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2

...서로서로 머리를 밟으며 사는 사람들이 시나브로 많아지자 어느새 시각장애인이 듣는 소리가 가로에서 세로로 바뀌는 세상이 찾아왔다.

p44

...흔히 시각이나 후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이 채운다고는 하지만, 글쎄. 어느 정도 맞는 얘기지만 다 채울 순 없지. 오히려 텅 빈 감각을 메우는 건 바로 기억이야.

p45

 "빈 감각을 채우는 존재는 다른 감각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사실은 장애인도 일반인도 잘 알지 못해. 하지만 네 엄마는 알아. 그래서 안타깝고 슬퍼. 그건 알아서는 안 되거든. 화가도 나를 보고 분명 그렇게 느꼈을 거야."

p65

 넌 그전까지 항상 의심했잖아. 네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의심하고 부질없다고 여겼지. 하지만 술은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아주아주 강력한 존재거든, 밑바닥에 꼭꼭 숨겨 둔 본모습을 꺼내거나 결코 변하지 않을 사람도 순식간에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너도 예외는 아니었어. 아주 진상이 따로 없었지.

p78

...우선 색종이가 붙은 책은 웬만하면 이른 시일 내에 반납해야 한다. 새로운 책을 갈망하는 회원 모두가 돌려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입고 신청한 사람이 제일 마지막에 해당 책을 대여한다. 내가 느끼는 재미보단 그 즐거움을 나누는 행위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따금 추천한 이유를 물으면 좋아하는 책이지만 부가페에 없어서라고 답하거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읽어보길 바란다고 말한다. 추천인은 다른 색종이가 붙은 책을 골면서 자기 책이 책꽂이에 얼마나 머무는지 내심 기대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길어진다 싶으면 자기 책을 빌려 가고 다시 올 땐 색종이를 떼고 반납한다. 이런 규칙들 덕분에 색종이가 모두 떨어지기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는다.

p116

 나는 후각을 잃었지만, 실은 어떤 사람한테서는 냄새를 맡기도 한다. 처음부터 이 냄새를 하얀 냄새라고 불러 왔다. 이 역겨운 악취는 죽음과 닮았다. 아니, 그 자체다. 이 속에서 살아온 내게 의미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책을 덮은 그 순간 삶의 의미를 찾을 일말의 가능성을 느끼기도 햇지만, 이기적이게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기엔 이 세상에 죽음이 너무 많고 , 세상 자체가 내겐 수용소이자 가스실이기에.

p127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저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가 인용한 어느 철학자의 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으며 행복에 이르는 데 '조건'이 필요할까? 저자는 분명 힘주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필요 없다!'돌이켜 보면 나도 저자처럼 생각하며 살아왔다. 인간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할 자유, 그리고 원하는 곳으로 나아갈 자유가 있다. 자유가 있기에 의지가 있고, 의지가 있기에 삶이 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저자처럼 삶의 의미를 찾으려 노력한다면 누구라도 행복이라는 결말에 이른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나만의 행복. 오로지 나 자신만이 만끽할 행복 말이다. 물론 저자처럼 극한의 환경에서도 연약한 타인을 배려하고 봉사하며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 비참한 상황이 오로지 나에게만 해당한다면? 그럼에도 다른 사람과의 행복, 즉 오가는 사랑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어떨까? 시련을 극복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으며, 삶과 대척점에서 세상 모든 의미를 무의미로 바꿀 만큼 절대적인 운명이 내 남은 시간의 전부라면? 이는 극단적인 예가 아니며 생각보다 흔해 빠진 진부한 이야기이다. 나는 실제로 그런 기대를 한 적이 있다. 불현듯 나타난, 도저히 홀로 극복하지 못할 운명이 무서워 줄곧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했던 사람을 찾아간 지난날이 있다. 나는 따뜻한 품과 위로를 기대했다. 하지만 철저히 거부당했고, 뒤틀린 사랑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ㄷ. 그리고 또다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며칠이 지낫을까. 나는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아주 작게나마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오가는 행복을 포기하는 것, 즉 누구도 내 운명을 대신 짊어질 수도 나를 그곳에서 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온전히 나만의 행복을 삶의 의미로 정한 덕분에 가능햇다. 하지만 하루가 채 가지 않았다. 불행히도 의미를 만났고, 우연히 이 책이 손에 들려 있었다. 책장이 한 장, 한 장 넘어감에 따라 두근거리는 또 다른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지난날 내 존재를 거부한 그 사람이 내 삶을 받아줬다면 어땠을까? 이에 감사하고 기꺼이 내 비참한 운명을 같이 나눴을까? 그런데 나는 정말로 그 선택을 원했떤가? 잘 모르겠다. 이런 궁금증이 여행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토록 설렘과 호기심을 느껴도 괜찮은 걸까? 아니, 설렘은 그 자그마한 의미에 결코 들어오지 말아야 할 존재임이 분명하다. 설렘은 나만의 행복이 아닌 오가는 행복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잠시나마 그쪽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설렘이, 삶의 의미가 그토록 위대한 존재이기를 바라며, 나는 지금 그걸 확인하러 간다.

p136

 전에 카페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관해 얘기한 거 기억 나? 소설 속 교수를 비웃으면서 삶과 죽음에 관해서 네가 말했잖아. 삶이 열차라면, 죽음은 종착지라고. 모두가 같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거라고.

 그 끝은 모두 허무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라고 햇었지.

 그래.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선 사람마다 끝에 다다르는 시기가 다르다는 말에 너도 동의했어. 다시 말해 우리 삶에서 도중에 내리는 사람도 있다는 뜻이야. 네 어머니나, 내 아버지나. 그리고 그 여자도. 내린 곳이 그들의 종착지고. 그들에겐 죽음이야.

 같이 내리면 안 될까? 아주 잠깐이라도 같이 내려서 다시 타면 되잖아.

 말은 쉽지!

p207

...이 세상에서 가장 고집이 센 사람이 누군지. 바로 외로운 사람이야. 외로운 사람이 부리는 고집은 쉽게 꺾지 못해. 특히 상대방이 외롭지 않은 사람이라면.

p358

 네 고민과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아. '미리 알았더라면.''조금 더 신경 썼더라면.''그때 건강검진을 받으시도록 설득했다면.'하지만 그건 다 지난 일이고, 중요한 건 무엇이든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는 거야.

p391

 꽃이 피려면 얼마나 힘든데, 혼자 시들고 싶어 하는 꼿은 없을 거예요. 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한테 상처 주려는 꽃은 이 세상에 없어요. 그냥 알려 주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만질 때는 조금 조심해 달라고, 네 옆에서 금방 죽고 싶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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