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16

 사는 건 왜 그렇게 잔인한 일인지. 그렇게 근근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등록금을 모아 놓으면 친척 중 누군가가 찾아와서 그 돈을 가져가버렸다. 그들은 어린 조카의 등록금을 가져가서 자신의 생활비로 쓰는 듯했다. 그것이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었고 세상에는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때는 어려서 몰랐다. 아무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맞서 싸우며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따. 아니 어쩌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알았더라면 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p134

 다만 결과에 대한 긍정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과정과 태도에 대한 긍정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내가 잘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그 자체가 긍정이어야 한다. 이점을 오해하면 결과에 대한 기대가 과도하게 커져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좋은 결과를 보장해주면 내가 열심히 치료받겠다는 조건부 긍정이 되기도 한다.

요구르트 아저씨를 볼 때마다 진정한 긍정은 결과물이 아니라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며 천천히 스며드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태도 안에 있는 것임을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나의 요구르트 아저씨에게 진짜 긍정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있다.

p153

 모든 관계에는 거리와 선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관계를 맺으며 서로 적절한 선, 편안한 거리를 찾는다. 그 적정 수준은 두 사람의 관계의 깊이에 의해 결정되고, 관계의 깊이는 다시 여러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 만남의 빈도, 감정적 교류, 공동의 목표의식, 서로 간의 이해관계, 두 사람의 친밀도, 성향, 심리적 거리, 그리고 물리적 거리 등. 그런데 이때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적절한 거리는 다를 수 있다.

p193

 응급의학과 의사 남궁인 선생은 <제법 안온한 날들>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라고 했다. 의사가 보기에 아무리 불행해 보이는 환자와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나갈 것이며 불행은 그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것이라고, 그 말이 옳다.

p202

 여전히 나는 윤리가 의료윤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 문제는 언제나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부끄럽지 않으려고 바둥거리고 산다. 내가 불완전한 사람임은 충분히 자각하고 있으며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서 나보다 나은 사람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며 배우며 나아가고 있따. 적어도 이것만큼은 유지하려고 한다. 그것이 어쩌다 '윤리'라는 말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으며.

p211

 ...나를 가장 먼저 돌볼 사람은 나뿐이다.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잇을 때 남을 돌볼 수 있는 능력과 여력이 생긴다. 이타적이기만 하려다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서 다른 사람도 돌보지 못하는 것은 결코 바람적인 일이 아니다.

; 오타인듯.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일단 나를 제일 먼저 돌보자.

p220

 공적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은 공적 시스템 없이 인맥에 의한 사적 시스템으로도 생존과 생활에 문제가 없다. 오히려 사적 시스템은 늘 공적 시스템보다 위력을 발휘해왔다. 그래서 어려운 때에는 아는 사람이 있어야 안심이 된다. 사적 시스템은 그렇게 '특권'을 형성해내고 그것은 점차 공고해지며, 그 결과 '인맥은 중요한 법'이 되고 만다.

...정의롭고 좋은, 안전한 나라에 대한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제로 정의롭고 안전하고 좋아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병원 안이든 밖이든 구호는 구호로 남고 뒤에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각자도생의 나라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도왖지 않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각자 스스로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던 평범한 사람들의 뼈저린 경험에서 생겨난 말, '각자도생'. 내 생존은 누구도 신경쓰지 않으므로 우리는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병원에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씁쓸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p240

 죽은 이는 말이 없다. 현실적으로 일을 개선해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현장에는 오지 않으므로 같은 일은 늘 반복된다. 그러다 언젠가는 내 차례가 되지 않겠는가. 나 또한 현장을 방관한 대가로 같은 차례를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답 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결국 남는 물은 이것뿐이다. 존엄한 죽음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마지막 순간에 의사로서 진정 환자를 위하는 일은 무엇인가.

p248

 未死미사

 아직 죽지 않은 자. '살아 있는'보다 '아직 죽지 않은' 편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길고도 무겁다.

 p250

...먹고 자고 누워 있는 삶이라고 해도 생을 유지하는 데에는 돈이 든다. 효도는 이상이고 도덕은 뜬구름이지만 현실은 돈이다. 앞으로도 괜찮을지는 걱정이 되었다.

p254

 오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쉽다. 입으로 도덕을 외치고 윤리를 말하는 일도 참 쉽다. 똥 치우며 병수발하고 비용 부담하긴 어려워도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만 있을 뿐 인간다움을 완전히 잃는다면 그때에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혹 당신이 그런 상황이 된다면, 혹은 인지 기능 없이 단순히 숨만 쉬는 상태가 된다면 그런 상태로 몇 년 더 사는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될까? 

 물론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내가 판단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다. 내게는 의미 없어 보이는 삶도 당사자에게는 의미 있을 수 잇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흔이 넘은 망자의 장례식장에서 마주하는 가벼움을 생각해볼 때, 죽지 않은 세월이 산 세월을 조먹어 버린다는 생각이 지나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기억을 잃고 스스로를 잃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채 단지 '살아만'있는 환자들을 마주할 때, 내가 그 같은 시간을 늘려온 것은 아닌지 책임과 죄스러움을 느끼곤 한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인지는 이번에도 알 수가 없었다.

p261

 삶을 잊고 있을 때 떠나간 환자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마지막은 언제나 나를 향해 묻는다. 언젠가 당신도 여기에 다다르게 될 텐데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떤 모습으로 여기에 당도하고 싶은가? 나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신이 번쩍 들고 다시 한번 생의 감각이 팽팽해진다. 어쩌면 죽음만큼이나 삶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잇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음만 잊고 사는 것이 아니다. 삶도 잊어버린 채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것, 이 삶을 느끼지 않고 산다. 잘 들어보라. 삶을 잊은 당신에게 누군가는 계속 말을 걸어오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종착역에 당도한 이들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묻는다. 이제는 남아 있는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서 대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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