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

...소설은 삶의 잉여에 적합한 양식이다.

p29

...그렇지만 어떻게든 떠나봐도 세상은 늘 그 자리다. 지금 이곳도 그렇다. 눈이 너무 지겹도록 퍼붓고 있다. 벌써 볓 시간째 똑같은 화면을 보고 있는 셈이다. 화면조정시간 같다....

p97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절 두려워하잖아요. 제 실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말이에요. 그래서 비디오를 들고 나온 거죠? 아니가요? 정작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당신일 수도 있어요."

p119

...나는 아무예고 없이 다가가 물을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 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

 이제 이 소설을 부치고 나면 나도 이 아시리아를 떠날 것이다. 어딘가에서 또 미미나 유디트 같은 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p131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는 어느 시기에도 쉽게 용납되지 않았고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개인의 자유가 인간됨의 기본 조건으로 요청되던 근대사회에서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 칸트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스스로를 단순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사용하는 것', 곧 자살하는 것은 남용이며 비도덕적이며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또한 헤겔은 인간 의지의 절대적 자유에 대한 철저한 신봉자답게 "이 욕망의 본질적 요소에는 모든 것에서 나를 해방하고 모든 목적을 지향하고 모든 것에서 나를 추상화시키는 힘이 들어 있다. 인간만이 모든 것을,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살에 대해서는 "자살은 우선 용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가치 있는 종류로서의 용기는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것은 한 개인이란 오로지 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속의 한 개인으로 존립하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당연히 "국가가 생명을 요구할 때 먼저 개인이 존재해"있어야 하며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생명에 대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분명히 모순적이다. 한마디로 이제까지의 자살이란 권리가 의무로서만 승인되었고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한다면 <파괴>의 죽음 혹은 자살관은 지나치게 도발적이며 파격적이어서 설득력을 획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p136

...격정이 격정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건조하고 냉정할 것. 이것은 예술가의 지상 덕목이다....여느 사람은 볼 수없는, 오직 건조하고 냉정한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잇다는 것이다. 인간 내부에 대립하는 그 격한 감정들과 그것들이 빚어내는 삶의 비의들, 혹은 죽음을 앞둔 인간만이 볼 수 있는 존재의 의미들. 그러니 역사란 죽음을 앞둔 인간만 볼 수 잇는 이 진리의 빛들의 연쇄로 기술되어야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왜 그리 중요하냐고? 중요하다. 건조하고 냉정해지면 죽음에서 죽은 자의 표정에서 중요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은 자가 중요한 것은 그 존재가 다름아닌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건조하고 냉정하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