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391

 불안한 밤이었다. 처음에는 모호했고, 또 부정확했지만, 꿈들은 분명히 잠자는 사람들 사이를 옮겨다녔다. 여기에 머물렀다가 다시 저기에 머물렀다.여기에 머물렀다가 다시 저기에 머물렀다. 꿈들은 그들에게 새로운 기억, 새로운 비밀, 새로운 욕망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잠자는 사람들은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이 꿈은 내 것이 아니야. 그러나 꿈은 다답했다. 너는 네 꿈이 뭔지 아직 몰라....

꿈이 똑같아지기 위해서느느 상호 관계를 이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

p395

...말이란 것이 그렇다. 말이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두 마디나 세 마디나 네 마디 말, 그 자체로는 단순한 말,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흥분한다. 그 말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살갗을 뚫고, 눈을 뚫고 겉으로 튀어나와 우리 감정의 평정을 흩트려놓는 것을 보며 흥분하다. 때로는 신경마저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돌파당하고 만다. 사실 신경은 많은 것을 견딘다. 모든 것을 견딘다. 갑옷을 입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의사의 아내의 신경은 강철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이런 단순한 문법적 범주 때문에, 단순한 부호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두 여자, 부정 대명사로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들 (서양어의 문법적 범주에서는 부정대명사가 됨: 옮긴이). 그들 역시 울고 있다. 그들은 온전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여자를 끌어안는다. 쏟아지는 비 아래 미의 세 여신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사냥에 데리고 나갈 개가 없다면 고양이라도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비누는 눈 깜짝할 새에 없어졌다. 이 집에는 없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아니면 이 집 주인들은 그저 자기들이 가진 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을 뿐일까. 마침내 그들은 옷을 입었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었다....

p407

...우리는 어떤 것들은 잊는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기억한다. 

p414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상황에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p418

...마지막 충고를 하나 드려도 좋다면, 옛 속담대로 하라는 겁니다. 옛날 사람들은 인내가 눈에 좋다고 했는데, 그 말이 옳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우리를 괴롭히지 말아요. 용서해 줘, 두 사람 다, 우리는 기적이 이루어지던 곳에 들어와 있어. 그런데 지금 내 마술의 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렷어, 다 빼앗겨버렷어.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보존해 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어쩌면 진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어쩌면 삶은 진짜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건지도 몰라요. 삶은 우리에게 지능을 준 뒤에 자신을 우리 손에 맡겨버렷어요. 그런데 지금 이것이 우리가 그 삶으로 이루어놓은 것이에요. .....어떤 면에서는 나도 눈이 멀었지. 당신들의 먼 눈이 내 눈도 멀게 한 거야. 볼 수 잇는 사람들이 더 많다면 나도 더 잘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안됐지만 당신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소환당해 무슨 일인지도 모를 일을 진술하기 위해 법정을 찾아가는 증인 같군. 의사가 말했다. 시간은 종말에 이르고 있어요. 부패는 널리 퍼지고, 병은 열린 문을 찾고, 물은 바닥이 나고, 음식은 독이 되고 있어요....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인느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나는 보고 싶어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마음만 가지고 눈을 뜰 수는 없습니다.....

p426

...제대로 되어 있는 게 뭐지, 그녀는 생각하다가 스스로 답햇다. 죽은 자들이 그들이 있어야할 자리, 즉 죽은 자들 사이에 있는 것, 살아 있는 자들이 살아있는 자들 사이에 있는 것, 닭과 토끼가 먹이를 먹고 또 먹이가 되는 것. ....

p429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긴 실 같은 소리밖에 못 들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책이란, 그것을 다 합쳤을 때는, 사람들이 우주를 두고 하는 말처럼. 무한한 것이다. ...나도 불평을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이 우리보다 앞서 존재했던 인류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소리를 듣는 것이 말이에요. 여기 우리에게 아직도 볼 수 있는 두 눈, 마지막 두 눈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뻐하도록 해요. 만일 그 눈마저 언젠가 소멸해 버린다면,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럼 우리와 인류를 연결시켜 주는 끈이 끊어지고 말겠죠. 그렇게 되면 마치 허공에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 과 같을 거예요. 영원히, 모두 눈이 먼 채로.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을 이었다. 나는 가능하다면 계속 희망을 갖고 싶어요. 내 부모님을 찾겠다는 희망, 아이의 엄마가 나타날 거라는 희망.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희망은 얘기 안 했구려. 그게 뭔데요. 시력을 회복할 것이라는 희망. 그런 희망에 집착한다는 건 미친 짓이에요. 글쎄, 나는 그런 희망들이 없었다면 오래 전에 포기햇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희망요.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p449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미리 알 수 없는 거예요, 기다려봐야 해요, 시간을 줘봐야 해요.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시간이에요. 시간은 도박판에서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예요. 그런데 혼자 손에 모든 카드를 쥐고 있어요. 우리는 삶에서 이길 수 있는 카드들이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밖에 없죠. 그게 우리 우리 인생이에요. 성당에서 도박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죄요. .....

p461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겟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아요.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p467

...이 알레고리 통한 사라마구의 새로운 상상력은 현대 사회에 만연한 무책임한 윤리 의식과 이에 대한 무지의 고발이다. 그렇기 때문에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눈이 멀었다'라는 사실 그자체이다.

 '눈이 멀었다'라는 사실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눈이 멀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많은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실제 소유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존 양식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었을 때에야 가지고 있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질적 소유에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그 소유를 위해 우리의 인간성조차 쉽게 말살하는 장님이기에 눈을 비벼 눈곱을 뗀 후 세상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새삼스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p469

 인간의 야만적인 폭력에 교과서라고 지칭할 수 있는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러나 인간의,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만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동시에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삶의 가치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총으로 무장한 집단 (군인이나 나중에 들어온 눈먼 자들)들이 저지르는 폭력은 사회 관계와 사회의 계층화, 파괴되어 가는 도덕과 체념에 대한 갈등, 현대인의 정신 이상을 드러내는 장치로 사용되며 인간의 모순과 비인간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해 처음 눈이 멀어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는 집단이 함께 고통을 나누고, 서로가 의지하며 도와가는 인간 관계의 회복은 살아 있는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연대 의식은 인간성이 말살된 사회에서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진정한 휴머니즘이다. 바로 인간이 존재하는 본질적인 이유인 것이다. 특히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따뜻한 인간 사회로 만드는 이러한 연대 의식의 축으로, 인간의 선한 면을 대표하고 있다.

p470

...목욕은 마치 에덴 동산에 들어가기 위해 세상의 모든 찌든 때를 씻는 것과 같으며 인간이 잃어버린 서로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있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이들은 비록 눈은 둘이지만 손이 여섯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손들이 합쳐지면 세상을 지탱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 시력을 회복하는 것은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을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설 의 또다른 인물인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는 시력을 회복한 후 함게 지냈던 사람이 보잘것없는 주름투성이의 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와 계속 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가진 것, 자신의 젊음을 나누는 삶의 본질, 다시 말해 타인과 자신을 위해 사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있어 '함께 지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의사의 아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나누었던 게 이러한 나눔의 정신, 오늘의 혼탁한 세상에서도 서로 함께하는 연대의식이 아닐까.

p471

...사라마구는 '보고 있다'라는 허상에서 벗어나 서로 베풀고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진정한 '눈뜬 자들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일상에 대해 좀더 주의깊은 시선을 돌리도록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라는 사라마구의 질타 앞에 우리는 한없이 부끄러움과 왜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여지는 일상에 익숙한 우리의 눈을 다시 뜨고 세상을 바라보자. "도시가 그곳에 그대로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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