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6

 모든 존재가 존엄한 것은 자기 안에 버릴 것도 없고 세울 것도 없는 '참 나'를 가졌기 때문이다. 비슷하면서도 더욱 확정적으로 동학의 최시형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한 기운이 천지 우주의 본래 기운과 한 줄기로 서로 통하고, 나의 한 마음이 조화 귀신의 부림과 한 집으로 드러나니, 그러므로 하늘이 곧 나이고 내가 곧 하늘이라.

p9

 협동조합의 미래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단지 협동조합이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한 경영적 전략 문제,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어디서 찾을지에 대한 사회적 가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특히 정성을 다해 협동조합 하는 분들에게 있어 그것은, 협동조합을 매개로 할 뿐 결국에는 자기 사유의 성장이고, 자기 존재의 새로운 의미 부여다.

p27

 협동조합이 '성명'을 통해 처음 성찰을 시도한 지 이미 25년이 지났다. 그동안 세계는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큰 변화를 겪었다. IT기술의 눈부신 발전, 젠더 의식의 대변화, 고용의 불안정과 양극화의 심화, 정치 불신과 포퓰리즘의 등장,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 인구의 고령화와 저출산,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경제의 혼란 등등, 세계는 한층 혼미한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런 속에서 협동조합은 오히려 일반기업의 논리나 방식을 좇아 이름만 협동조합이지 주식회사나 진배없게 되어가고 있다. 협동조합에 꿈을 싣기는커녕 오히려 협동조합의 미래를 우려해야 하는 실정이다.

p32

 협동조합에 관해서는 많은 학자나 정부 관계자들이 자기 나름의 견해를 피력한다. 하지만 협동조합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조직이다. 협동조합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학자나 정부 관계자들이 협동조합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보다 협동조합 하는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그것이 비록 하는 일에 조금씩 다르고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규정이고 신념이고 지침이라는 점에서 '성명'이 갖는 의미는 크다.

 같은 '성명'안에 담겨 있어도 <정의><가치><원칙>은 그 방향이 다르다. <정의> 협동조합 바깥을 향한다면, <가치>와 <원칙>은 철저히 내부를 향한다. 맥퍼슨에 따르면 <정의>는 정부가 협동조합 관련 법률을 제정할 때 참고로 하고, 협동조합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과서 등에서 협동조합을 설명할 때 활용해주기를 바라는 목적에서 명문화한 것이다. 이에 비해 <가치>는 내부적으로 협동조합과 그 조합원이 지녀야 할 자세와 역할을 정리한 것이고, <원칙>은 이런 가치들을 실제 협동조합 운영에 적용하는 데 있어 지침이 되게 하려고 정한 것이다.

......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심화하는 것은 결국 가치의 재발견과 심화에서 시작된다.<가치>를 뺀 <원칙>은 가야 할 곳을 잃고 운전대를 잡는 것과 같다.<정의><가치><원칙>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다.

p37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체를 통해 그들 공통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필요와 염원을 충족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결합한 사람들의 자율적인 결사체이다.

p40

..."1. 협동조합은 자율적인 결사체"인데 그 결사체는 "2.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합한" 것이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합한 이유는 "3. 그들 공통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필요와 염원을 충족하기 위해"서이며, 이런 필요와 염원의 충족은 "4.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체를 통해"달성된다는 이야기다. 우리말에서는 수식하는 단락이 수식받는 말 앞에 위치하기 때문에 4. 수단-3. 목적- 2. 주체- 1. 본질의 순으로 되어 있지만, 영어에서는 그 순서가 뒤바뀌기 때문에 1. 본질- 2. 주체- 3. 목적- 4. 수단의 순으로 문장이 구성돼 있다.

p46

'wiktionary'(영문판)에 따르면 'autonomous'는 "지적이고 감각적이며 자기 인식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독립적으로 통치하는 것. 아이가 부모나 보호자의 지배를 받지 않고 행동하는 것처럼, 사람이 스스로 혹은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p56

...<정의>에 따르면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자율적인 결사체"이고, 사업체는 결사한 조합원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든 수단이다. 아무리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더라도 해설은 똑바로 해야 하는데, 누구라도 알 만한 내용을 왜 곡해해서 교육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할 뿐이다.

p65

...자유와 평등을 사회 전체에 구현해가는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이 실재하는 작은 사회로서 사람들이 만든 것이 바로 협동조합이다. 덕분에 바깥세상에서는 비록 자유롭지 못하고 불평등한 대접을 받더라도, 그 안에서만큼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했다. 때로는 어렵고 때로는 힘들어도 협동조합을 만들고 협동조합에 참여하는 것이 근대의 사람들에게는 가슴 뛰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과거와 비교하면 지금은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자유가 보장돼 있다. 평등한 사회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평등화되어가는 사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에서 협동조합은 과연 어떻게 될까? 근대와 함게 태동하고, 근대의 두 이념을 실체화하면서 성장해온 협동조합은 앞으로 그 성장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까?

p69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네크워크론이라는 게 있다. 이에 따르면, 네트워크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하고, 그 관계가 쌓여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형성된 네트워크가 이번에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자기운동을 전개한다. 지금까지 사람과 사람이 관계해서 네크워크를 형성해왔는데, 네트어크가 형성된 다음부터는 자신의 높은 기술력과 서비스를 가지고 오히려 사람들을 관리해간다. 기술이 주는 편리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그 서비스를 이용하지만, 자신을 온전히 네트워크 안에 두지는 않는다. 네트워크 측에서는 이용 촉진을 목적으로 온갖 수단을 동원해 오지만, 진짜 자기와 진짜로 자기를 드러내는 타자와의 관계는 다른 공간에서 찾는다. 정보의 이용자는 많아져도 정보의 발신자는 줄어들고, 마침내 네트워크는 서서히 죽음의 공간이 되어간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네트워크론에서는 '구조적 공백'과 '부드러운 연계'를 강조한다. '구조적 공백'이란 사람을 다시 불러들이려면 먼저 자신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고, '부드러운 연계'란 사람들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면 먼저 자신이 사람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촘촘하게 짜인 기존의 네트워크를 더 많이 이용하도록 독려하는 차원을 넘어 허술하게 빙ㅁ으로써 사람들이 그 안으로 다시 들어오게 한다. 이렇게 들어온 사람을 향해 부드럽게 열린 관계를 맺어감으로써 점차 네트워크 안에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다시 형성되도록 한다. 한마디로 비워야 채워지고, 부드러워야 다시 엮인다는 것이 네트워크론의 주장이다.

 협동조합에서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협동조합이 이미 체계화된 사업에 조합원 참여와 이용을 독려한다고 한번 떠나간 조합원이 다시 돌아올 리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비우고 놀 공간을 마련해야 비로소 그 안으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다. 이렇게 돌아온 사람들을 향해 협동조합이 조심스럽지만 꾸준하게 관계할 때, 그 안에는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결사가 태동한다. 이렇게 돌아온 사람들의 필요와 염원에 협동조합이 적극적으로 대응할 때, 그 안에는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업이 태동한다. 그리고 이렇게 태동한 새로운 결사와 사업이 기존의 그것들과 중층적으로 결합할 때, 그 안에는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구조 즉 공동체가 태동한다. 지금까지의 협동조합이 결사체와 사업체라는 이중 구조였다면, 복수의 결사와 사업이 공동체를 통해 융합하는 삼중 구조를 갖게 된다.

p78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경제는 그 역사, 방향, 대상이 전혀 다르다. 사회적 기업이 미국을 중심으로 추진된 기업의 새로운 형태라면, 사회적 경제는 유럽,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협동조합의 사회 전망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사회적 기업이 인간을 위한 자본의 결합이라는 데 그 본질이 있다면, 사회적 경제는 배제된 인간을 향한 인간의 포용적 연대에 그 본질이 있다. 사회적 경제는 배제된 인간을 향한 인간의 포용적 연대에 그 본질이 있다. 사회적 기업이 미시적 기업을 대상으로 한다면, 사회적 경제는 시장경제나 국가경제처럼 거시 경제를 대상으로 한다. 이런 차이를 무시하고 둘을 적당히 혼합해 '사회적 경제 기업'이라고 이름 부티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런 논리로라면 일반기업은 '시장경제 기업'이라 불러야 옳고, 정부나 공기업은 '국가경제 기업'이라 불러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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