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시간이다. 그 시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건설하기도 하고 파괴시키기도 한다. 그 시간 앞에서는 살아간다는 것과 죽어 간다는 것이 하나이고, 배부르게 먹고 마시고 이성을 사랑하는 몸뚱이와 늘 비워 보려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이 하나이고, 나와 우주가 하나이고, 선과 악이 하나이고, 신과 악마가 하나이고, 부처와 예수가 하나이고, 부처와 중생이 하나이고, 여호와 하나님과 배추벌레가 하나이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하나이고, 흙과 돌과 금덩이가 하나이고, 기쁨과 언짢음이 하나이고, 물과 산이 하나이고, 문득 깨달음과 점진적으로 닦아 가는 것이 하나이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더욱 오롯한 '하나'로 되어 가기인 것이다.

p7

 미욱한 자에게는 꿈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말하는 것인데, 미욱한 자는 그것이 진리인 줄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속의 이야기는 사람을 죽게 하는 맹독일 수도 있다. 독사의 독은 잘 쓰면 약이 되지만 잘못 쓰면 사람을 죽게 만든다.

p39

 억겁 속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그 가운데서도 남자로 태어나기 어렵고, 불자로 태어나기는 더욱 어려운 법이다. 하늘과 땅을 덮고도 남는 복이 있어야만 스님이 될 수 있단다.

p137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다 그 자체로서 존재의 증후, 즉 의미를 지니는 것 아닙니까? 우리들의 그 새빨간 행사는 순리인 것이고, 그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수도하는 사람의 본분이고, 그 본분이라는 것이 진여 아닐까요? 진성 스님, 저의 당돌한 편지를 흉허물 하지 마시고, 스님께서 그 행사에 임하는 마음 자세, 그것에 대하여 매기는 의미를 가르쳐 주십시오.

p144

 스님, 우리한테는 환영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게 허위라고 오십보백보일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환영이나 허위라는 것을 진실이나 진여라는 것들하고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알고, 구별할 줄도 압니다. 그러나 우리 생활 속에서는 그게 분리되지도 않고 구별되지도 않습니다. 알맹이는 놓치고 껍데기만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스님한테 묻고 싶은 것이 이겁니다. 스님께서는 대관절 왜 머리를 깎고 보통 사람들이 입지 않는 먹물 옷을 입으셨습니까?

p147

 스님, 사람은 특별한 사람보다는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것이 가장 위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떠한 제복도, 그것을 입은 사람들을 특별하게 보이도록 만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특별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그 제복 속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는 겁니다. 구속한다는 것은 노예로 부린다는 겁니다. 왜 스님게서는 노예의 길을 택하셨습니까?

p148

 우리는 그 성인들의 말씀을 잘 공부하고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한 성인의 말씀 속에서만 평생을 산다고 하는 것은 불행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그늘을 좋아하는 생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 특정한 그늘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가령 제가 독실한 예수교인으로서 살아갈 때, 제 몫의 삶은 없고 예수의 삶만 남게 됩니다. 스님처럼 머리를 깎고 잿빛 승복을 입고 부처님의 말씀 속에서 살자고 작정해 버리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왜 반드시 출가를 해야만 합니까? 평범한 우바이 우바새로서 살아가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아니, 우바이도 우바새도 아닌, 그 어떤 종교 속에도 예속되지 않은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가장 사람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참답게 살아가는 겁니다. 사랑도 해보고, 미워도 해보고, 질투도 해보고, 입도 맞추어 보고, 이성의 맨살을 끌어안아도 보고, 아기도 낳아 보고, 그 아기가 퍼질러 댄 똥 오줌도 주물러 보고, 그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이런저런 속된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기 세계를 차근차근히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 석가나 예수나 공자나 맹자나 노자나 장자나 소크라테스나 니체나 칸트 같은 사람들한테 얽매이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를 건설해 가야 하는 겁니다.

p151

...현대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왜' 보다 '어떻게'입니다. 물론 '왜'를 알아야 더욱 확실한 '어떻게'의 답이 나오긴 할 테지요. 어쨌든 저는 그러한 따지기와 가리기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이 땅의 모든 남자들이 중생들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껏 자기 혼자만의 수행을 위해서 젊음을 허비하는 것은 낭비입니다. 진성 스님의 그러한 자기 낭비를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p152

 ...여기저기서 조금씩 주워 읽어 안 좁쌀 지식과 지기의 잘 돌아가는 머리를 과신하고 있었다.

 진성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세상의 학자들은 저마다 서로 다른 편견을 가지고, 자기야말로 정말로 진리에 통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 가지로 주장한다. '이렇게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다. 이것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직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그들은 이렇듯 다른 편견을 가지고 논쟁하면서 '저 사람은 어리석게 진리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자기야맑로 진리에 이른 사람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지만, 과연 그들 중에 누구의 말이 진실한 것일까.

p159

 '연못에 핀 연꽃을 물속에 들어가 꺾듯이, 애욕을 말끔히 끊어 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 저 세상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그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p174

...마음은 요술쟁이다. 몸은 환상의 성이고, 세계는 환상의 옷이며, 이름과 형상은 환상의 밤이다. 깨어나자. 꿈에 병이 나서 의사를 찾던 사람은 잠이 깨면 곧 그 병에서 벗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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