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10

...한 명의 영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가 비인간적으로 대했던 아랫사람들, 함부로 대했던 여성들의 이름이 지워져야 하는데, 이제 이 세상에는 그렇게 '지워버려도 되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야 인류는 한 명의 영웅을 세우기 위해 많은 이들의 존재를 지워버리기보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는 이 시대에 더 이상 거대 서사가 범람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비범한 영웅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이야기보다 소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매일 무엇을 하며 하루를 살아내는지를 핍진하게 그려내는 이야기가 공감을 받고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는 것은, '가치' 가 소수의 힘 있는 이들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한 모든 이들에게 로 고르게 배분되었기 때문이다.

p135

 ... 우리는 누군가의 '말'보다는 누군가의 '삶'을 통해 배운다고. 우리는 교과서와 책과 각종 강연을 통해 들었던 지혜의 샘물 같은 말보다, 누군가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 교과서와 책과 강연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드문 순간도 역시 다른 이들의 인생을 지켜보며 쌓아온 직감과 체감이 충분히 퇴적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수많은 어른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 이름난 명사의 강연에 가서 아무런 감화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어린아이가 살아온 날이 아직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인생'을 총체적으로 만져보고 체감했던 경험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타인의 삶을 엿보고 내 삶의 밑거름으로 삼는 데 소설은 가장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이다. 작은 소설책 한 권을 손에 쥔다면, 우리는 어디서든 타인의 삶에 빠져들 수 있다. 비소설이 우리에게 '말'로써 방향성을 제시해준다면, 소설은 '삶'으로써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

p141

 그러나 시종일관 설명만으로 일관하면 독자에게 가독성도, 재미도 주지 못하고, 감정이입도 유발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기에, 소설가는 가급적 보여주기를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고전'으로 회자되며 몇백 년 동안 끈덕지게 읽히는 소설들에 유독 몇 장씩 이어지는 공간 묘사나 기후 묘사, 인물의 외양 묘사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공간과 기후와 인물의 외양 묘사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공간과 기후와 인물의 외양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여줄수록, 소설가가 내세운 장소와 기후와 인물이 '진짜'처럼 체감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p147

 보여주기와 설명하기는 소설가가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 하는 숙제다. 어느 정도의 비율을 택하는 게 좋은지, 어느 부문에서 보여주기(혹은 설명하기)를 택하는 게 알맞은 선택이었는지는, 그 소설의 생산자인 소설가도, 독자도,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난제이다. 다만 이야기 전체로서 소설이 매력적으로 다가갔다면 그 소설은 성공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표현 기법을 어떤 비율로 동원했든 독자를 잡아끄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산출해내는 것, 진짜 현실에 존재하는 듯한 생생한 인물을 주조해내는 것, 소설 쓰기의 핵심은 그에 있을 것이다.

p166

 ...소설을 처음 쓰는 당신이 감동을 주는 '진짜 같ㅇ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싶다면, 자기 자신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쓰는 편을 택하는 게 최선이라고, 그것은 당신 내부에 당신이 조사해야 할 세계에 대한 방대한 자료가 이미 넘치도록 쌓여 있고, 이입해 들어가야 할 인물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똬리를 틀고 자리 잡은 그 인물은 언제든 세상으로 튀어나가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그러니 당신이 첫 소설을 쓰려 고심하고 있다면 '나'의 이야기를 쓰라.

p195

 한동안 불쑥불쑥 떠오르는 꿈에 진저리를 치는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동아줄 활동에 매달렸다. 몇 개월 뛰, 선택한 피아노 곡을 거뜬히 외워서 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집에 들인 화분이 200개를 넘겼다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 나는 내가 그 꿈을 떠올려도 더는 진저리 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220

 당시 썼던 글에 가독성과 재미가 부족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글에는 내 '진심'이 없었다. 글의 가독성과 재미는 '진심'과 직결된다. 작가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할 때, 글에는 가독성과 재미가 따라붙는다. ...글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을 그 2대 요소는 단순한 테크닉에서 나오지 않는다. 테크닉은 가독성과 재미를 이루는 일부 요소는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당시 썼던 '정의감 만렙'의 글은 내 특정 욕망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별로 관심이 없는데도 이름을 얻기 위해 썼던 그 글은 '쓰나 마나 한' 글이었다. 읽기 전과 후에 아무런 차이를 일으키지 못하는 글, 흔하게 널린 진부한 윤리 담론이었다.

p226

...함부로 남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허벅지를 찌른다. 세상에, 타인을 깎아내려 자신을 내세우려 드는 것처럼 유치한 행동은 없ㄷ.

p230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만족감에서 온다. 만족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앎'에서 온다. 내가 무엇을 가질 수 있었는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할 수 없는 일이 무었이었는지, 무엇이 사회의 탓이고 무엇이 내 탓인지, 돈이 사람에게 미치는 여향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지와 같은 인과관게를 알게 되면 막연했던 욕망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바뀐다. 내가 진짜 갖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이고 갖지 않아도 별 상관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물질에 대한 욕망도 제어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순간에 굴욕감에 지배당하고, 어떤 순간에 굴욕감을 소화할 수 있는지 파악하면,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분노의 순간을 분류해 각각 다르게 대응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을 가장 빠르게,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글쓰기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내 자본주의적 욕망을 인정하고 잘 제어하기 위해 글을 쓴다고.

p250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어떻게 살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네가 살아온 역사와 그 역사를 통해 몸에 익힌 삶의 기예에 달렸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나의 삶을 모델 삼아 너의 삶을 미학적으로 세련돼 보이게 만들어보도록 하여라....'돈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는 고고한 학'이었던 내 자아상은 '비자본주의적 동기가 자본주의적 동기보다 눈곱만큼이라도 더 많이 들어 있는 삶을 영위하려고 버둥거리는 유한한 사피엔스 종'으로 바뀌었다.

p253

세상에는 구름처럼 많은 사람이 있고, 그 모든 사람이 내가 쓴 글을 좋아할 수는 없다.

p277

...같은 내용을 읽어도 독자는 각자 쌓아온 인생의 역사와 그에서 형성된 성향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응을 보이게 된다.

 작가가 쓴 책을 호의적으로 읽은 독자는 작가에게 일종의 동창생과 같다. '같은 생각'이라는 학교를 거쳐간 동창생. 머릿속에 일정한 패턴의 사고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정신적 친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p289

...비호감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이유를 알아냄으로써 문제의 부피를 줄인다. 문제를 분류해 쪼개고, 그 과정을 통해 내 감정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려고 애쓴다. 존재 전체의 문제가 아닌 존재 일부의 문제로 치환하려 노력한다.

p302

...나는 나를 스쳐가는 타인들에게 매력적인 상대로 남고 싶다. 나를 만났던 누군가에게 훗날 '자신이 하는 일의 성격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타인과의 사이에 경계선을 설정하고 고수하는 실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기억되고 싶다. 그렇게 되기 위해 내가 만났던 기자들의 모습을 차분히 돌아본다. 타인의 모습이 결국 내 모습이다. 모든 타인은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지점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스승이다.

p313

 어떻게 해서 '작가'의 핵심 정체성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써서 드러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쓰기의 기술, 글쓰기의 경험, 글을 쓰면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상세한 정경 묘사가 필요했다. 작가의 핵심 정체성은 무엇인가. '거절'이다. ...반짝이는 존경과 상찬의 말 뒤에 놓인 심연의 한가운데 도사린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타인에게 너의 원고를 출간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는 것. 너의 원고가 가치 없다는 말을 듣는 것. 너의 원고가 이전 작품보다 '별로'라는 말을 듣는 것.

p315

...이 서사가 각자 다른 위치에서 각박한 시대를 살아내고 있을 이들에게 한 조각 웃음, 한 조각 위로, 한 조각 정보, 혹은 한 조각 심정적 지지로 맺힌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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