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멋대로 출판사 랜덤하우스
베네트 서프 지음, 정혜진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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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출판사에 붙일 이름이 생각났어. 방금 우리가 '내멋대로(at random)' 책을 몇 권 내보자고 했지? 그러니 아예 출판사 이름을 '랜덤하우스Radom House'라고 하자고."
이렇게 미국 최대 출판사의 이름이 결정되었다. 신문사 기자와 증권사무소 직원을 거쳐 출판사의 부사장이 된 서프는, 이후 도널드 클로퍼와 출판사를 차리고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책은 서프의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과 주관적인 생각에 초점이 맞춰진 그야말로 자서전이다. 때문에 출판 경영이나 편집에 관해 기대할 만한 구체적인 내용은 별로 없다.

로렌스, 유진 오닐, 제임스 조이스, 거투루드 스타인, 제임스 미치너 등등 유명작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책을 출간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일화들은 흥미롭다.  

도로시 카민즈, 제이슨 엡스타인 등 책에서 소개된 랜덤하우스의 유명한 편집자들은 대개 평생을 편집자로 일했다. 40이 되기 전에 편집자로서 생명이 끝나는 우리나라 출판계의 현실과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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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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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 남자네 집, 그 여자네 집...
누군들 아련한 옛 추억이 없을쏘냐.

어느 날 학교 가는 길에 그애를 보았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듯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나는 당시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기 때문에 그애를 알아본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그 다음날 혹시나 했는데 또 그애를 보았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이었다. 그 다음날은 시간 계산을 하고 집에서 나와 정류장에 못 미쳐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갔다.
짧은 단발의 앞머리 한쪽에 핀을 꽂고 찬바람에 코가 빨갛게 되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그애의 옆모습이 왜 그리도 청순해보였을까. 옆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사춘기 여드름투성이의 가슴은 하루 종일 들떠 있었다. 비록 옆모습만 보았지만 국민학교 동창이었던 그애의 얼굴은 사방의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뒤로도 자주 등교 길에서 그애를 볼 수 있었다. 여전히 그 버스 정류장에 못 미쳐 자전거에서 내렸고, 또 늘 그렇듯 힐끔거리며 그애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행인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행인 1, 그리고 어제 그 행인 1.
그애가 사는 구역을 알고 있었다. 그 근처를 서성거려보면 그애가 사는 집도 기억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예전에 그애를 따라갔거나, 그 근처에 사는 친구 녀석이 가르쳐주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아무튼 나는 그애가 사는 집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요일 오후에 자전거를 타고 그 근처를 돌았다. 한가로운 휴일 오후 자전거를 타고 시간을 때우려는 한심한 청춘처럼 두리번거리며 말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그애의 집이 구십오 퍼센트는 확실한 집 하나를 찍었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에는 수종을 모르겠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담은 꽤나 높았다. 지붕은 삼각형이었고 햇볕이 잘 들지 않을 것 같은 방향을 하고 있었다. 대문 앞에 다가가 문패의 이름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집의 주소를 알아냈다. 그러고 나서 페달을 굴려 한달음에 집으로 갔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무슨 사명감으로 읽어내던 문학도는 밤을 새워 세상에서 가장 진실된 편지를 썼다. 그리고 다음날 우체통 아가리에 편지를 반쯤 걸쳐놓고 영겁의 시간을 갈등했다.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뒤로도 종종 등교 길에 그애의 뒤를 소리 없이 지나쳐갔고, 하교 길이나 일요일 오후에는 그애의 집 근처에서 자전거 배회를 일삼았으며, 두 통의 편지를 더 썼다.
그러나 답장을 받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보내는 이의 주소를 쓰지 않았으므로...
교실에 난로를 떼면서부터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는 일은 너무 성가신 일이 되어버렸고, 시간을 계산하면서 부지런을 떨며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기엔 바깥의 추위가 너무 매서웠다.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었고 진실된 편지에 쓸 문구는 바닥이 났다.
괜히 무료함에 병이 나던 여드름투성이 시절 그렇게 그애는 행인2가 되어 나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갔다. 누가 말했던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실은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박완서의 소설에도 최소한 이런 유치함이 줄기일 줄 알았다. 결혼을 전후한 평범한 여인의 살림살이가 반을 차지하리라고 어느 누가 『그 남자네 집』이라는 제목을 보고 상상하겠는가? ‘그 많던 거시기는 거시기했을까?’ 시리즈와 연결된 내용이 아닐까 여겼다. 자전적 소설의 연장으로서 말이다. 박완서의 편안한 글투로 첫사랑을 썼으니 진실된 편지에 써먹을 기가 막힌 문장을 발견할 거라 기대했건만...
그렇다고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자전적 소설 쪽에 비중을 더 두었더라면 제목과 카피 때문에 가지게 된 기대감이 배신감으로 바뀌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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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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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전투는 舜臣의 바깥이 아니라 그 내면에서 더 치열했다. 주적을 비롯한 다수의 적들이 주위에서 순신을 압박하고 있었고, 그 적들은 곧 오늘날 나의 적들이기도 하다. 지원군이 그러했고, 조정이 그러했다. 결국은 백성조차 적으로 돌아설지도 모른다. 이 적들은 칼로 베어질 수 없는 대상이기에 결국 순신은 스스로 자신의 전부를 다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순신에게 타협하지 않는 것은 온 세상을 적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순신은 마지막 해전에서 모든 적들을 향해 一字陣으로 맞섰다.

역사소설에서 역동적인 이야기 전개가 아니라 내면의 갈등을 소재로 삼은 것은 이례적이다. 그것은 재미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을 모두 다 잡는 것은 괘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 독백체가 이 소설의 미덕이다. 당시의 사건 속에 몸을 담고 있던 인간의 내면을 만들어나가는 일은 까다롭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순신이 아니라 그 당시로 시간 이동을 해 간 읽는 ‘나’일 수가 있게 된다. 나는 순신이 되어 당시의 전황과 그가 처했던 상황을 보고, 듣고 느낀다. 그렇기에 역동적이지 않아서 밋밋하기만 한 이 소설을 끝까지 잡을 수 있었다.

내면을 묘사하는 부분은 상징과 비유가 가득한 수사적인 문장인 데 비해, 사실과 전투 장면을 서술하는 부분은 건조하기만 하다. 이는 작가가 말했듯 순신의 글투와 순신의 외향적인 성향을 미루어 그에 따라 의도한 장치인 듯하다. 허나 순신의 내면에서는 얼마나 복잡한 격랑이 몰아쳤겠는가. 격랑을 언어로 표현한 김훈의 글은 빼어나다.  

책머리에 쓴 글이 또한 좋다. 두 권을 읽는 동안 책머리에 쓴 글을 여러 번 읽었다. 인간에 대한 연민을 모두 버리고 一字陣을 택한 작가의 절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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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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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모래를 흩날리는 바람 속에도 감정을 실어놓았다. 잘려나간 팔의 단면에서 悲哀를 느낄 수 있다. 고단한 여인의 살에서 나는 단내에서 처절함이 풍긴다. 석곽을 덮는 돌덮개를 덮는 병사의 심장은 돌처럼 굳어 있다. 늙은 야로의 안광에서 쇠의 종말이 내보인다. 그리고 가야의 금 열두 줄을 넘나드는 우륵의 손마디에서 悲歌의 가락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화려한 수사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지 않게 극도로 절제하려는 안간힘이 묻어 있다. 이러한 극도의 절제와 감정의 전이는 상대적으로 서사를 약하게 만들었다. 서사를 약하게 만든 것인지 상대적인 부각을 위해 서사를 약화시켰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서사의 약화로 인해 흔히 역사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박진감은 크게 기대하기 어렵다. 어쩌면 당대의 미문이라 찬사를 받는 작가의 취약점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미문 속의 약한 서사라... 작가의 바로 전 장편 『칼의 노래』 역시 이러한 아쉬움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의 문장이 극도로 절제된 건조체라는 부언과 주인공이 화자라는 시점의 특징으로 인해 이는 작가의 의도라는 쪽으로 기울었다. 두번째 장편 『현의 노래』에서도 마찬가지이므로 작가의 취약점이 아닐까 슬며시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이는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르고, 나는 아직 이를 확신할 만한 자신이 없다.

하지만 역사소설이라고 해서 서사일 필요는 없다. 서사 일관도로 쓰여진,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여러 대하역사소설은 그 분량을 반으로 줄이고 인간의 감정을 노출시킬 필요가 있다. 인간이 없고 사실만 있는 역사소설은 푸석푸석하기 그지없다.

美文을 사용한 감정 이입은 이 소설의 最大 美德이다. 소리를 언어로 재현해 내려는 노력이 제자리를 못 찾고 떠도는 수많은 言語를 만들어내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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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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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잡한 도시를 떠나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 작품집의 소설 속 주인공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일 것이다. 이 작품집은 한 해 동안 여러 지면에 실렸던 소설들 가운데 잘된 것들을 골라 묶어놓은 것일 터. 하지만 하나의 주제를 두고 제각각 다른 소재로 글을 지어낸 느낌이다. 도시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內外面을 파헤친 내용으로 모아진다. 砂上에 지어진 집에 살고 있는 듯 우리 현대인의 삶은 이렇듯 위태한 것이었나 싶을 정도이다.

죽음으로서의 火葬과 아름다움으로서의 化粧과 같이 모순은 늘 내 안에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 속도감에 못 이겨 따라간 일상의 길은 결국 공허함으로 드러나 갈등을 안겨준다. 사람과의 관계도, 특히나 사랑도 달디 달지만 결국 녹아버리는 사탕과 같다. 이러한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는 나 자신의 존재감마저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결국 남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육체로부터 전달된 느낌일 수밖에 없는데, 이 또한 선명한 느낌이 아닐뿐더러 느낌 또한 외부로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는 의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게 비극이다.

나는 거대한 帳幕으로 둘러 싸여 있다. 일상이란 장막 속에 갇힌 존재는 그 구속 때문에 자신의 존재마저도 쉽사리 믿을 수 없다. 하물며 타인을 믿을 수 있을까. 타인 역시 나를 결정하는 거대한 장막의 일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대중 속에 갇힌 익명성, 고립감, 고독감. 그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순간 너구리가 될 것이며, 인간의 外皮를 놓쳐버리는 순간 지금 가진 두려움에다가 낙오라는 형벌을 안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너구리가 되고자 한다면?

이제는 희망을 읽고 싶다. 그렇지 못하면 매트릭스에 영원히 갇혀 自尊感을 상실한 채 날아가는 시간의 화살에 언제 靈魂이 실려 있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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