만 지나면 이내 후회하고, 지난 일은 아무렇지 않게 잊어버리고 금새 상처가 아무는 저 단순함! 진지한 동기란 애초부터 없는, 소름 끼칠 정도로 아무 생각 없는 행동들~ 현재에만 푹 빠져있는 완벽한 현실 도취! 게눈 감추듯 꿀떡 삼켜버린 양심! 단 한 순간이라도 아이처럼 바보 같아질 수 있다면 난 내가 가진 모든 걸 죄다 내놓을 수 있다구요!

그 천진한 어리석음을 누려볼 수만 있다면! 딱 한 번이라도 태초의 바보짓을 저질러 봄으로써 내가 어떤 짐을 벗어놓았고, 어떤 상태에서 빠져 나왔으며, 내 의식이 정복한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느끼면서 어른이 된 내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어른으로 커 가는 내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내가 어떻게 해서 어른이 되었는지를 하나하나 다 알 수만 있다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란 얼마나 감미로운 것일까! 그 어린 시절을 무사히 치러냈다는 확신이란 또 얼마나 유쾌한 것일까! 자신이 어디서 오는 지 제대로 알고 있을 때만이 현재의 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본문 중에서)황당한 사건과 통통 튀는 문체로 다니엘 페낙은 우리가 놓처 버린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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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파는 소녀 1
다니엘 페낙 지음, 연진희 옮김 / 예하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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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추리소설이 코믹하다. 다니엘 페낙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부 엉뚱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럽다. 주인공 말로센 가족 주변엔 늘 살인사건이 따라다니지만 누구 하나 그런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위해 움직인다. 그렇게 엉뚱한 캐릭터들이 각자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동안 얼렁뚱땅(?) 범인은 잡히고야 만다. 그런데 살인을 저지른 범인도 나쁜 악당은 아니다. 어쩌면 불가피하게 그런 일이 벌어진 건지도 모르고 그도 아니면 사랑을 얻기 위해 제 2, 3의 범행을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

다니엘 페낙의 말로센 시리즈(나 혼자 붙여 본 이름이다)는 가족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너무도 소중한 가족, 사랑스런 나의 형제들, 의리로 똘똘 뭉쳐서 제 2의 가족으로 묶인 친구까지 끈끈한 애정을 기본 주제로 삼는다. 자칫하면 그저 그런 통속적 가족소설이 되기 쉬운 주제를 각각의 독특한 캐릭터들이 든든하게 받쳐주기에 따뜻함과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몰아치는 긴장감은 다소 떨어지지만 유쾌한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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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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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뭐든지 누가 하라고 시키면 하기 싫어지는 법이다. 맨날 하던 짓도 멍석 깔아주면 안 하더라고 이 책을 산 지는 아주 오래 되었는데 사자마자 방송에서 이 책을 보라고 난리(?)를 쳐서 팽개쳐 두었었다. 이제 좀 그 분위기가 잠잠해지나 싶어서 꺼내들었는데 오랜 시간을 기다린 보람도 없이 이틀만에 모두 읽어버렸다. 이 허탈함이라니.....

오랜 시간 기다렸다가 보는 공연은 재미가 있든 없든 허탈하다. 이 짧은 걸 보려고 그렇게 가슴 졸였었나 싶은 데다가 재미까지 있어버리면 아쉬움이 더해져서 몸둘 바를 모르게 만든다. '그 많던 싱아~~~' 가 바로 그 경우다. 푸욱 빠져서 읽다보니 벌써 끝이 나는 이야기. 사람 애간장 녹이는 클라이막스도, 팽팽한 긴장감도, 특별한 이야기도 없는데, 더구나 50년 전의 이야기들이라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도 아닌데 정신없이 빠져들게 된다.

작가 박완서는 나의 어머니 세대도 아닌 할머니 세대다. 그런 분의 자전적 이야기라 하니 당연히 옛날 이야기 정도로 '있을 법 하군'의 수긍이면 족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꾸만 눈 앞에 그림이 그려진다. 논밭이 펼쳐진 박적골이며 덜커덩 거리는 옛날 기차, 사대문 안과 밖의 전혀 다른 풍경들, 물지게 퍼다 날르는 달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내가 겪어 낸 일들처럼 자세하게 떠오른다. 겪지 않은 것을 겪은 것처럼 만들어 내는 이것을 작가의 힘이라고 하는걸까?

많은 얘기를 하지도 않는다. 정말 필요한 말만 적당히 하고 만다. 간결하다 못해 똑똑 끊어진다는 느낌까지 드는 글. 할머니 박완서가 소녀 박완서의 눈으로 세상을 그려내는 방법이리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렇게 어릴 적 마음, 느낌, 생각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지. 마치 내 어릴 적 동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향수에 빠져드는 것 같다.

나도 궁금하다. 지천으로 있던 그 많은 싱아는 누가 다 먹어버린걸까? 아직도 그곳엔 잘 익은(?) 싱아가 널려 있지는 않을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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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열매들
다니엘 페낙 지음, 김운비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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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의 확인 >
이 책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 모른다. 그저 알라딘 여기 저기 뒤지다가 책 제목만 보고 '따분하게 생겼다'는 느낌만 가졌을 뿐. 그런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너무도 깨끗한(2001년 3월에 인쇄된 책인데 새것과 다름없었다. 순간, 무지 재미없는 책이라고 단정지었지만.) 표지를 보곤 덜커덕 빌려왔다. 헌데, 이건 생각지도 못한 횡재였다.

< 독서의 시작 >
프랑스 이름때문에 초반엔 좀 많이 버벅댄다. (미국이나 일본 이름은 한, 두번 보면 눈에 쏙쏙 들어오는데, 역시 유럽문화는 많이 낯 선 모양이다.) 그 버벅댐을 잘 넘기면 추리소설(?) 특유의 속도감이 생겨서 책을 놓을 수가 없어진다.

< 정열의 열매들 >
'반전, 그리고 또 반전, 황당함, 실망스런 결말, 모든 것을 뒤엎는 또 한 번의 반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줄거리도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아, 큰 오빠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 여동생의 남편이 결혼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되면서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전부다.

그러나 '정열의 열매들'은 기존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논리정연하게 과학적으로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수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분히 감정적이며 지나치게 평범한(?) 캐릭터들이 자기네 마음대로(?), 자기들 방식대로 범인을 찾아간다. 그로 인해 어이없는 웃음이 터지고 즐겁기까지 하다. 추리소설이 즐겁다니.... 그래!! 정열의 열매들은 유쾌한 추리소설이다.

이 이야기는 '말로센'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말하자면 시리즈물인 것 같다. 이전의 작품에선 다른 가족의 이야기들을 다뤘다는 소식을 접하곤 나두 부랴부랴 '말로센' 일가의 이야기들을 찾고 있는 중. 이 엉뚱하기 짝이 없는 '말로센'가의 다른 이야기는 또 얼마나 재미날까. 벌써부터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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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우는 아줌마
이숙경 지음 / 동녘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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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말이 독자서평이지 마구잡이식 독후감을 써대면서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별표다. 가끔 내가 쓴 서평을 보면서 나 자신도 무슨 얘기를 쓴 건지 모르겠는데 남들이야 오죽하겠느냐 싶은 마음에 별표라도 제대로 표시해줘야겠다 싶은 일말의 프로의식(?)에 기인한 행동이라고나 할까.
심혈을 기울이는 이 별표 표시 행위에 가끔 고민을 던져 주는 책들이 있었으니 '담배 피우는 아줌마'도 그들 중 하나다. 다섯 개 만점을 주자니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이 아닐테고, 그렇다고 네 개만 주자니 뒤가 찜찜하단 말이다.
어찌하여 그런가하면......

이 책은 불특정 다수가 모두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유달리 민감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고 그 중에서도 제 3의 성별로 구분되는 아줌마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 술 더 떠서 그냥 막무가내 식의 아줌마도 아닌 꽤나 의식있고 진보적인 아줌마의 입담이니 시비를 걸자고 하면 한도 끝도 없지 않겠는가?
나야 이 책을 보면서 온통 감동(?)과 수긍, 아줌마로서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았지만 이것도 내가 여성중심적(?) 사고에 익숙한 결과 반감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지, 만일 여자가 밥 할 시간에 외출하는 일을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져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되먹지 않은 여자가 떠드는 소리로 몰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밥하고 빨래하고 자식 키우는 일이 나의 의무이며 책임으로 인식하고 사는 아줌마와 '나'는 '나'고 '가족'은 '가족'이며 '엄마'는 그저 '내' 역할 중 하나로 인식하는 아줌마들 모두가 공감하는 별표의 수준은 어디일까? 당연히 고민이 될 수 밖에.

그 고민의 결과 '담배 피우는 아줌마'는 별표 5개가 아니라 50개라도 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줌마도 사람이라는데, 아줌마도 하나의 인격체라는데, 시집 가서도 처녀 시절처럼 살라는 얘기를 하는데 - 너무도 당연한 얘기를 하는데 이러쿵 저러쿵 말이 난다니..... 이런 현실이 미워서라도 별표 5천 개, 5만 개 줘야한다.

저자 이숙경이 태어나서 가장 많이 한 일은 밥짓기였단다. 그게 싫어서 지금은 일주일에 3번만 밥을 한단다. 일하는 엄마를 가진데다 외동으로 자라는 딸은 공동육아를 통해 부족한 형제애와 부모의 사랑을 채워준단다. 내 가족에게만 쏟는 애정을 나눠 친구를 위해서도 쓰니 외롭지 않고 든든하단다. 이숙경이 아줌마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만 들여다보면 '이런 방법도 있었구나' 싶은 생각에 화들짝 놀라기 일쑤다. 작은 생활 방법 하나를 바꿈으로 인해 내가 잊고 사는 '나'를 일깨울 수 있다. '나'='나'다. 나 = 엄마,도 아니고 나 = 아내, 도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내가 맡은 역할 중에 하나일 뿐이다. 내가 나를 그저 그런 아줌마로 내몰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면, 반성하라.

담배 피는 아저씨가 이상하지 않듯이 담배 피는 아줌마 역시 낯설지 않아야 맞다. 그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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