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89  

 집단(게임)의 정체성은 구성원에 해당하는 당사자 (플레이어)와, 이를 바깥에서 보고 있는 관ㄱ객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 물론 플레이어야말로 게임의 본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게임의 일관성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게임의 일관성은 플레이어의 플레이를 '바깥에서' 해석하여 과거의 기억과 대조해 규칙을 계속해서 정정해가는 관객ㄱ에 의해 만들어진다.

p95

 이는 역사수정주의를 추진하라는 말이 아니다. 역사란 과거의 사실을 조합해 서사로 만들었을 때 비로소 성립한다.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하지 않더라도 여러 스토리가 있을 수 있다.

 지금 이런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은 보수파보다 리버럴파다. 보수파는 원래부터 스토리를 갖고 있다. 리버럴파는 독자적인 역사관이 부족하다.

p98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리셋이 아니라 개량일 뿐이다. 그 개량도 개량주의라는 말이 상기시키는 '합리성을 내세워 위에서 강제하는'방식이 아니라 '사실...였다'라는 과거의 재발견을 동반한 점진적인 개량만이 가능하다. '실은 당신들은 옛날부터 이랬어요'라는 논리로 유도하면서 조금씩 내용을 바꾸어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역설적이지만, 전진하려면 옛것을 회복해야 한다. '사실...였다'라는 완충제자 없으면 사회 개량은 뿌리 내릴 수 없다. 이는 지금까지 특정 게임을 하던 아이들에게 전혀 새로운 게임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새 게임을 도입하려면 아이들을 계속 놀게 하면서 조금씩 규칙을 바꾸어 가는 수밖에 없다. 새 게임은 옛 게임을 정정하는 방식으로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p104

 경제적 합리성에 비추어보면 매몰비용은 무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과거를 잊고 앞으로의 가능성만을 생각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이런 점에서 경제학은 문과보다 이과에 가까운 학문이다).

p110

 한편, 만약 인공지능이 관능적인 신체를 갖게 되고 앞에서 언급한 소통의 정정까지 가능해진다면, 그때는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아 결과적으로 사회의 존재 양식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어쨌든지 간에 인간의 문제는 지금과 다름없이 계속 남아 잇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p111

 때로는 이 부가정보가 내용보다 중요한 가치를 창출하기도 한다. 한 장에 몇백억 원 하는 상품이 거래되는 아트 마켓이 바로 그렇다. 작품 자체는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어느 시기에 그 작가가 그렸다'는 사실은 복제할 수 없다. 따라서 더 높은 가치를 만들어낸다. 이 사실성을 디지털로 재현하려는 것이 NFT다.

p122

...그들의 분석은 타당할 때도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가차 없이 사회 비판을 하는 것에 비해 본인은 대학에 근무하는 등 안정된 자리에 있는 사람이 많다. 본인의 삶, 즉 실존과의 연결이 결여되어 있어 어딘지 모르게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고 지지를 받지 못한다.

 다른 한편, 시사와 실존의 조합은 보수계 문예 평론가 등에 많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정치와 사회를 논하지만 배후에 이론이 없다. 그래서 언어가 널리 퍼지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은 다르지만 트위터에 많이 있는 리버럴파 작가, 연예인, 뮤지션도 분류하자면 여기에 해당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론과 실존의 조합은 희소하긴 한데,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 문예 비평의 본류라고 할 수 있다. 난해한 문제를 계속해서 고민하는 그 '삶의 태도'가 비평이라는 스타일인 것이다. 현역 비평가 중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전형적이다. 인터넷에서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평가를 둘러싸고 기탄없이 논쟁을 벌이는 젊은 남성들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성이 많다.- 그 예비군이다.

p128

 하지만 사실 처음 시작할 때 그런 생각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일을 하게 되었고 지그지금 같은 생각을 갖게 된 것일 뿐이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과거 저작을 다시 읽어보면 지금하는 일을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도 읽힌다. 과거를 소행적으로 정정하게 되는 것이다.

p130

 일상생활에서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은 모두 필요한 정보만 교환한다. 따라서 서로가 '저 사람은 몇 살이고, 이런 일을 하고 있고, 직책은 이거고, 취미는 저거고, 이런 느낌의 사람'하고 유형을 분류하고는 사람들과 교류했다고 생각한다. 그쁜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그런 유형에 가두어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만 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런 보호막을 부수면 인간은 모두 저절로 교환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그러면 상대방이 알아서 '사실...였다'고 당신을 발견해준다. '이여 정보'가 필요한 것은 이런 이유다.

 주변에 '잉여 정봉'의 장을 만드는 것. 이를 위해 시간적 여유를 갖는 것. 이것이 정정의 지렛대가 되어준다.

p132

 사회 상황은 계속해서 바뀐다. 여론도 극히 무책임하다. 어떤 때는 정의로 여겨지던 것이 몇 년 후에는 판단이 뒤집히는 일도 부지기수다. 변화를 모두 예상해 시기가 각기 다른 발언들 사이에 모순이 없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논객은 그런 변화에 대처해 계속해서 정정해나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궤도 수정을 하지 않는 이유는 만약 궤도를 수정하면 지지자를 잃고 만다는 공포 때문일 것이다. 입장을 고수하려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정정 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교환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p135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정정하는 사람들'을 모아 그들하고만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되냐면 곡 그렇지는 않다. 그런 관계는 쉽사리 신자로 구성된 닫힌 관계로 변질되고 만다. 이는 나 자신이 회사를 만들기 전에 경험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단계로, 이러한 친밀한 관계를 친밀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키워가는 수단을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정정하는 힘은 사회를 바꾸는 힘으로 변한다.

p141

 2017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2021년 인터뷰에서 리버럴적인 지식인은 전 세계를 누비며 국제적인 척하지만, 실은 어디에 가서도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하고만 만나고, 같은 화제만 얘기하고 있으니 더 자기 주변 사람들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상당히 화제가 되어 아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p142

 상대방을 고유명사로 본다는 것은 상대를 교환 가능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자기가 예상한 것과 다른 점이 있어도 바로 실망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사실...였다'는 논리로 오히려 상대방의 이미지를 정정하며 이해를 심화해간다.

 주변으로부터 교환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힘을 작가 히사다 마사요시는 '귀염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귀염성'을 획득하면 예상과 다른 행동이나 발언을 해도 그냥 받아들인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이런 힘을 갖추지 않고는 살기 힘들어진다. 정정하는 힘은 귀염성을 획득하는 힘이기도 하다.

 물론, 서로에게 고유명사가 되는 관계가 모든 점에서 좋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다고 치자. 누구나 아이를 키울 때 나름의 이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상이 모두 실현되지는 않는다. 이상과는 동떨어진 아이로 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교환할 수는 없다. 물론 아이도 부모를 고를 수 없다. 이와 같은 가족 관계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것이 바로 교환 불가능성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이다. 따라서 교환 불가능한 관계는 인간으로부터 자유를 앗아가는 경우도 있다. "가족은 모두 다 고통을 동반하는 폐쇄적 관계다. 모든 것이 교환 가능한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도시 공간에서 사는 편이 훨씬 편하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p146 

 나는 사람과 사람은 서로를 끝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식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식도 부모를 이해할 수 없으며, 부부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친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결국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 고독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 할 수 잇는 것이라곤 '이해의 정정'뿐이다. '실은 이런 사람이었구나'하는 깨달음은 거듭해가는 것뿐이다. 이것이 내 세계관이다.

 따라서 "조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이와 같은 공간을 만들면 주변 사람들이 이해해줄 것이라거나 고독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겐론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고독하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라고 서로 이야기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p153

 지금까지 교환 가능성과 정정 가능성의 대립을 논해왓다. 이공계야말로 교환 가능성이 지배하는 세계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인문계가 교환 가능성의 논리에 지배되고 있으며 모두 전문가로서 직업을 구한다. 한편, IT엔지니어 족이 훨씬 '개성적이고' 교환 불가능한 사람이 많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놀이와 일의 분간이 안 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IT세계에서는 종종 놀이가 어느새 일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놀이가 어느새 일이 되어 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과 크립키의 언어게임 자체다. 정정하는 힘 자체다. 지금 IT산업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이들 엔지니어가 재미 삼아 시작한 놀이를 본격적인 비즈니스로 '정정'하는 작업을 계속 해왓기 때문이다. 그 역동성을 배워야 한다.

p154

 정정하는 힘을 활용하려면 자신을 교환 불가능한 존재로 여기고, 고정되고 만 자기 이미지를 '사실...였다'는 논리로 정정해주는 유연한 사람을 주변에 모아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작은 조직이나 모임을 만들어 '친밀한 공공권'을 만들면 이를 실현할 수 있다.

p167

 평화란 국가 간의 정치적 타협으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은 관련된 개개인이 납득하지 않으면 타협에 이르기 힘들게 되었다.

p171

 ...영원히 옳은 객관적 역사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사(스토리)만이 있을 뿐이다. 누구도 서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새로운 발견 앞에서 '사실...였다'며 정정하는 행위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정정 행위도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이 또한 객관적일 수는 없다. 정정은 영원히 계속된다.

 나는 철학을 하고  있으므로 사상사 연구자와 근접한 곳에 있다. 플라톤이나 루소에 관해 글을 쓸 때는 당시 상황도 조사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무슨 생각을 햇는지는 솔직히 잘 모른다. 나는 고대 그리스나 18세기 프랑스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당시의 언어조차 정확히 읽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다지기 시작하면 철학자는 모두 특정 시대의 특정 언어로 쓰인 저작만 참조할 수 있을 것이며, 결국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는 소멸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잘 모른다는 전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물론, 내가 내놓는 해석이 전문가의 저작과 모순이 없게끔 조심한다. 그럼에도 결국은 '자유롭게 읽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때 최종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과거의 저작과 현재 상황을 어떻게 연결지을 것인가이다. 이 관점이 없다면 철학자의 독해는 자의적이고 멋대로인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이는 전혀 객관성을 보증해주지 않는다. 이를 각오하고 독해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정정을 통해서만 과거를 파악할 수 있다.

p178

 민주주의의 본질은 인민이 원하는 대로 국가를 운영하는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는 매우 무서운 사상이다. 포퓰리즘과 직결되며 인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것이 특정 정당이나 독재자일 경우 전체주의나 파시즘을 초래할 수도 있다. 실제로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독재를 긍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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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는 위대하다. 하지만 동시에 무섭기도 하다. 왜냐하면 민의는 틀릴 때도 있고 폭주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양의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원제와 삼권분립 등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폭주를 막기 위한 장치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리셋은 위험하며 보수적으로 보일지라도 과거를 정정해가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거다'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바른 사회를 이룰 수 잇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 유치한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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